창세기 나눔

창세21(2), 9-21: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마리아 아나빔 2010. 11. 12. 14:29

 

 

 

                        창세21, 9-21: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소실 하갈 사이의 갈등은 이미 16장 1절-16절에 소개 되었다. 16장의 기록은 솔로몬 궁의 서기관들이 작성했고 21장의 기록은 엘로히스트들이 작성했다. 엘로히스트는 기원전 922년 솔로몬 왕국이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라졌을 때 북쪽에서 저술 활동을 벌인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 부른 데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에 관한 일들을 묘사할 때 솔로몬의 서기관들인 야훼스트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이나 정서를 통해서 표현하는 의인화 수법을 쓰지 않았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꿈을 통해서 나타나시거나 아니면 천사를 시켜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이것은 엘로히스트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들의 엄격한 정신을 이어받아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 16장의 야훼스트의 기록에서는 임신 중인 하갈이 여주인을 업신여기고 이에 분개한 불임녀 사라가 하갈을 구박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21장의 엘로히스트 기록에서는 하갈이 별다른 이유없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난다. 16장에서는 주인의 구박을 피해 하갈이 스스로 자유의 삶을 찾아 사막으로 떠나는데 21장에서는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쫓겨서 사막으로 나간다. 곧 16장에서는 하갈의 강인한 면이 부각되는 반면, 21장에선 사라의 강한 면이 부각된다.

 

-사라는 결멸적인 어조로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에게 조른다. 심지어 두 모자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사라는 자신과 이사악이 얻게 된 기득권을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고 분쟁의 여지를 그 싹부터 냉혹하게 잘라 버린다.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놀다 친구가 되어 동등한 위치에서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기어오르는격이 되어 이사악이 확보한 상속자의 지위를 넘나보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쐐기를 박는 것이다. 사라의 양보심 없는 결단을 현대인들의 윤리적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라는 이사악만을 위대한 상속자로 보고 있다. 또한 그녀의 장래 운명도 자기 아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 이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이라 할 때 “놀다”라는 뜻은 “희롱하다”라는 뜻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말을 “박해하다”로 받아들인다.

 

-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앙탈을 부리는 사라 앞에서 아브라함은 몹시 난처해졌다. 비록 몸종이긴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했던 여자, 그리고 그녀가 낳아 준 자기 살붙이인 천진난만한 아들을 어떻게 절박하게 내보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하갈과 이스마엘이 자기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사라의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졌지 않는가? 창세기 16장에 보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조른다.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 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 사이에 끼여 아브라함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를 위로하시면서 해결책을 마련하신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고 사라의 청을 들어 주어라.이 말은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구는 당신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일러 주시는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한 배려도 보증하시는 것이 된다. 이사악에게서 난 자식이 네 정식 혈통이 되겠지만 이스마엘도 너의 자식이니 그의 후손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느님의 해결책은 한 쪽을 위해서 다른 한 쪽을 희생시켜야 하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사라의 소원대로 이사악을 통해 아브라함의 정식 혈통을 이어가실 것을 보장해 주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만큼 그 아이에게서도 큰 민족을 이루시리라고 약속해 주신다. 하느님의 이 해결책은 사라와 하갈 모두를 만족시키고 따라서 두 여인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껶고 있는 아브라함도 큰 고민을 덜게 되었다.

 

-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양식과 물 자루를 준비하여 하갈에게 메어 주면서 두 모자를 집에서 내보낸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손쉽게 옮겼고 또 앞에서 이사악과 함께 놀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스마엘이 아직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제계 문헌의 역대기 16장(21,5.8)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86세 때에 이스마엘이 쫓겨날 때의 나이는 17살이 된다. 두 문헌의 차이를 여기서 엿 볼 수 있다.

 

- 하갈은 아이와 함께 브엘세바의 황량한 들판에서 헤매다가 물이 떨어지자 가시덤불 그늘에 아이를 내려놓

는다. 그리고 자신은 멀리서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어미로서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메마른 빈들 한복판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진다. 이스마엘의 이 울부짖음은 억울한 이들의 송사를 귀기울여 들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엘로히스트는 하느님이 직접 응답하시지 않고 하늘의 천사를 시켜 응답하셨다고 에둘러 표현한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하느님은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발견하게 해주신다. 그래서 하갈은 물을 떠다 아이에게 먹이고 둘 다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하느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해주시어 바란 사막에서 건강하게 자라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된다.

 

-창세기 16장의 야훼스트 기록에서는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진 하갈이 자기 여주인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구박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의 엘로히스트 기록에서는 사라의 일방적인 변덕으로 하갈과 아이가 쫓겨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늘어 있어 왔다. 아무도 그들의 억울한 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신다. 브엘세바의 빈들에서 어머니를 잃고 외로움과 갈증 속에서 울부짖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하느님은 들어 주셨다. 멀리서 우는 아들을 지켜보는 하갈도 마음이 천갈래만갈래 찢겨져 소리 죽여 통곡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의 울부짖음과 하갈의 통곡을 하느님의 도우심을 정식으로 청하는 기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소리만으로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고 남았다 하겠다.

 

 

                              21,22-32: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

 

    저자는 성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적어도 세 가지의 구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곧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 두 가지, 이사악에 관한 것이 하나(26:26-33). 이것은 성조의 아내의 정조가 위험에 빠졌다는 구전이 세 가지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20장)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아브라함에 관한 두 가지 구전을 엮어서 하나의 기사로 만들었다. 엘로힘 전승에 따른 22-24, 27, 31절에서는 “브엘세바”는 “맹세(샤바)의 샘”이란 뜻이라고 설명한다. 야훼전승의 하나에서 온 25-26, 28-30, 32-33절 가운데는 “브엘세바”는 “일곱 개(세바 일곱 마리의 새끼양)의 샘”의 뜻이라고 설명한다. 아람어에서는 이러한 뜻으로 구전되었다. 또 제 3의 구전 가운데 히브리어(26:33)도 이 뜻을 비치고 있다. 34절은 아람어역에는 없다. 다른 자료에서 따다 뒤에 덧붙인 것이다. 셋째의 구전은 모두 똑같이 성조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와 보호를 이야기하고(이교도까지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인간 끼리 맺는 계약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성조의 계약은 더욱 중요하고, 또한 신성한 것임을 할 수 있다.

 

  또한 여기 나오는 불레셋 땅(32절), 즉 불레셋 사람은 여기서는 아브라함, 후에는 이사악(26:1)과 가까운 사이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울 및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호전적인 종족의 초기 조상인지도 모른다. “불레셋”에서 변화된 “팔레스티나”라는 이름은 이 민족 소멸 후 오랜 오늘에도 남아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91-102.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89-95.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49-25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