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체험에서 시원에 관한 설화로
(창세기 설화가 형성되기 까지)
모세 오경 전체가 핵심으로 삼고 있는 바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백성으로서 처음부터 겪어온 근본체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체험이다. 그 체험이란 이집트에서의 해방, 시나이산에서 자기 조상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 광야를 헤매던 유랑생활, 약속의 땅의 정복이다. 즉 히브리인들이 살아온 ‘구원의 역사’이다. 이 구세사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은 자기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았고, 자기네가 바로 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임을 의식하였으며, 그렇게 선택하실 때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었을 터인데 이스라엘로서는 아직 그 목적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노예처지에서 자유 신분으로, 이국땅에서 자기 땅으로 옮겨가는 것이었고 하느님이 자기들을 보호하셨다기보다는 품에 안고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더 어울렀다. 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조상들의 하느님, 약속의 하느님, 살아계시고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억압받는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하느님, 구원자 하느님으로 보여주셨다 이것은 당신에 관해서 추상적인 이념을 알려주는 데 몰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위력을 발휘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요, ‘행동을 통해서’ 알려지시는 하느님이시다. 즉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는 분이다.
이 놀라운 하느님 체험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자기네가 누구인지도 인식하게 된다. 하느님이 뽑으신 백성이라는 것 외에도, 자기들이 하느님께 반역하는 백성, 하느님께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백성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불충실할 때마다 실패와 파멸을 경험하고 그 대신 성공과 안녕과 복지는 자기네 하느님께 대한 충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준수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여러 세기가 흐른 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 안전하게 뿌리박았다고 스스로 느낄 무렵, 즉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와서 그들은 이 구원의 역사를 재음미하기 시작하였다. 또 구원의 역사가 판관시대에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되었음을 깨달았고, 이스라엘이 불레셋 사람들의 패권에 눌려 당하던 갖은 굴욕으로부터 끄집어 내시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임금 다윗에 이르러 위대한 번영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같은 경험에서 자극을 받으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인류 전체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민족들이 그러했듯이, 인간을 번민케 하고 인간 존재를 비극적으로 만들며 늘상 불안정하게 만드는 세상에 악이 현존함을 알게 된다. 그들이 아는 하느님은 사악하거나 변덕스러워 인간의 고통을 보고서 재미있어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악신들이 선신들과 겨루면서 인류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이 아는 하느님은 자애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다. 자기들에게 불운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충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인식하였다. 전 인류가 고통과 죽음과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단절의 결과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일 외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이러한 고찰은 이스라엘 현자들로 하여금 머나먼 과거로부터 전수되어 오던 전승과 기억에 담긴 심원한 의미를 사색하도록 모세 이전으로, 성조시대 이전으로 생각을 돌이키게 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그들의 역사적 종교적 체험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구원의 제공과 구원의 거부 등 역사 안에서 특징적인 순간이요 기준점이 되는 몇몇 고대설화에 빛을 던져주었다. 모든 기억과 전승 외에도 이스라엘은 거기서 시원의 드라마, 전 인류의 방향을 뒤틀리게 한 하느님께 행한 최조의 거부를 인식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하느님께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찰하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이유, 하느님이 자신들과 조상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신 이유,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된 역사의 명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마침내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색을 거치면서, 또 하느님의 영감에 인도되어 이스라엘에게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점차 깊어졌다. 자기네 하느님이 곧 우주의 주님이시고 만유가 그분에게 달려 있으며 그분이 만물의 원천이시라는 것이다. 다른 신들은 무용한 석상이요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자기네 하느님 야훼만이 홀로 살아 계시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앞 장에서 말한 ‘시원에 관한 이야기’에다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하는 성서의 장중한 첫 장을 할당했던 것이다.
창세기 첫 장들에서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수행한 종교적 성찰의 결과이고, 자기네 과거와 전인류의 과거를 ‘답사’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 내용은 인류의 심각한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 답변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 답변은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희망의 하느님이요, 약속의 하느님이며,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들과 마주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과거는 물론이려니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도 사람들과 마주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이스라엘의 시선은 앞을 내다보기 위한 자극이 된다.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이스라엘은 자기네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걷도록 촉구한다. 온갖 불충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인간들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촉진한다.
역사적으로 따진다면 성서의 이 장들이 다른 장들에 비해서 훨씬 후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서론처럼 성서 맨 앞에 적절하게 놓이게 되었다.
창세기 1-3장의 성서 나눔을 매듭지어 본다면, 이 장들은 어떤 ‘사건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만유의 기원, 하느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원초의 인간조건, 그같은 우정을 거부하였음과 그 선택에 뒤따른 온갖 비극적 체험, 마지막으로 그러한 인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당신의 우정을 쏟으시는 자비가 지극한 하느님의 선하심 등이다.
아울러 이 장들은 ‘예언문서’ 라고 하겠다. 인간적 접근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시원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감에서 우러나고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나온 결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들은 ‘지혜문서’ 라고 불리울 만하다. 모든 지성을 지닌 존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조만간에 제기할 만한 근본적인 ‘의문’들에 답변을 주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왜 우리는 실존에 악이 존재 하는가? 우리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창세기 첫 장들에 나오는 대답은 아직 결정적이고 완벽한 대답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에게 크나큰 희망을 준다. 하느님은 인류와 원초의 우정을 회복하자고 제안하신다. “못 된 행실을 한 자라고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는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에제 18,23)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6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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