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코헬렛(3, 1-22): 무엇이나 때가 있다

마리아 아나빔 2013. 10. 6. 21:01

 

                                                          

                                        코헬렛(3, 1-22): 무엇이나 때가 있다

 

 

들어가면서

 

 

코헬렛 3장 1-8절은 모든 것의 때에 대하여 말하면서 인생의 상반된 요소들의 목록에 대하여 나열한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9).라고 의문한다.

 

3장 9-15절은 인생에 모든 때가 있지만 그때에 대하여 인간은 알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교묘하게 도모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도 헛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시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하느님께서 만드신 조화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더할 수도 보탤 수도 없는 하느님의 때를 존중하면서 주어진 때에 온갖 노고 속에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선임을 충고한다(10-15). 즉 의인과 악인, 인간과 짐승의 운명은 다른가? 사후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자기 일을 즐기면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라고 코헬렛은 말한다(16-22).

 

 

 

Text 안에서

 

모든 일에는 때(1-8절)

 

3장은 1-15절과 16-22절로 구분된다. 1-15절은 자연현상 속에 있는 인간 행복의 덧없음에 대하여, 16-22절은 정의와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서술한다.

 

1-8절에는 일생의 전활동을 포함하는 대립개념을 보여주는 한 쌍의 표현이 열네 번 나온다. 1절에서 “때”란 ‘시기’또는 ‘때’로써 ‘시기’일정한 기간의 뜻을 지녔고, ‘때’는 순간의 뜻을 지닌다.

 

2-8절은 1절의 대원칙에 따라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괄하면서, 긍정과 부정의 측면에서 상반된 것들로 이루어진 14개의 쌍이 이어진다. 그 절반은 불행으로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들이다.

 

2절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탄생과 죽음) 곧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 없는 생사와 인간 생활과 비슷한 자연계의 사건, 파종과 수확에 대하여 말한다. 3절에서 죽인다는 것을 ‘부수다, 찌르다’로 수정할 수 도 있지만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이 목록에서는 이러한 극한적 예도 수용될 수 있다.

 

4절에서 웃을 때가 있으면 슬퍼할 때가 있고의 표현들은 신약성경의 자료들(마태 9,14-15; 루가 6,21; 요한 16,20)등을 참조할 수 있다. 돌을 던질 때, 모을 때, 껴안을 때가 이고.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열왕기 하권 32장 19-25절에 근거하여, 전쟁 때 이긴 병사가 적의 밭을 못쓰게 하기 위하여 돌을 던져 넣는 것과, 후에 밭을 원상복구 하는 뜻으로 돌을 주어 모아들이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집을 짓기 위하여 돌을 모아드리고 버리기 불필요한 돌을 던져 버린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어느 랍비는 이 표현이 남녀의 성교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잠언 5,20;아가 2,6).

 

6절에서 옷을 찢음은 슬픔의 표시이다(청새37,27; 판관 11,35; 2사무 1,2). 따라서 슬픔의 때가 지나면, 또 그 옷을 원상태로 입는다. “침묵할 때가있고 말할 때가 있다”에서 입을 다무는 것은 슬픔의 표시이고, 입을 연다는 것은 기쁨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물 때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고 하는 뜻이 가장 타당하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9절) 라고 저자는 1장 3절에 내놓은 의문을 다시 되풀이한다. 물론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저자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하여 마련된 때에 일어나야 할 것이므로, 각자는 자신의 생애에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때”에 대한 성찰(9, 11-12)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보았다. 경주가 발 빠른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전쟁이 전사들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또한 음식이 지혜로운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재물이 슬기로운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호의가 유식한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모두 정해진 때와 우연에 마주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의 때를 모른다. 몹쓸 그물에 붙잡히는 물고기들처럼 올가미에 붙잡히는 새들처럼 그렇게 인간의 아들들도 나쁜 때가 갑자기 그들을 덮치면 사로잡히고 만다.

 

 

장래를 알 수 없는 미래 (3, 9-15)

 

인생에 모든 때가 있지만 그때에 대하여 인간은 알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교묘하게 도모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계획을 정신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는 코헬렛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는 한정된 것이며, 평생에 일어나는 일을, 어느 정도는 할 수가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고, 인간의 마음속에 시간의 의식도 심어 주셨다”(11절). 여기서 구약성경은 “시간”이라는 이 말을 ‘영원’으로 옮긴다. 이는 추상적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시간이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로 계속하여 이어짐을 뜻한다. 즉 ‘영원을 향한 갈망’으로 이해하여 ‘영원’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본문의 본래 의도는 ‘시간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하기에 ‘시간의식’으로 옮겼다.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관한 인간의 정신적 시각은 제한적이고 국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12절).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생과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모두 맛볼 수는 없지만, 이것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쾌락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지속되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정하신 시간을 골라 내시거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풀이하신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마련된 것이며, 인간은 이 마련된 것을 바꿀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인간은 참으로 하느님의 지배 아래 사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지혜의 근본으로 제시한다.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사는 없다. 하느님 앞에 항상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인간사회에는 부조리가 있고, 사람이 동물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다. 또한 이 불합리 때문에 인간은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구약성경에서 “숨”(루아)이란 하느님께서 생물을 만드실 때 넣어 주시는 생명(입김), 영혼(네폐쉬)과는 다르다. 따라서 저자는 사람의 숨이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데는 의심이 없으나 짐승의 숨이 저승에 내려간다는 데는 의심이 있었다. 사람의 숨이나 짐승의 숨이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다 같이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질서가 엉클어진 사회(16-22절)

 

코헬렛의 저자는 당시 사회악 특히 정의를 지켜야 할 법정 같은 곳에서 부정의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16절).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심판자이시다. 그러나 언제 하느님께서 이 심판을 하실 지 아무도 그 때를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언젠가 곧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때에 모든 인간의 행실은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 이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위로이며 격려이다(17절).

 

사회에서나 종교에서나 부정의가 이루어지고, 짐승보다 나은 불의 짐승보다 나은 가장 중요한 지혜와 분별을 잃고 있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18절). 인간도 짐승도 똑 같은 티끌로 만들어지고 티끌로 돌아간다(창세 2,7,9; 3,19). 이 같은 사고방식은 욥기(10,9)와 시편 104편 29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목숨”은 19절의 “숨”과 같이 죽지 않는 영혼의 뜻을 가진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숨으로 사람도 동물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 숨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 받고, 죽을 때에는 거두어 가신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람의 숨은 하느님께 돌아가고, 짐승의 숨은 땅 밑에 내려간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설교자는 이에 깊은 의혹을 보여준다. 양자의 생명의 숨은 다 함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함께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생활의 미래에 대하여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마련될 것 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생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보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3,22)라는 말로 인생의 보람을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3,12-13).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2,24)고 고백한다.

 

 

나오면서

 

코헬렛이 제시하는 보람된 인생은 자기가 일한 만큼 얻는 것에 만족하며 그것을 즐기는 삶, 특히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코헬렛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요구되는 근본적 마음과 태도를 ‘하느님을 경외함’이라고 가르친다. 코헬렛이 말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은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말을 하며 악을 멀리하는 삶, 곧 최종 심판관이신 하느님 보시기에 그릇됨이 없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지상과 현세와 스스로에게 만족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태양 아래에 속한 것에 희망을 두고 만족을 찾으려는 삶은 “애쓰는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삶‘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력하고 애쓴 만큼 보람을 느끼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한계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 참고문헌: 구약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1818-1821.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 딸, 2007, pp.201-208.

                전도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259-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