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입문 II
1. 시편집 - ‘찬양가들의 책’
1) 히브리성경
시편집의 제목은 ‘찬양가들(터힐림)’ 또는 ‘찬양가들의 책(세페르 터힐림)’으로 되어 있다. ‘터힐림’이란 단어는, ‘주님을 찬미하라’를 뜻하는 ‘할렐루야’에도 들어있는 ‘찬미하다’라는 동사 ‘힐렐(피엘)’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시편집에 기쁜환호의 노래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상으로보면 탄원시편의 수가 찬양시편의 수보다 더 많다. 그럼에도 시편집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는 다섯 편의 시편으로 이루어진 종결 찬양으로 끝나며(146-150), 또한 시편은 탄원에서 찬양으로 넘어가는 전반적인 기도여정을 볼 수 있다.앞부분은 탄원시편이 주류를 이루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찬양시편의 비중이 커진다.
‘찬양가들의 책’인 시편에 탄원시편이 많이 들어있는 이유는 시편 34에서도 볼수 있듯이, 그들은 주님께 매달려 그분 안에 몸을 피함으로써 주님의 좋으심을 보고 맛들이지만(시편 39,9: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 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주님께 피신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삶이 그렇게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편은 직선형이 아닌 나선형의 기도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탄원- 찬양- 탄원- 찬양...) 따라서 ‘찬양가들의 책’에 탄원시편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은 마음과 눈을 들어 시편을 기도한 이들이 찬미, 그리고 우리의 찬미가 이 험한 세상의 삶 한가운데,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향하여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집은 분명 찬양의 책이고, 찬양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그 찬양은 다시는 탄원할 일이 없을 것 같은, 풍족함을 누리는 사람의 찬양이 아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 들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 안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아보고 가난한 이들 가까이 계시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편을 기도하는 것은 주님 안에 피신하는 구체적인 한 방법이 된다.
2) 그리스어 성경
시편집의 제목은 ‘프살모이’ 또는 ‘비블로스 프살몬’, 곧 ‘시편들의 책’이다. 여기에서 ‘시편으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미즈모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주로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2. 시편번호
현제 시편집에는 모두 150편의 시편이 들어있다. 그런데 시편집의 편집과정에서 번호를 붙인 것은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기원전 2세기).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의 시편 번호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보통 공동번역 성경이나 새 번역 성경에서 보는 시편번호는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구분에 따른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칠십인역이라고 하는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을 때, 여기서는 때로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방법으로 시편을 나누어 놓았다. 그 결과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의 시편 번호가 일치하는 경우는 시편 1-8; 148-150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번호가 그리스어 성경의 것보다 더 크게 되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의 경우 히브리어 시편의 번호를 따르면서 그리스어 시편의 번호를 괄호 안에 적어 놓았다. 전례서들에서 사용하는 번호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 번역본)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숫자가 있을 때에 숫자가 큰 것이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번호이다.
-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9와 10을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하나의 시편으로 본다(현대에도 여러 학자가 이 두 시편이 원래 하나의 시편이었다고 본다).
-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114와 115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하나로 본다(이 경우는 실상 -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사본에 따라
차이 나는 경우가 있다).
-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116을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두 개의 시편으로 본다.
-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147도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두 개의 시편으로 본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구분과 그리스어 성경의 시편 구분 가운데 어느 것이 옮다고 단정짓 어려울 때도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전례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성경의 시편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주로 팔레스티나 본토 밖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과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 사이에 펴져 가면서 구약성경을 사용할 때에 주로 그리스어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보다 그리스어 번역본의 비중이 커졌던 데에서 연유한다. 이후로 서방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성 예로니모가 그리스어 번역본을 참조하여 만든 대중 라틴어 성경(불가타)을 표준 성경으로 사용했고, 전례서들 역시 대중 라틴어 성경을 따라왔다. 그러나 근대 및 현대에 성경원무에 대한 관심이 켜지면서 히브리어 성경이 성경의 ‘원문’으로서 우선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히브리어 본문을 우성하고 시편 번호도 히브리어 성경의 번호를 따라가는데, 전례서에서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던 전통이 지금도 남아있다.
3. 시편저자와 머리글
시편의 머리글에서는 많은 경우 다윗의 이름(히브리어로 ‘러다윗’)이 언급된다. 그 이외에도 모세, 솔로몬, 아삽, 코라의 후손들, 여두툰 등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사실은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러’라 꼭 저자를 표시하려는 것인지 늘 분명한 것은 아니고 그 자체로서는 ‘다윗의’ ‘다윗에게’ ‘다윗을 위하여’ 등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꼭 머리글에 다윗이 언급된 경우가 아니라하더라도 유다교 전승에서는 그를 시편의 저자로 여겨왔다.
이러한 전승이 생겨난 것은 그가 시인이고 음악가이며 악기를 만들기도 했고, 전례와 종교 음악을 정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라 본다. 또 실상 머리글을 포함한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본문이 다윗이 시편의 저자라는 견해도 강화된다.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보다도 9편이 더 많은 82편의 시편을 다윗의 것이라고 말하고, 쿰란문헌에서는 다윗이 수천 개의 노래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율법이 모세에게, 지혜가 솔로몬에게, 시편이 다윗에게 유래한 것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다윗이 시편의 저자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일부 시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전제하고 있고, 또 다른 많은 시편은 언어적, 신학적으로 다윗보다 훨씬 후대인 유배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 시편들 안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시편들 안에 단편적으로는 오래된 표현이나 사고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한편 시편이 완성된 시기는 대개 다윗시대보다는 훨씬 늦고, 또 내용상 결코 다윗이 쓴 것일 수 없는 시편의 경우에도 편집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러다윗’이라는 머리글을 달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편들을 다윗에게 귀속시킨 데에는 다윗과 음악의 관계뿐만 아니라 더 깊은 신학적 동기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시편들이 제시하는 다윗의 모습은 승리자이며 정복자인 다윗의 모습보다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고통 받은 의인이라는 측면을 부각한다는 점이다. 영광스러운 정복자이기에 앞서 박해받고 고통받는 기도자로 제시한다. 따라서 다윗의 시편들에 제시하는 메시아는 제2이사야서에 들어 있는 주님의 종의 노래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고통 받는 메시아상에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시편해석에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유다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다윗과 동일시하는 집단적 해석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해석은 시편에서 다윗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에게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집단적 해석을 통해서, 고난의 역사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역경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했고 결국은 하느님께 구원되었던 다윗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스스로를 메시아적 백성으로 이해하고 다윗을 모범으로 삼아 그의 시편들을 기도했던 것이다.
1) 전치사 ‘러’와 함께 사용된 머리글들
전치사 ‘러’는 ~에게‘ ~를 위하여, ~에 관하여’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꼭 저자를 표시하는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아삽의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코라 후손들의 시편은 시온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특징이 있다.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것은 머리글에 ‘지휘자’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인데, 이 경우에도 사용된 전치사는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분명히 저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휘자에게; 라고 옮긴다.
2) 시편의 유형을 나타내는 머리글들
‘시편(미즈모르)’ 이라는 제목은 대개 악기 반주에 맞투어 부르는 노래를 지칭하고, ‘기도(터필라)’는 청원 내지 탄원의 기도를 뜻하며, ‘찬양가(터힐라)’은 찬미의 노래를 뜻한다. 그 이외에도 사랑 노래, 혼인축가, 노래 등의 머리글이 있다. ‘마스킬’ ‘시까욘’ ‘믹탐’ 등의 용어는 의미가 분명치 않다.
3) 음악적 표기
악기 이름 또는 노래에서 사용할 가락을 표시해 주는 경우들이 있는데(새벽 암사슴, 나리꽃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4) 전례예식
시편 92에는 ‘안식일’, 시편 100에는 ‘감사를 위한 시편’ 등의 제목이 붙어 있고, 시편 120-134에는 ‘순례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사실 시편 120-134에 붙어 있는 제목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오름의 노래’라고 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대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곧 순례 때에 부른 노래들이라고 생각되어 ‘순례의 노래’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현재의 시점에서 지적해 둘 중요한 점은, 첫째는 이 머리글들이 시편 본문에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점, 둘째는 그렇다고 해서 머리글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편 편집자의 시편 이해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라는 점이다. 사실 개별 시편들의 저자는 알 수없다. 그러나 한 사람에 의하여 작성된 시편은 점차로 모든 이의 기도가 되어 갔으며, 한 시편을 다윗 또는 다른 어떤 저자에게 귀속시킨 것이나 아니면 일정한 제목들을 붙임으로써 시편 모음들을 형성하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인 것이다.
4. 개별 시편의 기원과 시편집의 형성
시편연구에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시편 하나를 놓고 그것이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묻는 것이고, 두 번째는 150편의 시편이 모여 있는 현재의 시편집을 눈앞에 놓고 이 책이 지금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1920년 초반 궁켈은 시편집에 담겨있는 시편들을 몇 가지의 기본적인 문학유형에 따라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즉 공통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고 전례 안에서 공통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시편들을 찬양시편, 탄원시편 등 몇 가지로 유형으로 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전해지고 있는 본문들이 수천 년의 전례에서 그 형태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궁켈은 지금 시편들을 보면서 찬양시편이면 찬양시편, 탄원시편이면 탄원시편, 이렇게 한 유형의 공통분모를 추출하여 현 본문의 기초가 되었을 원래 형태를 찾아내려 한 것이었고, 그 원래 형태가 특정한 전례들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시편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찬양시편
찬양시편은 여러 종류의 시편이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찬양권고- 찬양의 동기제시- 끝맺음’이라는 동일한 도식을 따른다. 이 시편들 가운데 일부 시편에서는 “할렐루야”와 같은 환호를 사용하거나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와 같은 후렴구를 반복하고 있어서, 개인적인 기도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전례적 배경에서 사용되던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 분류에 속한 시편들로는 하느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들, “주님은 임금이시다”로 시작하는 하느님의 통치 시편들(시편 93, 96-99), 시온의 노래들(시편 46, 48, 76, 84, 87)이 있다.
2) 탄원시편
탄원시편의 기본 틀은 먼저 하느님을 부르고 신뢰를 표현한 다음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며 간청을 드리고, 마지막에는 감사를 표현하거나 어떤 약속을 드리는 것이다. 탄원시편은 공통 탄원과 개인탄원으로 구분되며 공통 탄원은 외적의 침입이나 유배 등 이스라엘 민족이 처해 잇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느님께 탄원하는 것이다. 개인탄원 시편은 질병이나 죄 등 개인적인 고통 때문에 탄원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탄원가 공동 탄원이 언제나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신뢰고백은 일반적인 탄원 시편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데, 이 부분이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될 때에 신뢰시편이 되는 것이다. 신뢰는 하느님께 탄원을 하기위한 기초이다. 그분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위험 속에서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다.
3) 감사시편
개인 감사시편은 탄원시편에 뒤이어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탄원이 받아들여진 다음 지도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 탄원시편 끝 부분에서 약속했던 대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4) 교훈시편과 지혜시편
이것은 찬양시편이나 탄원시편과는 매우 다르다. 특정한 전례 안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 이 시편들은 대개 하느님을 향하여 2인칭으로 말씀드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이나 악인과 선인의 운명에 대한 가르침 등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흔히 시편의 저자가 듣는 이(제자)를 가르치는 형태로 되어있다.
이 시편들은 숫자상 많지 않으나 시편집이 성전에서 사용되던 성가 책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시편집에서 가장 긴 지혜시편은 119로서 총 176절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긴 시편은 전례에서 노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에는 시편집을 제2성전의 성가책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로 엮어진 시편집은 성가책이라기 보다는 읽고 묵상하기 위한 책에 가까운 것이다. 개별시편들은 각 시편 저자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생겨났고, 전례에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책’으로서의 시편집에서는 모든 시편이 전례를 위해 생겨난 것도 아니었고 또 이 책 자체가 전례용으로 편집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개별 시편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집중하는 이러한 접근방법에서는 현재의 시편 본문보다도 그 본래 형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전례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실제로 현재 시편집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특정한 전례 또는 구체적인 발생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집에 들어와 있는 이 기도들은 이미, 처음 그 기도를 한 사람만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다른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그 노래를 공유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 노래는 여러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열린 본문이 되어가는 것이다.
특히 개별시편들은 읽다보면, 기도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모호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사람이 질병 때문에 기도하는 것인지, 죄 때문에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수의 공격을 받은 것인지 등 모호하다. 그러나 이 모호성을 통해서 그 시편은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 기도자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의 기본 특성에 속한 것이고 시편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에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시편은 그 시편을 처음 기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시편을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그 시편을 우리의 기도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시편을 읽을 때는 시편들을 하나씩 떼어서 고찰하며 시편집 전체의 짜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시편집의 시편 배열순서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반면 현재 상태의 시편집의 짜임, 편집 의도에도 큰 관심을 갖는다.
5. 시편집의 짜임
시편집이 형성되어 온 과정을 보면, 개별 시편들이 모여서 작은 모음집을 형성하고, 이들이 다시 한데 모여 한권의 책을 형성하게 된다. 이 발상은 유다교와 교부들의 시편 해석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편집을 한 권의 ‘책’으로 이해한다. 사실 지금까지 시편연구의 지배적인 경향은 개별적인 시편들을 따로 떼어서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150편의 시편을 한데 모아 그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읽는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 많은 부분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편들의 배열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신학적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기원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즉 시편집의 시편 배열이 그 편집자가 생각했던 전체적인 어떤 틀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를 전해 준다는 것이다.
시편집의 구조는 다섯 권으로 나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모세의 율법(토라)이 다섯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 비길 수 있다. 그러기에 시편집은 작은 토라, 토라에 대한 묵상 또는 응답으로 주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1-2(군왕시편2): 도입/ 토라+ 메시아/시온/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지배
3-41(제1권): 다윗시편/ 3-14;15-24;25-34;35-41(군왕시편 41)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42-72(제2권): 코라시편/ 42-49
아삽시편/50
다윗시편/ 51-72(군왕시편 72)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리라, 그 분 홀로 기적들 을 일으키신다. 그분의 영광스러우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 받으시리라.
그분의 영광은 온 누리에 가득하리라, 아멘, 아멘!)
73-89(제3권): 이삽시편/73-83
코라시편/84-89(86은 다윗시편)/ (89는 군왕시편)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90-106(제4권): 모세/90-92
주님의 왕권/93-100(제목없음)
다윗/101-106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온 백성 은 말하리라. “아멘” 할렐루야
107-145(제5권): A. 찬미시편 107(주님의 왕권)
B. 다윗의 시편/108-110
알파벳. 토라 시편/ 111-112
파스카 시편: 113-118
알파벳. 토라 시편/119
순례시편/ 120-137(시온+다윗)
B. 다윗시편/138-145
A. 찬미시편/ 145(주님의 왕권)
(내입은 주님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고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영영세세.)
146-150(주님의 왕권): 종결 할렐(할렐루야 10번). 시편의 해석
(창조와 토라의 바탕이 되고 있는 하느님 통치의 종말론적 실현)
다섯권의 시편의 나뉘임이 군왕시편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이것은 ‘왕권’과 ‘나라’가 시편집의 주요 관심사라는 것이 드러난다. 시편집 1-2권의 많은 시편이 다윗시편이고, 시편집 제2권을 끝맺는 시편 72에 “솔로몬”이라는 머리글이 붙어 있으며, 시편 89가 다윗 왕조의 붕괴를 탄식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시편집의 짜임과 이스라엘의 역사 사이에 대응점들을 볼 수 있게 된다(G.H.Willson 등의 견해).
시편집 1-3권은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 특히 그 전성기인 다윗, 솔로몬 시대에 해당하며, 시편 89는 왕정 붕괴와 유배의 시점에 대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어어 나오는 하느님의 통치를 노래하는 시편 93-100은 이스라엘의 왕정붕괴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되며 이 부분이 신학적 중심을 이룬다고 본다. 시편 4-5권에서는 다윗 왕조가 아닌 하느님의 통치가 중심 주제가 되고, 현재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고 있는 임금이 아닌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군왕시편과 함께 시편집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시편이다. 시편집 전체를 여는 시편 1이 지혜시편이고, 시편집 제 3권을 시작하는 시편 73편이 지혜시편이며, 시편집 제4권을 시작하는 시편 90도 지혜시편이다. 시편 107에도 마지막에는 지혜 문학적 경향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시편집이나 어떤 시편 모음을 시작하거나 마치는 시편은 그 모음의 마지막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지혜시편이 각 권의 첫머리에 놓임으로써, 시편집은 실제 전례에서 사용되는 찬미와 탄원의 기도라기보다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책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시편집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하나의 길잡이, 지침서이다.
시편의 유형들과 연관해서 시편집에서 큰 덩어리들을 이루고 있는 찬양시편과 탄원시편은 시편집의 기원, 곧 개별 시편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반면 군왕 시편과 지혜시편들은 개별적으로 덧붙여진 것으로서, 시편집을 하나의 책으로 엮는 편집자의 의도를 드러내 보여준다. 군왕시편은 하느님의 통치 시편과 함께(시편93-100) 시편집의 주제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며, 지혜시편(특히 시편 1)은 시편집이 전례에서 사용되는 ‘성가책’이 아니라 ‘묵상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생겨난 시편집은 다시 기도에 사용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 공동체의 전례에서 사용된 것보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작은 공동체들 안에서 시편을 음송했던 흔적들이다.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3분의 1일 시편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 들은 시편을 자주 기도에 이용했다. 그리고 예수님까지 십자가상에서 인용했다. 당시 유다교 신자들 가운데에는 1주일에 150펀의 시편을 모두 바쳤던 이들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초기의 수도승들도 시편을 가지고 기도했고,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150편의 시편을 1주일에 나뉘어 바쳤다. 이어서 우리가 바치는 시간전례의 형태가 점차로 생겨나게 되었고, 현재 4주 동안에 150편의 시편을 나뉘어 바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시편을 기도에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시편은 처음부터 기도였기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책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시편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 참조문헌: 시편 이스라엘 위에 좌정하신 분, 안소근, 2011, 시편입문에서(pp.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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