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독백(3장)
욥의 세 친구들 (2:11-13)
• 테만 사람 엘리파즈;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초파르
• 욥을 위안하고[דנו] 위로하기 위해 찾아옴.
• 그들은 목 놓아 울며, 저마다 겉옷을 찢고 먼지를 위로 날려 머리에 뿌렸다.
•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
1. Denial: 욥의 첫번째 반응과 7일간의 침묵
2. Anger: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욥 (3:1-10)
3. Bargaining: 차라리 죽었더라면 (3:11-19)
4. Resignation
5. Acceptance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욥 3:11)
• 엘리야 :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1열왕19,4).
• 예레미야 :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
(예레20,18)
삶은 선물인가 부담인가?
•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3:20)
• 삶은 부담스러운 것?
• 욥은 무엇에 대해 불평하는가?
Text 안에서
“차리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 3.3) 욥의 독백은 자신이 태어난 날에 대한 부정으로 시작된다. 욥은 그날이 암흑의 날이길 바라며 빛을 거부하고 있다. 성경은 주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창조의 첫날은 빛이 생기는 날이었다. 주님은 “빛이 생격라” (창세 1,3)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욥은 빛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주님의 창조 사업 자체를 거부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욥이 밤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태어난 그 밤조차 어느 날에도 끼이지 않기를 바란다(욥 3, 6). 밤의 어둠은 빛조차도 빛을 잃어버리길 바라는 시간이다. 욥은 모든 것이 어둠 자체이기를 바라고, 절대적인 ‘없음’ 자체이기를 바라고 있다. 욥의 전적인 부정은 절대적인 자기부정이다. 있는 것을 없애는 식의 부정이 아니라 있기 이전의 상태이길 바라는, 그래서 있음 자체가 없는, 말 그대로 ‘없음’이다.
욥은 레비아탄을 깨우는 이들을 부르며 그들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를 바란다(3,8). 레비아탄은 바다에 사는 혼돈의 괴물이다. 레비아탄을 깨워 자신이 태어난 그 밤을 저주하기를 바라는 욥은 창조 질서가 세워지기 이전, 하느님의 영이 물위를 감돌고 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한다. 레비아탄을 깨우는 것은 아직 꼴을 갖추지 않은 세상,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세상, 주님이 없는 세상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지금 눈앞에 존재하시고, 자기 머릿속에 계셔야 주님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할 게 아닌가. 지금 욥은 주님이 피조물과 관계조차 없었던 그때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욥의 이런 자기부정은 예레미야와 많이 닮아있다(예레 20, 14). 예레미야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 따르는 박해의 고통에 대한 절규였다.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인 욥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에 대한 절규로 태어난 낮과 밤을 저주한다. 철저한 자기부정의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마저 거부하는 절망 가득한 호소는 어떻게 보면 주님께 대한 강한 의존의 또 다른 표현이다. 당신의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을 감당하기가 그 만큼 힘이 든다는 말이고, 당신 외에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한다. 그런데 욥 3,11부터 욥이 내뱉는 고통에 대한 토로 방식이 사뭇 달라진다. 계속되는 물음이 등장한다. 어찌하여, 어째서, 왜...? 라는 물음이 요구하는 답은 고통의 원인에 달려 있지 않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님 앞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왜”라는 물음이 강조한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자신이 지금 버젓이 살아있으니 이다. 창조의 순간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싶지만 피조물로, 한 인간으로 멀쩡히 살아있으니 조물주이신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있어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욥은 죽음을 지향한다. 죽음은 욥에게 “인식”으로 이해된다(욥기 3,13). 욥에게 죽음은 사라져 없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반대말이다. 심지어 악인들마저 소란을 멈추고 쉼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죽음이라고 욥은 애써 말한다(3,17). 욥이 죽지 않고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은 쉼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며, 죽은 자들보다 못하게 버림받았다는 말이다. 시편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머리 있습니다(시편 22,2).
욥이 “왜”냐고 계속해서 묻는 것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고,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드냐는 물음이다. 그렇다고 매달릴 곳은 그분, 주님 밖에 없다.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고 욥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의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 3,20) 산다는 것이 고통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적어도 욥에게는 고통으로 각인된다. 오히려 죽음이 환호와 기쁨의 자리다(3,22). 생명을 주시고 사방을 에워싸 버리는 하느님이시기에(3,22), 욥은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 생명은 그래서 전적으로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은 그곳에 아무런 권리도, 권한도 없다. 인간은 살아있음의 주인이 아니다.
욥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욥은 자기 존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이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처참한 것이더라도 그것이 역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왜”냐고 묻는 것은 하느님께 책임을 추궁하는 것 같다. 왜 이런 생명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하느님께 묻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욱 다가서는 방법이다. 좋은 말, 좋은 생각으로 하느님께 다가서야 한다는 우리 신앙인의 관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욥은 나쁜 말, 억울한 말, 분노의 말로도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욥기의 머리말에서 욥은 침착했고 냉정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에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서 3장의 욥의 독백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반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욥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았다. 등을 돌려 죽음의 자리, 하느님이 없는 자리를 찾는 게 아니었다. 욥은 살아있고,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다. 욥은 여전히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 속에 살아있다.
참고자료: 시서와 지혜서(구약성경의 이해), 박병규, 바오로딸, 2014, p. 91-94
주석성경(구약), 한국천주교주교회, p. 1378-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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