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 대한 서론
1) 전체주제: 3,1-42,6
욥은 세 친구과 세 차례에 걸쳐 설전을 벌인다. 고통을 중심으로 인과응보가 다뤄진다.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아가 무죄한 이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인과응보가 철저히 의문에 부쳐지면 해명을 찾아 나간다. 결국 욥은 고통의 한 가운데서 고통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믿기에, 하느님께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분을 뵙고 싶어 한다. 사실 욥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자꾸 호출하는 것은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결국 거기에, 곧 하느님 현존에 삶과 희망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운문의 마지막에 위치한 욥의 고백은 그가 답을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답을 들었음직한 부분은 현현하신 주님의 말씀 부분이다. 거기서 욥이 보고들은 것을 독자가 보고 듣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욥기에서 제기하는 한층 근원적인 질문은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욥의 모습에 내포되어 있다. 곧 삶에 깃들어 있고, 언제 어디든지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그래서 인간 삶의 보편 현상인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욥과 세 친구의 대화(3,1-31,40)
엘리후의 담론(32,1-37, 24)
주님의 말씀(38, 1-41, 26)
욥의 마지막 답변(42,1-6)
운문에서 제시되는 욥의 마지막 태도는 산문의 내용과 상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욥기 전체는 적어도 인간 욥의 태도에 대해서 일관된 노선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2) 인과응보에 대한 담론(3,1-31, 40)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패널 토론 식으로 행해진다.
제1차(3,1-11,20)
욥 3,1-26: 엘리파즈 (4,1-5,27)
욥 6,1-7,21: 빌닷 (8,1-22)
욥 9,1-10,22: 초바르 (11,1-20)
제2차(12, 1,-20, 29)
욥 12,1-14,22: 엘리파즈(15,1-35)
욥 16,1-17,16: 빌닷(18,1-21)
욥 19,1-29: 초바르(20,1-29)
제3차(21,1-31, 40)
욥 21, 1-34: 엘리파즈(22, 1-30)
욥 23,1-24, 25: 빌닷(25,1-6)
욥 26, 1-14
욥 27,1-28,28
욥 29,1-31,40
세 친구는 하느님께서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악한이는 벌하신다는 일반적 진리에 의존하여 말한다. 그들이 고통에 대해 펼치는 의견은 철저하게 인과응보의 선상에서 움직인다. 반면에 욥은 자신의 특정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는 체험을 바탕으로 고통이 인과응보의 결과와 부합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으나, 그 역시 인과응보의 사고 체계에 속해 있기에 하느님에게 그 해답을 촉구하며 호소한다. 욥은 결국 고통의 문제를 통해 하느님을 부르며 찾고 있다.
3) 세 친구의 견해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가 3회에 걸쳐 차례로 주고 받는 형식으로 대단히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일관된 맥을 이루고 있다. 즉 욥을 위로하려고 시작한 세 친구의 담론은 충고 일변도로 나가며 공통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의 특징적인 개별 의견을 분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친구들은 인간의 실존을 교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대변자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행위와 결과 사이에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관계가 있음을 확고히 믿는다. 행동과 결과가 상응하지 않으면, 여기서 누가 책임을 질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출된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책임을 돌리면 모든 교훈과 삶의 구조가 무너지기 때문에, 친구들은 욥의 운명을 그의 죄 탓으로 돌린다.
먼저 엘리파즈의 담론(4-5;15;22장)에는 두 가지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나는 무죄한 이는 멸망하는 법이 없고 오직 악한 자만이 파멸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하느님보다 절대로 더 의로울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결백할 수 있으며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다하리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도 믿지 않으시고 하늘도 그분 눈에는 순결하지 못한데...”(15, 14-16). 인간의 올바른 행동은 하느님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느님께 유익할 수 있는가?”(22,2); “자네가 흠 없는 길을 걷는다 하여 그분께 무슨 득이 되겠나?”(22,3). 인간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데 익숙한 엘리파즈는 욥이 너무 많은 악을 행한 까닭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네의 악이 크지 않은가? 자네의 죄악에 끝이 없지 않는가?(22,5).
욥의 항변을 들은 후 엘리파즈의 의견을 인정하며 빌닷이 담론을 이어받는다. 빌닷의 담론(8; 25장)은 엘리파즈의 의견과 거의 동일하다. 그는 하느님의 심판을 묘사하며 이런 심판의 수단들이 악을 제거하고 악의 결과를 박멸할 것이라고 본다. 또한 여인에게서 난 자는 누구든 무죄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려면 하느님께서 공정을 왜곡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정의를 왜곡하시겠냐? 자네 아들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다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그 죄과의 손에 넘기신 것이라네”(8,3-4)하며, 욥의 아들들의 죄를 짚는다. 이로 인해 욥은 정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초바르 역시 악한 자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운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11; 20장; 27, 23-23).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욥을 죄인으로 규정한다. 당연히 욥의 무죄 주장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27, 13-23). 27, 13-23은 욥의 향변이란 맥락에 있으나, 빌닷 혹은 초바르의 말로 이해하여 위치를 옮기기도 한다. 초바르의 세 번째 담론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초바르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용 역시 악인의 운명에 관한 초바르의 관심과 일맥 상통한다.
4) 욥의 견해
욥은 자신이 무죄임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 자신이 겪는 고통의 책임을 돌림으로써 인과응보의 전제를 떠난다. 친구들의 논지에 항복하는 것은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을 거짓으로 증거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행위가 욥에게는 올바른 것으로 보여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느님이 의로우셔야 한다는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는 하느님을 향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반대해서 살 수 있었다. 초능력적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은 고통당하고 회의에 빠진 인간의 유일한 피난처이다.
욥의 탄식은 저주로 시작해서 도전으로 끝을 맺는다. 첫 번째 저주(3장)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부인이고 탄식이다. 고통 앞에선 존재를 말하며 하느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마지막 탄식(29-31장)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에게서 무죄 선언을 받아내려는 욥의 노력을 대변한다. 이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그의 정당성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 혐의를 둘수 밖에 없다. 피조물로서 하느님 앞에 무죄하지 않으나 친구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도리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행위가 하느님께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견해에 접근한다(6,9-10;12;16;19;21;23;26;27장 참조). 악인들의 운명에도 접근하지만 친구들의 견해와는 아주 다르다.
욥은 어떤 설명으로도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설명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무죄한 자와 죄인을 똑같이 파멸시키신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욥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통탄할 만한 잘못을 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욥의 개인적인 적대자가 되신다. 이는 다음구절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담론에서 우리는 욥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고통스럽게 깨달은, 인간의 덕성이 정당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토로하는 소리를 듣는다. 또 인간은 존재 자체로서 도무지 신과 대적할 수 없는데, 하느님께서 그의 결함을 보고 악인으로 여기신다면, 그에게서 죄를 찾고자 하시면 도대체 인간의 노력이나 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호소하는 욥의 소리도 듣는다. 욥은 힘의 불균형 때문에 도무지 이러한 하느님을 대항해 낼 수 없다고 느끼면서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게 된다.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찾는 것이다.
욥의 탄식은 역설로 가득하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감시를 멈추어 달라고 호소하는 동시에 멀리 계신 하느님을 뵙기를 희망한다. 욥은 자신을 위해 변론을 해주실 분이 하늘에 계시다고 한다. 그분과 하느님과 관계는 어찌 되는지? 욥은 하늘에 계셔서 하느님과 마주하고 자신을 위해 변론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신지 치밀하게 추론하지는 않는다. 23장의 탄식에 의하면 그는 변호인을 찾는데, 끝에 가면 하느님을 계속 찾고 있음을 드러낸다. 결국 같은 하느님이 변호인으로 나서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국 하느님께서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신다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욥의 외침은 하느님의 부재에 대한 통렬한 아픔의 탄식으로 드러난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고통에 더하여 하느님의 성품과 그분의 부재에 대한 정신적 고통까지 겪음으로써, 욥의 고통은 극에 달한다.
5) 고엘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19,25)에서 구원자는 누구인가?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말은 ‘고엘’이다. 일반적으로 고엘은 어떤 특정시기에 어떤 사람의 형제, 삼촌, 조카, 혹은 그 밖의 누구이든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사람의 가족 재산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되사는 책임을 지닌 사람을 가리친다(레위 25,25-34; 예레 32,6-16). 그는 친족을 도로 사 종이 되지 않게 하거나(레위 25,47-54),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남편의 후사를 이어주고(룻3,12;4,1-6), 살해된 친척의 피를 복수한다(민수 35,12.19-27); 신명 19,6.11-12; 여호 20,2-5.9; 참조 2사무 14,11).
여기서 욥의 고엘은 누구인가? 이 구절이 16,18-21과 유사한 것을 보면 이곳의 고엘은 ‘증인(에드)’, ‘보증인(사헤드)’, ‘대변인(멜리츠)’과 같은 뜻이다. 이에 대해 모빙켈의 노선을 따르는 하벨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즉 욥이 욥기 전체에서 묘사하는 하느님은 그의 ‘증인’ 혹은 ‘친족’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서 하느님을 구원자로 암시하는 표현들은 요점을 벗어났고, 여기에 묘사된 상황은 제의가 아니라 법정이며 얻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느님을 향해 말을 하며, 하느님을 뵙기를 갈망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데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나, 욥은 바로 하느님을 통해서 그 뜻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엘을 하느님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둠, S.R 드라이버와 G.B. 그레이, R. 도름, H.H. 로올리, 데 빌테 등).
욥이 자신을 대신해서 일어설 것으로 기대하는 고엘은 그가 뵙기를 고대하는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다. 특히 시편과 이사 40-66장에서 하느님은 고난당한 자의 ‘고엘’로 그려진다(시편 78,35; 이사 49,7, 26 등). 욥기에 나타나는 타협 없는 일신론 때문에 하느님과 욥 사이를 매개하는 어떤 친족을 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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