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38, 1-41, 26): 하느님의 담론
Text 안에서
하느님의 폭풍 에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담론은 욥의 처절한 호소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물으신다. 거의 마흔 번이 넘는 물음을 연거푸 욥에게 쏟아내신다. 그런데 이 물음들은 대부분 욥의 고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애당초 욥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의 시험이 욥기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해야 하다(욥기 1-2장).
하느님이 나타나시기 전, 욥이 내뱉은 하느님께 대한 물음들은 하나같이 의인을 자처하는 욥이 내뱉은 하느님께 대한 물음들은 하나같이 의인을 자처하는 욥이 하느님더러 책임지시라는 투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논리와 이해 안에서 하느님의 처사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물음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38장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응답은 이 정당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느님의 물음은 대부분 창조와 관련된 것이다. 땅과 바다, 빛과 어둠, 나아가 셔올까지 언급되는, 그야말로 모든 피조물계와 관련된다. 그런데 하느님이 욥에게 말을 건제시지만 욥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다. 욥이 요구했던 하느님, 자신과 논쟁을 펼쳐달라 외쳤던 하느님이 나타나셨건만 욥음 묵묵부담이다. 하느님은 욥과 논쟁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의 물음은 대결 구도를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욥을 초대한다. 그 관점이란 것은 창조주 하느님이 만들어 좋은 세상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논쟁의 하느님이 아닌 창조주 하느님을 욥이 새롭게 얻어 만나도록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창조에 대한 물음 앞에서 욥은 속수무책이다. 욥의 앎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시간에 제한되었고(38, 4.21), 창조의 공간에 제한되었다(38,16-18). 아침 별들이 환성을 지르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38,7), 욥은 고통에 짓이겨져 하느님께 울분을 토해냈던 것이다. 기쁨과 고통, 환호와 울분이 창조주 하느님과 욥의 세상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런 세상도 있는데 너는 왜 네 생각에만 갇혀 있느냐?’ 라고 따져 물으시듯 하느님은 당신 세상의 또 다른 곳을 계속해서 제시하신다. 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읫고 타오르는 불을 당신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시편 104, 4) 앞에서 욥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일뿐이다.
욥이 지닌 앎의 한계는 곧 능력의 부재를 가리킨다. 도도한 파도를 잠잠케 못하고, 아침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며(38,11-12), 비를 내리지도 못하고(38, 25-27), 구름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고대 셈족 문화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욥의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과 비교도 될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과 감히 논쟁조차 할 수 없는 욥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욥의 능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은 동물에 빗대어 나타나는 하느님의 물음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언급되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의미로 인간의 삶에서 다소 낯선 세상을 살아가는 동물들을 하느님은 끄집어내신다. 암사자, 까마귀, 바위 산양, 들나귀, 들소 등은 욥이 무언가 해볼 수도, 또 그 동물들로부터 무언가 받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는 ‘다른 세상’의 존재들이다. 눈에 띄는 것은 들나귀와 들소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들나귀는 창세 16, 12의 이스마엘 탄생 예고에 등장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 존재가 들나귀로 대변된다. 들소 역시 내 일을 맡길 수 있을 만큼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니다. 고랑을 매고 골짜기를 갈 정도로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 들소다(욥 39, 5-12). 이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를 구속하고 길들이려 하는 것이 어쩌면 욥이 하느님의 뜻을 캐묻고 따지려 했던 모습과 닮았는지 모른다. 욥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자신의 능력 안에서 이해하려 한 무모함을 목도하게 된다.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난 세상에 대해 하느님께 듣는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언급하신 이 모든 피조물계에 욥 역시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욥이 듣고 있는 ‘다른 세상’은 그가 없는 곳이 아니라 그가 있음에도 ‘모르는 곳’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초월적 지혜를 욥에게 드리우고 욥의 말문을 막고자 하신 게 아니라 지상의 피조물계 조차 다 이해하지도, 맏아들이지도 못하는 욥의 지각없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신다(38, 2 참조).
이제 욥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배운다. 하느님 앞에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의미 없는 자(칼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욥은 더 이상 할말이 없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 지혜의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 작아지는 길을 택하는 것, 모르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다른 앎이 있고 다른 지혜가 있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모든 지혜의 근본이 하느님이라는 말은 내가 모른는 다른 부분, 다른 세상이 잇다는 말과 연결된다. 그 다른 부분, 다른 세상도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말이다. 지혜는 내 안에 쌓아두고 나를 꾸미는 무엇이 아니라 너를 알고 세상을 알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관계의 고리다.
욥 40, 6부터 하느님은 본격적으로 욥의 ‘능력’을 문제 삼으신다. 욥이 그토록 자신의 정당함과 의로움을 외쳤기에 악인들은 내쳐보고 그 악인들에게 벌을 내려보라고 다그치신다(40, 9-14).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욥의 친구들이 말한 ‘상선벌’의 개념에 욥 역시 갇혀있었던 것이다. 욥은 정당하고 의롭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느님의 공정과 정당함을 비판하고 하느님의 죄를 물었다(40, 8). 욥은 의인이므로 악함과 그로 인한 징벌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욥은 상선벌악을 자신의 언어로 계속해서 되뇌었던 셈이다.
브헤못과 레비아탄의 존재적 가치는 욥의 무능력을 거듭 강조하는 데 쓰인다. 대개 브헤못을 하마로, 레비아탄을 악어로 이해하는데, 이 둘은 금찍하고 무서운 짐승의 대명사로 여겨졌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재간이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시편에서 짐승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뜻을 알라듣지 못하는 이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다(시편 73, 22). 아둔하나 힘이 센,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존재가 이 두 짐승에 빗대어 표현되었다. 또한 시편에서는 레비아탄의 머리를 깨부수는 이를 하느님으로 드러낸다(74, 14).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그분께 대드는 이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파멸이 있을 뿐이라는 게 시편의 생각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작품’이기에(40, 19)그분을 거역하고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욥기 막바지에 하느님을 통해 강조된다. 하느님의 능력 안에 놓인 하느님의 작품들은 인간인 욥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아니 불가능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욥은 하늘 아래 하느님 것이 아닌 게 없다는 사실(41, 3)을 몰랐기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논리 안에서 이해되고 조절되고 판단되어야 한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브헤못이든 레비아탄이든 하느님만이 조절하고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다(이사 27, 1).
이제 욥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는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능력은 자신의 것을 휠씬 초월하는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께는 그 어떤 계획도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이 고통과 불행일지라도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할 수 밖 에 없다. 그래서 욥에게 하느님은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다. 이해되지 않을 존재를 이해하려 대들었던 지난 시간을 욥은 반성한다.
말씀하시는 이는 오직 하느님이셔야 했다(42, 4). 욥은 하느님의 말씀을 귀로만 들었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42, 5). 그래서 하느님의 물음(38, 3; 40, 7)에 사내답게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한다. 침묵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욥의 응답이 되어버렸다. 눈으로 확인한 하느님은 자신의 몰이해와 무능력을 똑똑히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욥이 듣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인정과 그로 인해 주어질 축복과 행보이었다(29, 18-20).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하느님을 찾았던 것이다. 귀로만 들은 하느님은, 자신의 말만 되뇌며 만들어 놓은 우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본래 욥이 원한 건 하느님을 제대로 보는 것이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19,26)고 욥은 갈망했다. 그런데 하느님을 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모함과 지각없음을 보는 것과 다름 아닌 게 되어버렸다. 하느님의 세상은 욥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질서’를 이루고 그 질서 안에 서로 엮이고 이어져 있다. 욥의 눈에는 무질서하고 무계회적일지라도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욥이 깨달은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악의 세력이고 불의한 것이고, 그래서 상선벌악의 전통적 개염에 어긋날지라도 하느님의 것 아니게 없고, 하느님의 계획 아닌게 없다는 사실을 욥은 뼈져리게 깨닫는다.
그러므로 욥은 회개한다(42, 6). 먼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마아스). 이 말은 자신이 한 말을 모두 철회한다는 뜻이다. ‘참회하다(나함)’라는 말은 ‘스스로 위로하다’라고 번역할 수 도 있다. 자신의 말을 거두고 제대로 만나뵙는 하느님 안에서 이제 위로 받고 편히 쉬겠다는 말이다. 이제 욥은 인간은 본디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지만(창세 18,27), 하느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고통과 불행이 덮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이 모순이 욥에겐 참 하느님을 만난 기쁨이 된다.
참고자료: 시서와 지혜서(구약성경의 이해), 박병규, 바오로딸, 2014, pp. 100-105.
주석성경(구약), 한국천주교주교회, pp. 1459-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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