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17장: 계약과 할례

마리아 아나빔 2010. 9. 23. 21:02

                                                                                     

 

성서나눔 21- 창세 17장:계약과 할례

 

 

 

들어가기 전에

 

   창세기 16,1-16(야훼계 전승)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한다면, 사라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 실현될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적 방도를 제시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을 새롭게 하시고 그 약속을 분명히 하신다. 단순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시키려 했던 사라의 계획은 역효과를 낳으며 그러나 비록 하갈(아랍유목민 하갈 또는 하그르족관 관계됨)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신다.)은 약속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축복을 받는다.

 

 

-Text 안에서 -

 

   메소포타미아 법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종은 자기 여주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갈의 눈에는 자기 여주인이 하찮게 보였다. 하갈과 사라의 갈등은 21장에 나온다.

 

   16/9절: 천사의 존재는 가나안인들은 고등 신의 “천사(사자)”가 사람들에게 그 신의 명을 전하고 수행한다고 믿었다. 성서는 이러한 인격화된 우주적 능력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그들을 참된 하느님께 종속시키고, 사자들을 통해서 당신께 충실한 이들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한다.

 

16/14: 엘-로이- 칠십인역에 따라 “당신께서는 저를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로 옮기기도 한다. 이 “엘 -로이”는 ‘볼 수 있는 하느님’, ‘돌보시는 하느님’ 또는 ‘나를 돌보시는 하느님’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엘”은 본디 가나안인들의 가장 높은 신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도 알려져 있던 신이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이스마엘’ ‘에제키엘’ 등과 같은 사람 이름에도 들어 있다.

그리고 “라하이 로이 우물”은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 ‘내가 본 살아계신 분의 우물’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창세기 17장 1절-27절에서는 하느님은 후손들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시고 할례라는 표지를 내리신다. 내용면에서 볼 때 이 대목은 15장과 16장에서 이미 이야기된 것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이 대목은 제관계 전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라서 할례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관계의 표지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관심을 쏟고 있다.

   중동에서 널리 시행되던 할례는 여기에서 새롭고 명확한 의미를 띠게 된다. 다른 여러 부족들의 경우 할례는 사춘기 의식이었으나, 하느님 백성의 경우 할례는 공동체와의 계약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있으며 따라서 생후 여드레가 된 모든 남자 아이들은 할례를 받는다. 이 의식이 친아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종들에게도 적용됨으로써 그들도 계약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계약의 특권이 아브라함의 직계자손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하느님은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심으로써 그들의 삶 자체에 있어서의 어떤 변화를 시사한다. 야곱이(하느님과 겨루는)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반석)가 된 경우처럼 개명은 하느님의 선택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가 된다.

 

 

Text 안에서

 

   하느님의 분부를 받들고 아버지의 고향 하란을 떠나 순례를 시작한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창세기에서 매우 장황하게 묘사되고 있다.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 계약은 앞으로 야곱과의 계약을 거쳐 시나이 산의 계약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도 노아의 계약에서 이미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축복과 선물과 약속, 그리고 지켜야 할 규범과 계약의 징표가 다 들어 있다. 살펴본 것처럼 축복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주어지고 가난안 땅이 선물로 제시된다. 또 하느님은 그에게 후손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축복과 선물과 약속의 말씀에 이어 하느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 부르신다. 아브람은 서부 셈 족의 이름 아비람과 어근이 같고 “아버지는 존귀하시다” 또는 “아버지는 사랑하신다.”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데 이름 자체의 변화는 사투리 발음의 차이뿐이지만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가 부여된다. 이제 아브람은 단순한 유목민의 족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아버지,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의 아버지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아버지/ 신앙인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근동을 비롯한 동방 사회에서 이름은 인격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또한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이 그 사람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의 본성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래서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의 운명이 바뀜을 뜻한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직책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왕이나 교황이 선출될 때 새로운 이름 주어지곤 한다. 우리 천주교회 신자들이 영세할 때 본명을 받게 되는 것도 주보성인을 모신다는 뜻 이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사라(여제후)로 고쳐 부르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사투리 발음의 차이이지만 사래를 사라로 고쳐 부르게 하심으로써 이제 그녀가 한 족장의 아내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어머니가 되어 그에게서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이 태어날 것임을 선언하신다. 사라는 원래 동부 셈족어로 왕후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지켜야 할 규칙으로 할례의 실시를 요구하신다. 이 할례예식은 몽고 족과 인도- 게르만 족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고대 관습이었다. 가나안 셈 족들과 고대 이집트인들도 위생적인 이유에서 또 혼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관습들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아프리카의 모슬렘 사회에서는 여성에게까지도 이 할례예식을 베풀고 있다.

 

   유배 시절 사제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별로 없었던 이 예식을 하느님과의 계약과 연결시켜 원래 어른이 될 때 하던 이 예식을 생후 팔 일 된 사내아이에게 실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의 생명이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할례는 바빌론 사람들과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외적으로 구분해 주는 표시가 되어 유배 기간 동안 신앙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하느님은 이 계약에서 외적 표시를 세우셨다. 그것이 할례이다. (창세 17,10이하) 할례는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 히브리인 외에도 다수 종족들이 실천하는 관습이었다. 그러나 본시 성인식으로 베풀어지건 관습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실시됨으로 말미암아 이 의식은 아브라함의 혈통, 선민에 입적하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육체에 새겨진 이 표시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자기네를 선택하신 하느님께 영구히 충실을 다하라는 의무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훗날 이 표시만 지니고 다니면 하느님이 가호를 입는다는 허황한 믿음이 퍼지자 대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마음의 할례’를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마음에서 하느님 눈에 들지 않는 것을 잘라내야 한다고 가르쳤다. 육체의 할례만으로는 하느님의 가호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예레 4,4; 9,25)

 

    예언자들이 마음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게 될 내용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기 전에 요구하신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창세 17,1)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걷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동이나 결정에 있어서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음을 뜻한다. 하느님의 이 명령은 영구불변하는 계명이요, 세월이 갈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 하느님 자신이 ‘새 계명’, 만인을 위해 사심없고 무상적인 사랑의 계시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이스라엘의 양심을 교육시킬 것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의 근본 요구이기에 앞서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개입의 명분이 되어왔다. ‘하느님과 함께 걷고 계속적으로 그분과 일치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 원죄로 일그러졌던 그 모상을 원상으로 복구시키고 다시 찾으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또한 하느님은 계약의 징표로서 나이든 부부 사이에 아들을 점지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웃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비웃거나 불신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터져나오 웃음이다. 그는 하느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공손한 태도로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고, 나중에 다시 한 번 하느님으로부터 아들 이사악(원래의 이름은 ‘이사악-엘’ =하느님께서 웃으시기를!/ 하느님께서 호의적이시기를!이 준 형태이다.)을 여종에게서가 아니라 본처 사라에게서 가질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아무런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또 하느님이 떠나신 후 그분이 분부하신 대로 온 집안에 할례예식을 철저하게 실행했던 걸로 보아서 그의 웃음에 불경이나 비웃음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설령 아브라함이 웃으면서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혼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가지겠는가? 라고 한 독백이 일말의 불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사제들이 강조하려는 것은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인간의 태도와 관계없이 심지어 아브라함의 신앙에도 매이지 않고 실행하시리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약속에 충실하신 분(Hesed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두고두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 반복될 것이다. 야훼스트의 문헌인 18장에 보면 하느님의 말씀에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야훼스트가 아브라함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으려 한 데서 나온 기록이다.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의 이름 이사악은 ‘그가 웃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을 배운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유목민 추장, 사막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그의 이름을 바꿔주면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하느님의 선택은 일방적이고, 불리는 자의 조건과 자격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하시지 않는다. 뜻밖에 찾아오시어 약속과 축복을 주시고 계약을 맺자고 하시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응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명하시는 대로 자신을 포함하여 집안의 모든 남자의 포경을 배어 할례를 베푼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계약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인류의 종교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인간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하느님의 벗이 된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79-82.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82-186.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76-81.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6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