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18: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마리아 아나빔 2010. 10. 12. 20:50

 

 

 

 

                                                 성서나눔 22-창세 18: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들어가기 전에

 

 

   창세기 18장 1절-15절에서는 후손들에 대한 약속이 최종적으로 선포된다. 세 사람의 방문자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 하나가 태어나리라고 알린다. 이 대목을 봉독할 때 그 속에 깃든 따뜻함과 유우머를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도록 하며, 또한 일이 하루 중 좋은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유의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송아지를 잡고 빵을 굽는 잔치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손님접대라는 휼륭한 덕행의 귀감으로 드러나고 있다. 독자를 즐겁게 하고자 저자는 계속해서 태어날 아들의 이름에 대해 언어유희를 한다. ‘이사악(Isaac)'이란 웃다, 미소 짓다, 즐거워하다 라는 동사 ’이샥(yishaq)'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창세기 18장 16절-33절 에서는 아브라함이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하느님이 사악한 도시들의 운명을 두고 그와 협의를 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이 대목을 봉독할 때에도 그 속에 깃든 풍부한 아름다움과 아브라함이 야훼께 사용했던 교묘한 동방식 흥정 수법에 대한 묘사를 음미해 볼 수 있다.

 

 

   홍수가 시작되는 창세기 6장 5절-8절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사악함을 보시고 세상을 파멸시키기로 작정하시는데, 그분은 아무런 협의없이 그 같은 결정을 내리신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와 협의를 하시고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그에게 개방해 두고 계신다. 성서저자는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협상을 벌이시는 이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매우 심원한 진리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최초로 성서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여기서 선택된 백성의 특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백성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교묘한 주장을 겉으로 보면 의인이 죄인들과 함께 파멸되어서는 안 된다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있게 읽어 보면 아브라함이 사악한 자들의 파멸을 막아 보려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거의 3천년 전에 이 글을 쓴 저자는 그 때 벌써 극소수의 의인 열 사람만이 있어도 재난을 막아 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몇 세기 후에 야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단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이 도시가 곧 닥칠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예레5, 1) 또 유배지의 예언자에게는 당신의 종이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리신다.(이사 53, 4-50. 이 대목에서 시작되고 있는 그 가르침은 만민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게 될 것이다.

 

 

   엄숙히 계약을 맺은 뒤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가 더욱 친근해졌음은 뒤따라오는 사건들로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당신의 친구에게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이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부족한 것으로 극진한 손님 대접을 받으셨고, 차려놓은 음식을 드셨다.(18장) 성서에서 하느님이 사람들과 한 상에 않으신 유일한 기록이다. 이 사건은 육화하신 하느님께서(예수 그리스도) 인간들에게 보이실 친밀과 교분을 예시하고 있다. 이 친밀한 분위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언약의 실현을 다짐하셨다. 이듬해 봄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고대하던 아들을 낳아 주리라고 보증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놀라움은 사라가 너무 늙어 아기를 낳을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사실로써 강조되고 있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당신의 의중을 친구 아브라함에게 밝히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위해 전구하는 전대미문의 장면이 펼쳐진다. 하느님과 친분을 누리는 입장 때문에 그 전구가 정당화되고도 남는 것이다. 또 그 기도는 성서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도이기도 하다(창세 18, 16이하)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18,27)임을 알지만, 두 대화자들은 거의 동등해 보인다. 집안과 거레를 떠나게 한 그 부르심은 자기 하느님과의 단독 대화로 그를 고립시키지 않았고, 이웃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결별이, 그때까지 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웃 사람들에 대해서 연대의식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재하는 다른 모든 ‘중재자들’과는 달리 자기 거레가 아닌 이방인들을 위해서 전구한 인물은 아브라함뿐이다.

 

 

 

 

 

Text 안에서

 

 

- 이 내용은 소돔과 고모라의 징벌을 앞에 두고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간 유명한 대화이다. 이야기의 배경에는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당한 후 바빌론에 끌려가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되었을 때 제기되었던 문제가 들어 있다.

 

 

 

-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이 이야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자기 민족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수난을 겪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나라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믿어도 좋은지, 하느님은 정의롭게 이 일을 처리하셨는지, 당대의 사람들과 함께 의문을 제기해 본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라는 아브라함의 말에 이 의문이 반영되어 있다.(성서적 의미의 ‘알다’는 인격체 대 인격체 사이의 앎으로서 선택과 사랑과 우정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 구원과 멸망의 연대성은 신.구약성서 전편에 걸쳐 드러나고 있다. 의인 한 사람이 전체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반면 죄인 한 사람이 전체의 멸망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죄인과 의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장이나 왕처럼 백성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간청을 통하여 저자가 하느님의 정의(정의와 공정은 후에 다윗 왕조가 왕국의 기초로 삼아야 하는 기본적인 두 덕목이기도 하다)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전체가 멸망하게 될 때 그 전체 속에서 평민 출신의 의인들이 도매금으로 처벌당해도 좋은가 하는 것이다. 또 유다 왕국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졌을 때 그 처벌에 상응할 만한 악행들이 과연 유다 안에서 자행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여 이사악의 탄생 소식을 알려 주었던 세 사람이 떠나겠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느라고 소돔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까지 따라 나온다. 세 사람들 중에 한 분이신 주님께서 혼자서 말씀하신다.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어찌 숨기랴?” 하느님의 이 독백 속에는 고대 근동 지방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신의 종이나 왕의 종은 친구로 취급되어 주인의 계획을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충실한 종이요 친구로 삼으셨기에(하느님의 친구(벗)-요한 복음15,5/ 하느님으로 부터‘올바로 인정받은 첫 사람’‘믿는 사람들의 조상’) 계획을 알려 주시기로 작정하신다. 앞에서 이미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숱한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위대한 민족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민족의 원조상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옮은 일만을 하신다는 사실, 곧 죄인들만을 벌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하느님의 계획이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직접 확인 한 후, 사실임이 드러났을 때 그들을 벌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아우성이란 그 도시의 주민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거슬러 하느님의 정의에 호소하는 부르짖음을 뜻한다. 아벨의 피도 하느님의 정의에 호소하면서 땅에서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죄악상을 확인하러 소돔 성에 내려가고 하느님만 아브라함과 함께 남는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 중재자로 나선다. 아브라함의 간청하는 모습 속에서 한 집단의 멸망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의인의 고충과 고운 심성을 엿볼 수 있다. 겸손과 신뢰에 가득 찬 그의 태도, 그러면서도 자신의 뜻을 솔직하게 직선적으로 전달하는 그의 탄원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아무런 불쾌감 없이 끝까지 대화를 끌어 갈 수 있도록 해준다.

 

 

-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쓸어버리시겠습니까?”라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오십 명을 보아서라도 쓸어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하신다. 의인 오십 명 정도야 있겠지 하는 아브라함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당황한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라고 한껏 낮춘 후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여쭌다. 하느님이 오십 명 선에서 몇 사람 모자란다고 멸망시키시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이 질문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생각은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렵니까? 라는 표현에 잘 나타난다. 하느님은 ”사십 오명만 있어도 괜찮다“고 하신다. 모자라는 숫자를 좀 작게 잡았나해서 아브라함은 사십 명으로 낮추어 본다. 하느님은 사십 명도 좋다고 하신다. 이번에는 아예 열 명을 더 낮추어 볼까” 그런데 하느님께서 화를 내시면 어쩌지? 그래서 아브라함은 미리 선수를 친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삽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실망하지만 그래도 내친 김에 더 달라 붙어 죄송하다고 사과를 청하고 노여워하시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이십 명, 열 명에까지 내려간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라는 말씀을 끝으로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헤어진다. 열 명은 단체교섭을 이룰 수 있는 최소한 단위이다. 그 아래로는 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열명이라도! 두 세 가정이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숫자인데 의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 둘이나 셋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 이 이야기를 통하여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패망에 있어서 하느님은 공평하게 정의를 실천하셨다고 대답하고 있다. 왕과 예언자 등 백성의 지도급 인사들의 부패는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의인들의 숫자가 극소수였다는 것(남은 자들에 대한 주제는 이사 1,9 참조)이다. 하느님은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라도 있는 한 인내해 주신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간청하는 의인들의 기도를 끝까지 들어 주신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83-86.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90-193.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83-85.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6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