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1장(1): 21,1-8: 사라가 낳아 준 아들을 이사악이라고 불렀다.
성서나눔24- 창세 21장: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들어가면서
창세기 20장 1절-18절에서 아브라함은 또다시 낯선 땅에 가 있게 된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계략을 쓴다. 이 대목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12장 10절-20절까지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는 엘로힘계 전승에서 유래되고 있으며 보다 발전된 도덕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대목은 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지적해 주기도 한다.
- 이 장에서 비로소 엘로힘 전승은 정리된 하나의 기사가 되었다. 주제는 12장 10-20절, 26장 6-11절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러나 12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1)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실은 더욱 크고 직접적이시다.
2) 사라는 보상금을 받는다.
3) 아브라함은 예언자 혹은 하느님의 벗으로 중개할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되며, 추방되지 않고 머물러 살라는 권고를 받는다. 18장 12절에서 사라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이렇게 늙었고”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이 기사는 연대순으로 말하자면, 18장보다 앞선 것이다.
- 그랄: 브엘세바의 서쪽 혹은 북서쪽 방향에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처음 간 땅의 북쪽
- 아비멜렉은 아직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의 태를 닫으셨던 것처럼 아비멜렉에게 신체적 결합을 주시어, 이 일을 방지하였음을 뜻한다.
- 이 곳에는 하느님 두려운 줄: 고대의 법은 외국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이나 그런 관습이 전혀 없었으며, 그 지방 종교에 기초를 둔 도덕이 이를 대신하였고, 그것이 유일한 보증이었다.
-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른 형제간의 결혼은 뒤의 레위기 20장 17절의 규정에 따라 엄격히 금하였으나 고대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집트의 파라오의 왕실에서는 이런 근친결혼이 관례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사무 하 13장 13절)
-아브라함의 아내... 태를 닫으셨던 것이다(18절): 아비멜렉의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고 여인들이 받은 재난을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1장 9절- 21절에서 이스마엘은 비록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축복을 받는다.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16장 1절-16절의 반복으로, 동일한 사건의 엘로힘계 전승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가지는 다정한 아버지로서 인물됨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스마엘이 비록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 대목은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에 대한 깊은 정을 드러내고 있다.
창세기 21장 22절-34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이 땅 브엘세바에 도착한다. 그는 점차 이웃에게 명망과 존경을 얻어 왕이 그를 동등한 신분으로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예모있고 점잖은 협정을 맺는 평화 애호가로 제시된다.
성서저자는 약속들과 그 약속들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적인 시도들을 장황하게 기술한 다음에 곧 바로 약속의 아들, 이사악의 탄생으로 이 약속들이 완성되었음을 기술하였다.(창세 21,1-8). 그는 독자들에게 남겨 두었다. 그러나 실상 저자는 이제 창세기 22장 1절-24절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받게 되는 최대의 도전을 기술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있는 재능 전부를 쏟아 붓고 있는데, 그 결과 이 대목은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것, 문학작품의 걸작이 된다.
이 부분은 매우 부드럽고 정교하며 느린 동작으로 진행되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여기에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 있으며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그의 무조건적 순명도 드러나고 있다.
Text 안에서
창세 21,1-8: 사라가 낳아 준 아들을 이사악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이사악의 탄생과 하갈 및 이스마엘의 추방 이야기에서 전반부는
사라와 이사악에, 후반부는 하갈과 이스마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에 나타난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이 늙고 아이 없는 부부에게 상속자가 될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다. 손이 없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처지는 “많이 낳고 번성하여 온 땅을 채우라”는 창조 때의 하느님이 명령과 창세기 1장-11장에 보고된 인류의 신속한 번성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라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 이 대목은 이사악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충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사악이라는 이름과 할례의 거행은 이 아이의 탄생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과 연결된다. 이사악의 탄생이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이 사건이 한 집안의 경사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젖을 떼었을 때, 곧 태어난 지 삼 년이 되었을 때 통상적으로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푼다. 이사악이 유아기의 고비를 넘기고 났을 때 사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 아이와 직결된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강인하게 싸운다. 이스마엘은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8절-21절의 강인하게 싸운다. 이스마엘은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8절-21절의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이야기는 1절-7절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 세부적으로 이 대목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신다. 어떤 장에도 하느님의 약속이행을 가로막을 수 없다. 아브라함 편에서의 물리적인 장애를 강조하기 위하여 저자는 ‘늙은 아브라함’ ‘백살이 되던 해’ ‘노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느님께서 아기를 점지해 주시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브라함도 사라도 즉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확하게 당신이 정한 때에 그들에게 아기를 탄생 시켜 주셨다. 노령에 얻은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약의 징표이다.
- 한편 아브라함 편에서도 지켜야 할 규범을 이행한다. 아들이 태어난 지 팔일만에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어 준다. 아기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예식이다. 이 할례는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 보여 드리는 계약의 징표가 된다. 그것은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에 세운 그분의 계약으로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다(창세 17,9-10).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얻게 된 것은 백살이 되던 해였다. 아브라함은 75년 동안을 우르와 하란에서 살았고, 25년을 아이를 기다렸으며 이사악이 탄생한 후 75년 동안을 가나안에서 살았다
- 노부부는 하느님께서 지시한 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 이 이름은 사라에 의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웃음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의 임신을 알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보였던 웃음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 때의 웃음은 임신이 불가능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자조의 웃음이었지만 지금의 웃음은 한 아기의 탄생 앞에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행복한 웃음이다.
- 이사악의 탄생을 사라로서는 불임녀의 수치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돌계집이라고 표현되는 이 불임녀의 위치는 가정 안에서 불안하고 불행했다.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여자는 남존여비와 일부다처가 성행했던 고대 사회에서 온간 불이익을 당하게 마련이었다. 우리나라의 옛 풍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소실을 통하여 아들을 가지도록 권하는 것이 상례였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사랑도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에집트에서 온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소실로 들여보내 아들을 낳아 주도록 조처한다. 임신을 하게 된 하갈은 거만해져 자기 주인을 업신여긴다. 그래서 서러움을 참지 못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따지고 하갈을 마음대로 다룰 허락을 받아 내게 된다.
- 고대 사회의 남존여비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생리학적으로 잘못된 개념은 아들이란 어머니를 통하여 아버지가 낳는다는 생각이다. 위의 성서 말씀에서도 여러 군데 이 생각을 반영하는 표현들이 눈에 뛴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얻은 것은 백살이 되던 해였고, 사라는 이 사실을 “그 노령에 아들을 얻으셨구나”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 아기를 낳아 줌으로써 사라는 안주인으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갖게 된다. 그 아기를 통하여 남편 가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 주게 되었고 남편의 정당한 상속자가 된 아들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이로써 가정이 완전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아이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도, 전쟁의 한복판에 시달리는 중이라도 생명의 탄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 마음 가운데 불러일으키게 한다.
- 이사악이 자라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다. 고대 셈 족의 육아관습으로는 아기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나면 젖을 떼고 큰 잔치를 벌였다. 유아 사망률이 놓았던 고대 사회에서 무사히 어려운 시기를 넘긴 것에 대한 축하연이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일잔치나 돌잔치도 이와 똑같은 취지에서 생겨난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오늘 날고 아라비아에서 이러한 관습이 있다.
어린이의 생명은 우리의 삶을 순화시켜 준다. 그러므로 아이의 탄생이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버려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든가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이 올바로 고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91-102.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89-95.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49-25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