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나눔 20 -창세 15: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다.
들어가기 전에
창세기 13장-14장에 대하여 짤막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3장에서(J문헌), 아브라함과 롯 즉 두 사람 가운데서 손위인 아브라함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권한이 있었는데 그는 그 권한을 롯에게 넘겨주었고, 롯은 이기적으로 가장 좋은 몫을 취한다. 아브라함은 비단 신앙의 소유자일뿐 아니라 넓은 아량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량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땅을 주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에 토대(마태 5,5 참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롯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10절을 15절과 비교해 보면 롯이 땅을 ‘선택’ 했으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리라’는 것을 성서저자가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창세기 14장 1절-24절에서 아브라함은 롯을 구한다. 즉 그는 롯에게 ‘축복’이 되지만 또한 그 자신도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네 사람의 왕에 관한 이 색다른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롯을 지켜 주는 전사로 그리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도 카인과 다르다. 카인은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여기서는 손위 사람이 손아래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왕이요 사제인 멜기세텍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예루살렘(미래의 성전 자리)이 왕으로서, 레위 지파의 사제직이 정립되기 이전부터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그리고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자로서, 이 신비로운 인물 멜기세덱은 후대의 독자들을 메료시켰다.(시편 110).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모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히브 7장) 이 사건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보고 있다. 멜기세덱은 로마 미사전문(성찬기도 제1양식)에도 언급되고 있다.
*멜기세덱에 대하여
멜기세덱은 고대 근동의 다른 군주들처럼 임금이면서 동시에 사제였다. 예루살렘의 또 다른 가나안 출신 임금도 이와 매우 비슷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곧 여호 10,1에 나오는 아도니세덱이다. 주권과 정의 또는 번영을 시사하는 이름의 멜기세덱은 시편 110에 인용되고 신약성서에서는 메시아의 예형으로 여겨진다.(히브 7 참조). 멜기세덱은 위 본문에서 사제로 등장한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고, 아브라함에게 복을 기원하며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는다. 이것들은 전례행위들이다. 희생제물과 관련된 포도주에 대해서는 출애 29, 40; 민수 15, 1-12, 십일조에 대해서는 창세 28,22참조). 멜기세덱은 “엘 엘룐”의 사제인데, “엘 엘룐”은 다윗이 점령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여겨지며, 성서 저자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이시다. 교부들은 전통적으로 멜기세덱의 행동에서 성찬례의 예형을 보았다.
Text 안에서
창세기 15장 1절-21절에서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나,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고 약속을 분명히 하신다. 이장은 구성상 까다로운 전개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야훼계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동시에 엘로힘계 전승이 시작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다른이들은 이미 선포된 바 있는 자손과(12,2 참조) 땅의 약속(13, 14-17 참조) 그리고 계약 등 여러 주제들이 혼합된 이 단락의 통일성을 옹호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에워싼 문제에 인간적인 해결책을 제기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기 종들 중 하나를 법적 상속자로 정식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밝혀 주시지만 완전하게 밝혀 주시지는 않으신다. 즉 약속의 상속자는 양자가 아닌 아브라함 자신의 친아들이 되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이 약속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실현될지 여전히 알 길이 없긴 하지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새로워진 믿음의 응답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눈에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뢰, 오직 이 신뢰뿐이다.
계약을 맺는 이상한 의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온전히 맡기면서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하느님께서 “만일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짐승들처럼 두 동강이 나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다.
저자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하느님의 이 약속들이 실현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리게 되겠지만 마침내는 출애굽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사건 전체가 아브라함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다. 그토록 신비로우신 하느님의 활동을 인간으로서는 직접 목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창세 2,21에 나오는 아담의 잠과 비교해 보라)
아브라함은 받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종들과 가축떼를 거느리고 남서쪽으로 길을 떠나 가나안(팔레스티나의 옛 이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세 12,7)고 하시는 음성을 다시 듣는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아내는 나이도 많은데다가 본시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었다. 아브라함 집안은 유목민이었고 자기의 땅 한 조각 없이 여러 해를 두고 팔레스티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심지어는 이집트까지 흘러들어가 약속한 이야기의 진전 없이 얼마 동안 세월을 보낸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활동하실 때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것을 맨 처음으로 체험한 인물이었다. 그가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은 긴 세월에 걸친 끈기와 인내라는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 시련은 우리의 의도적인 선의, 용감한 행동의 본의가 무엇인지 드러내 준다.
그의 믿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온갖 시련을 극복하자 하느님이 새로이 개입하신다. 당신의 언약을 갱신하시는데 이번에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무를 지시게 되는 계약의 형식을 띤다. 이 계약은 봉헌되고 나누어진 우정의 장엄한 비준이다.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과 아브라함의 신앙을 토대로 계약이 맺어지고 하느님은 이 계약을 상정하시는 당사자가 된다.
비록 짧지만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한 전승이 중요한 그만큼, 계약에 대한 전승은 더욱 비중이 컸다. 창세 15장과 17장이 계약에 할당된 것으로 가히 그 비중을 알 수 있다.
15장의 계약은 아브라함 당대에 계약을 맺던 의식을 그대로 따랐다. 아브라함은 짐승들을 잡아 반으로 쪼개어 쪼갠 것을 짝을 맞추고 마주 놓은 다음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신비경에 빠져 들어가 하느님이 현존을 뵙는다. 그 어른이 활활 타는 횃불의 상징을 하시고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시는 것이었다. 죽인 희생제물의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이 계약 의식이었다.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반으로 쪼갠 짐승 같은 운명이 닥치리라는 표시였다. 여기서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은 출애 3,2의 타오르는 덤불처럼, 하느님의 현존의 상징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화덕을 흉조로, 횃불을 길조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은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활활 타는 횃불만 그 사이로 지나갔다는 점이다. 이 뜻은 명백하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내리신 만큼 하느님만 계약 이행의 책임을 지신다. 다시 말하면 그 의무가 일방적이고 무상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의무에 충실하실 것이고, 상대방에 전혀 구애되지 않고 언약하신 바를 실현하실 것이다.
고대근동에서, 종주국과 속국의 임금 사이의 동맹은 통상 종주국 임금의 약속과, (때로는 종주국 임금에 대하여 불충할 경우 벌을 받겠다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다짐하는) 속국 임금의 맹세, 그리고 당사자들이 함께하는 식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창세 15장의 일화에서는, 속국의 임금이 불충할 경우 내려지는 벌을 상징하는 동물들의 희생으로써(9) 저주를 시사한다.(예레 34,18-19). 또한 아브라함의 상대는 여기서 하느님 자신으로서, 그분 친히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통해서 계약을 맺으신다. 이 이야기는 동시에, 주님께서 계약을 주도하시고 이 계약의 장래가 그분에게 달렸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계약은 ‘은총의 서열’을 세우는 것이다. 계약 쌍방 가운데 한편이 완전히 무자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고하고 취소할 수 없는 서열’을 이룬다. 그 계약이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성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성실이 하느님의 성실을 결코 말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이 계약을 위반하여 그 혜택을 못 받을 수가 있겠지만 계약 자체를 말소시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느님의 계약 이행의 의무에다 호소할 수는 있겠고, 자신의 불성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올 수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자비를 하소연할 때마다 아브라함을 내세우고,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내세운다.(출애 32,13; 신명 9,27; 느헤 9,7)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신뢰심을 북돋우신다.(이사 29.22;51.1-3)
계약에 앞서서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을 갱신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신앙고백을 행하였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창세 15,6) 2천 년이 지난 후 사도 바오로는 구세사의 경륜에 있어서 창세 15,6이 갖는 근본의 의를 다시 밝히고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양식은 아브라함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바뀐 것이 없음을 강조하였다.(로마 4참조) ‘구원을 베푸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주도권이며, 인간은 신앙의 행위로는 순응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신앙만이 아브라함을 하느님 대전에 ‘의인’으로 만들었고,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에 놓이게 만들었으며, 그의 신앙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갸륵하게 여기시었다.
성서에 ‘믿는다’는 말이 최조로 나오는 곳이 창세 15,6이다. 그 믿음은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추상적인 진리를 대상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행하시리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신앙은 진실과 충실/ 성실 그리고 불변성도 뜻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또 다른 전승 안에서는 순종으로도 입증된다.(15,22)
※ 참고문헌: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86-18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65-6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6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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