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11, 1-9: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마리아 아나빔 2010. 8. 13. 09:11

                                                                      

    

 

                                      성서나눔17 -창세 11, 1-9: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들어가면서

 

 

    창세 11장(바벨탑 이야기)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민족들이 행한 시도를 우리에게 들려 준다.(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양편에 낀 기름진 땅으로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시도는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건설하고 전 세계에서 유명한 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 권력과 명성의 상징으로 거대한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 거창한 계획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경륜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 백성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놓으셨다. 거례들이 더 이상 서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갑자기 한순간에 여러 나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매우 빨리 사람들이 서로 불화하고 의견이 엇갈려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되고 따로 떨어져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당신의 계획을 세워주신다. 그분은 한 백성을 일으키시어 지상에서 진정 위대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하셨다. 이 백성은 전 인류를 대표하여 하느님의 계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음 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다. 그때부터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영적이면서도 볼 수 있는 건물의 초석으로 삼으신다. 건물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고, 후일에는 메시아를 모신 ‘참 이스라엘’을 가리키게 된다.

 

 

Text 안에서

 

- 바벨탑 이야기의 저자는 솔로몬 궁전의 서기관들인 야훼스트인데 인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온 땅 위에 퍼지고 다양한 민족을 이루게 된 사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했던 이들의 작품으로 족보에 관심이 많았던 사제들과 상반된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 이야기의 저자가 입수한 전승은 인류의 분산과 언어의 혼란을 홍수와 연결시켜 설명하려 했던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들이었다. 창세기 10장 노아 이후의 족보 마지막에 덧붙여진 “그들에게서 부족들이 세상에 갈라져 나간 것은 홍수가 있은 뒤의 일이었다”는 사제들의 해설에 이미 홍수와 인류분산 현상이 연결되어 있다.

 

 

- 저자는 이 전승에 메소포다미아 도시 중앙에 세워졌던 지구라트들, 특히 고대 바빌론 도시의 웅장한 지구라트를 끌어들인다. 여기서 지구라트란 구운 벽돌에 역청이나 회를 발라 쌓아올림 사각추 구조의 층계식 탑으로서 그 꼭대기에 신전과 제단이 있는 건축물을 말한다.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들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등장한다. 이야기에 나오는 탑은 바빌론의 마르둑 신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 이야기의 저자는 탑의 주제를 끌어들여 언어와 인종의 분산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려 했던 사람들의 오만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는 말은

여러 부족과 민족이 본래 한 줄기였다는 창세기 저자의 신학관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쪽에서 왔다는 말은 에덴이 동쪽에 있었다는 창세기 2장의 표현처럼 미지의 어떤 곳을 의미하고 시날이라는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들은 아마도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고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옮긴 것 같다. 시날에 도착한 이들은 아예 그곳에서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다른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한다.

 

- 시날에 도착한 사람들은 벽돌에 아스팔트(바빌론에는 돌이 귀하고 아스팔트가 풍부했다)를 발라 도시를 세우고 탑을 쌓기로 한다. 실제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벽돌에 글을 써서 후대에 전달했던 당대 최고의 문명인들이었고 그들의 벽돌 건축물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일부가 보존될 정도로 튼튼한 것이었다.

 

-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의 협력자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일이 잘못일 리 없다. 그런데도 창세기의 저자는 시날 지방의 사람들을 단죄한다. 바빌론이나 수메르의 도시들에 세워진 거대한 지구라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열등의식도 작용하겠지만 더 깊은 이유가 있다.

 

- 이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듣기 위하여 우리는 지구라트를 건설한 이 사람들의 결정사항을 올바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앞에서 밝힌 대로 이 탑의 배경은 바빌론의 마르둑 신전(바빌론인들의 최고신은 아누로서, 그는 가장 높은 하늘에 있다고 여겨졌다)인 것으로 보이는데 창세기의 저자는 이 탑에 종교적인 의미는 전혀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저자는 4절에서 탑을 쌓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사람들의 말에서 창세기 저자는 이들이 자신의 분수와 한계를 망각하고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높은 곳은 하느님의 불가침적인 영역을 가리키고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는 표현은 명성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간직시키자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종교적 제국주의로써 인류의 통일성을 보장 또는 성취하려는 인간의 유혹을 표현한 것) 그런데 바빌론의 지구라트의 경우처럼 탑을 쌓는 목적이 제사를 바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는 이 이야기에서 탑의 종교적 기능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탑의 건축을 단지 신의 영역인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오만한 시도로만 소개하고 있다.

 

- 즉 사람들은 아무런 문의도 없이 오만하게 탑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인공적인 재로- 벽돌과 역청-를 사용한다. 그들이 이런 계획을 한 목적은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느님 없이 일치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없이 단결한 그와 같은 백성은 우리 시대의 나찌즘의 침략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의 이런 도전을 용서하시지 않는다. 인간은 기껏해야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닌가? 자신의 분수와 한계를 망각하고 하느님의 영역인 하늘에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실 리가 없다. 그것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하느님은 우선 인간이 말이 같아서 서로 협동과 단결을 이루어 당신의 권위에 도전해 오는 것을 아시고 사람들의 오만을 꺾기 위해 언어를 뒤섞어 놓는 일부터 해야겠다고 혼잣말을 하신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라는 하느님의 독백은 인간의 어떤 행동을 결말까지 내다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의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독백은 계속된다.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문명의 발돋움을 그 노란 싹부터 꺾어 버리겠다는 심술궂은 결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본뜻은 즉시 땅에 내려가 인간이 더 이상 헛수고하지 않도록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느끼도록 해줌으로써 창조 때에 세워 놓으신 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인간의 이 모든 헛된 노력이 하느님께는 무의미해 보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고 사람들을 세상으로 흩어 버리신다. 사람들이 하느님 없이 단결하는 것보다 분열되는 편이 나은 것이다.

 

- 하느님은 당신이 생각하신 대로 사람들의 언어를 모조리 뒤섞어 놓아 그들을 온 땅에 흩어지게 하셨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때문에 세우다 만 탑이 있던 도시를 바벨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바벨은 바빌론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바빌론은 ‘신(하늘)의 문’이라는 뜻의 바빌리라고도 불리우는데 바벨과 바빌리는 어근이 같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바벨이라는 이름을 두고 말장난을 하고 있다. 바벨은 ‘뒤섞는다, 혼란시키다’라는 발랄(ballal)과 발음이 비슷하다. 사도 2장에 따르면 이 분열이 성령의 강림으로 극복된다. 성서에서 바벨은 여러 번 등장하는데 하느님을 저버린 사회를 상징한다. 박해의 온상(다니 3장), 쾌락과 죄악과 미신이 만연한 곳(이사 47,8-13), 사치와 향락으로 멸망을 자초하는 도시(묵시 17-18장)인 것이다.

 

- 바벨탑의 이야기는 원조들의 역사에서 하느님 없이 서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결국 분열과 혼란으로 치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도전하기 위해 단결하고 협동으로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려 아무리 애써도 하느님의 작은 간섭 하나에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확고히 다지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좌지우지하기 위해 함께 무리를 이루어 세력을 과시하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할 때 무가치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거슬러 죄악을 저지르는 꼴이 되고 만다. 현대의 선진국들이 지상의 평화는 제쳐놓고 파괴적인 핵무기 제조나 우주정복에 열을 올리는 것도 바벨탑 건립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전의 이야기들에서는 반드시 자비의 표지가 소개되었다(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고, 카인에게 신변 보호를 위한 표를 찍어 주시며, 라멕 이후에는 우리에게 참된 예배를 일깨워주시고, 노아를 홍수에서 구해 주신다.) 그러나 이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뚜렷한 자비의 표지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저자는 민족들이 흩어져 제대로 통교도 못하고 따라서 서로 분열된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 세계와 모든 민족들에게 눈을 돌린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민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분이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실 것인가? -- 이것은 신약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실현될 것이다.

 

- 한마디로 아야기의 저자는 원래의 신화에서는 홍수와 연결된 인종과 언어의 분산 현상을 바빌론의 지구라트와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가운데 지구라트이 종교적 요소를 배제시키면서 하늘 높이 치솟은 이 신전을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불손함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분수와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던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 방황하게 하셨듯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하느님의 영역에 도전하려 했던 사람들을 언어의 혼란을 초래시켜 온 땅으로 흩어지게 하신다.

 

 

나오면서

 

성서저자는 죄의 발전상을 아래의 내용에서 표현된 대로 단계적으로 추적해 왔다.

-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

- 남자와 여자의 관계

- 형제들 사이의 관계

- 인간과 사회 간의 관계

- 조상의 신성을 주장하는 백성의 오만

    이제 작가는 죄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하여 죄를 민족들 간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대로 다룬다.

먼저 그는 수가 불어나서 땅을 가득 채운 민족들을 열거한다(창세 10,1-32). 그들은 무질서해지고 언어가 달라 서로 통교를 하지 못하며 상대방과 싸움을 벌인다(이는 우리에게도 그렇듯이 성서저자에게도 분명히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이 같은 현실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렌즈 하나를 마련하는데, 바로 바벨탑 이야기가 그것이다.즉 현실적 상황을 하나의 표상 안에 집어넣어 설명해 보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시대에는 바빌론(시날)을 들먹인다는 자체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에 어떤 특정한 표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바빌론은 당시의 세계를 수중에 넣었던 대제국이었다. 바빌론은 인상적인 건축, 특히 지구랏(Ziggurat, 탑)으로 유명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71-74 .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69.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63-65.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4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