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 19- 창세 12장: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부르시다.
들어가기 전에
태고사는 희망 없는 상태에서 마무리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세상 모든 민족들이 분열되고 흩어진 모습뿐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성서저자는 하느님이 어떻게 한 인간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혼란해진 세계, 우리의 세계에 있어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이루어져야했던 바를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신다. 아브라함은 첫 인간에게 요구된 것보다 더 가혹한 명령에 순종하도록 요구받는데, 아담과 달리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복종한다. 마땅이 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카인과 달리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보살피고 지켜 주고 생명을 구해주었다. 라멕은 자기에게 모욕을 가한 그들에 대해 무분별한 보복을 꽤했지만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전부 차지하고 가장 나쁜 땅만을 남겨 놓았던 조카 롯의 생명을 구해 냈을 뿐 아니라 죄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중재까지 하였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시작이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성공적인 출발점이 된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일들이 그에게서 풀려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관계되는 성서구절(창세 12-23장)을 봉독하다 보면 어떤 이야기들은 두 차례씩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사라가 에집트에서 겪는 사건(12, 10-20)은 아비멜렉과의 사건(20, 1-18)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면 ‘이중기록들’이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펴져서 한 집단만이 아닌 여러 집단의 하느님 백성에 의해 수대로 전수되게 되었다.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같은 이야기가 수천 번 되풀이 되었는데, 구전하는 무리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이 마지막에는 약간씩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집단들(J.E.P)에 의해 전수되어 오다가 집대성되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편집자들은 이런 자료들을 모아 최종적인 창세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생애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가 한 가지 이상 전수되어 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겨 온 원전, 또는 전승을 무시하여 버리기보다는 그것들을 다 보존하여 이야기 속에 짜넣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중 기록들’에 대한 설명인데, 우리가 오늘날 아록 있는 것으로는 가장 적합한 설명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할애된 장들 전편에 흐르는 주요 주제 몇 가지를 뽑아내게 될 것이다. 성서저자들은 아브라함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하느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로 결합시켜 놓았다. 하느님은 땅과 무수한 자손과 축복들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약속들을 믿었다. 그러나 그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점차적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워가고, 하느님 편에서도 점차적으로 당신의 약속들을 분명하게 밝혀 나가신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순종하고(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에게 봉사하는 인간의 귀감을 부상한다. 성서 저자들은 또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주변에 초점을 맞추는 ‘부수적 줄거리’를 통하여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역을 발전시켜 가기도 한다. 이야기가 매우 훌륭하게 짜여있어서 흥미를 계속 유지시키는데, 가장 큰 약속(후손)의 완성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유도되어 있다.
-신앙의 모험-
아브라함이 생애에는 ‘강력한 때’를 나타내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소명을 받음, 하느님께서 그와 계약을 체결하심, 기적적으로 아들을 얻음이 그것이다. 이 세 사건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체험을 하고 그 어른의 인격적 위대하심과 그분의 생명의 공동체적이라 부를 만한 차원을 실현한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 하란(메소포타미아의 북서부로 현재의 터키와 시리아 국경지대로 월신이 숭배되었다)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곳은 부친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우르(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큰 성읍)에서 이주해 온 곳이다.(창세 11, 31) 그들은 주변의 민족들처럼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고’ 우상숭배와 다신론에 빠져 있었다. 이 사실은 “옛적에 너희 조상들은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여호 24,2) 라고 여호수아의 입을 빌려 하느님 자신의 역사적 존재 자체가 달려 있는 출발점이 하느님의 주도권과 전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창세기 12. 1-2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어려운 일을 명하고 아울러 땅과 축복과 후손들을 그에게 약속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들을 믿고 의심 없이 그분께 순종한다. 성서저자는 이 대목을 바벨탑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이기도 하다. 바벨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우리 ... 하자’가 하느님의 ‘나는 ... 하리라’로 바뀐다. 바벨에서의 ‘우리 이름을 날리자’가 하느님의 ‘나는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로 변한다.
신관이 몹시 일그러져 있는 그 세상에 한 인간에게 한마디 말씀이 내렸고, 이 말씀이 그의 내면생활과 외부 생활을 완전히 뒤바꾼다. 알려지지 않는 지존한 어떤 분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개입하신 것이다. 그 어른이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심을,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감지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시
고 당신과 수천 년 단절 되었던 대화를 엮어가기 위해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소아시아의 구석진 땅에 살던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굳이 선택받았는지를 설명하려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인류의 태고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에 대해 안배를 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다소 알아듣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느님 계획이 왜 굳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어야 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정의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이 없다. 단지 하느님의 선택은 어느 것이나 오로지 무상으로 주시는 사랑의 행위라고 설명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신명 7,7-8조 참조)
성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계시를 내리셨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무런 서두가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시작된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하느님은 분부하시고 약속을 내리신다. 그러나 약속은 전적으로 장래에 걸린 것이어서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그 대신 하느님의 분부는 극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집안사람들의 안전을 보전해주는 모든 것
을 떠나야 했다. 자기 고향과 친적을 떠나 홀로 민족들 가운데 낯선 땅에서 모험을 하도록 떠나간다는 것은 어렵고도 모험에 찬 위협에 처한다는 뜻이었다. 아브람은 자기가 나서는 그 모험이 어떻게 끝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지존께서 내리시는 말씀은 믿을 수 있고 또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아브람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말씀은 요구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전도 내리신다. 그런데 그 특전이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먼 훗날의 언약이었다.
결과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협력에 달려 있다.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동시에 아브람의 자유롭고 용감한 호응이 필요하다. 약속은 하느님의 교육법이라고도 하겠다. 인간을 자유스럽게 하느님과 친분을 갖도록 훈련시키는 교육이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신앙의 모험을 배우는 교육이기도 했다. 하느님은 아무 특은도 베푸시지 않고 그저 인간이 가진 것을 빼앗아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인간이 하등 존재나 사물의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전
적으로 당신의 업적이요 또한 인간의 업적이 될 결과를 예견하면서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존중하시며 분부하시고 또 언약하신다.
“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떠나가거라’.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이 첫 구절에서 이미 아브라함의 생애 이야기가 어떻게 기술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대답을 드리기보다 따른다. 이것이 하느님께 응답하고 그분의 말씀에 맡겨드리는 아브람의 방법이요 그가 믿는 방법이다.
- TEXT 안에서 -
이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아브라함은 주저없이 응답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요구하신다. 그에게 원래의 자기를 완전히 뿌리뽑고 떠돌이 반 유목민이 되도록 요구하신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성서저자는 참된 하느님의 사람, 자기 주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에 희망을 거는 사람의 윤곽을 명확히 그려 놓는다. 하느님은 그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그가 ‘세상 사람들’의 축복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만을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 선택된다. 하느님은 바로 당신의 선택받은 자 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하여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제 바벨에서 흩어졌던 민족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희망의 표징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가나안에 당도하며 이 땅이 그의 후손들이 받게 될 땅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는 거기서 야훼께 예배를 드린다. 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최초의 예비행위가 된다.
선사 시대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의 역사가 소개되는데 여기서 성조들이란 이스라엘 민족의 첫 조상들을 말한다. 성조에 속한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가끔 요셉을 중심으로 하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가리킨다.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성조시대는 기원전 2,200년에서 1,200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는 없다. 성서에 나오는 성조들의 이름들이 고고학적인 문헌으로 확인되긴 하지만 성서에서 보듯이 일목요연하게 할 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식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각 부족의 족장들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성조이야기들은 민족의 기원과 경신례 장소와 풍습을 밝히기 위한 신학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선 창세기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아브라함에게 두고 그의 삶을 매우 상세하게 그린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1,800년 사이에 활동하던 유목민으로 보인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며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던 본격적인 유목민들은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나귀를 타고 가축을 먹이기 위해 일정한 지역의 목초와 물을 찾아 끊임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걸로 추측한다.
-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상업도시였던 하란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어버이 집을 떠나라고 하신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머무르는 곳을 떠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의 성서말씀에서 떠난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 대목을 기록한 솔로몬 왕의 서기관들이 일정한 땅에 주저 않아 도시를 건설하고 안주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조상이었던 유목민의 강인한 기백과 모험정신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하란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다른 한편 축복을 동반한다. 하느님은 축복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하시는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축복이 근본이 되어 그의 이름이 남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그에게 축복을 내리는 사람에게 축복이 주어질 것이며, 마침내 그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심으로써 길 떠나는 사람에게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정해 주신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더 이상 방황하는 유목민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고 떠나는 순례자가 된다. 방황과 순례는 둘 다 일정한 곳에 정착하기를 거부하지만 전자는 목적과 방향 없이 떠나는 것이고 후자는 목적과 방향을 뚜렷이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 우리는 아브라함의 위치가 족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내와 조카와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사람들과 함께 떠났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그는 평생 유목민의 족장으로서 어느 곳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우거나 탑을 쌓지 않고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비록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행선지를 밝혀 주시지만 이 가나안이라는 땅도 그에게는 중간역일 따름, 그곳에 주저 않아야 할 종착역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네겝(팔레스티나 남쪽 지방의 이름) 쪽으로 떠나 버린다.
- 네겝에 정착하여 이제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그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아브라함은 에집트에 몸붙여 살려고 그곳으로 이주한다. 팔레스티나 주민들은 흉년이 심해질 때 가끔 에집트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넘어왔고 에집트에선 이런 무단입주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국경수비에 골몰하였다. 에집트에 들어오기 전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자신을 오라버니로 부르라고 명한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에집트인들이 남편인 자기를 죽일까 염려해서이다. 윤리적으로 볼 때 낯선 땅에서 살아 남기 위한 호구지책치고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 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겁한 남자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인 다면 때때로 파라오의 왕비는 그이 누이로 말해진다. 그리고 고대 근동의 몇몇 민족들에서는 자기 부인에게 더욱 확실한 신분을 보장해주기 원할 겨우, 누이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인 발굴로 얻어진 문헌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성서자자의 시대에는 이미 잊혀진 것으로 여겨진다.
- 이런 미인계 이야기가 창세기에는 세 번 나온다. 창세기 20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이용하여, 창세 26장에서는 이사악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이용하여 각각 그랄 왕 아비멜렉의 환심을 사려했다. 본디 한 이야기가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달리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 여기서는 저자가 주님께서 땅과 후손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위해 자신의 실수로 곤경에 빠져 있는 당신의 선택받은 종 아브람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하느님은 늘 아브라함을 보호하실 것이며, 선택된 백성이 어머니가 될 사래 역시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로 타민족 왕의 아내가 될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잘못에서조차도 긍정적인 가치를 끌어낸다. 아브라함은 비록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땅과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순례여행을 계속한다. 시날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에만 골몰했던 바벨탑 건립자들과는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 이야기 앞에 바벨탑 이야기를 내놓은 것은 창세기 저자의 의도적인 편집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이야기들을 작성한 솔로몬 왕궁의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탐내어 예루살렘에 몰려들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그곳에서 녹을 먹고 있는 왕궁에 득실거렸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믿음을 가지고 미지의 땅으로, 신비의 세계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순례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생각인 것이다.
- 세겜: 거룩한 곳/ 거룩한 성소란 뜻
- 모레 참나무: 히브리말에서 ‘예언하는 자 또는 점장이의 참나무/ 예언의 참나무/ 시 신탁의 참나무를 뜻할 수 있다.
- 베델: 하느님의 집이란 뜻을 지닌 말로 이스라엘 왕조시대에 매우 중요한 종교 중심 지가 된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75-78.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182-186.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65-6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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