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18- 성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앞으로 우리는 창세기 12자에서 20장까지 성조들, 즉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 및 그의 형제들이 하느님의 약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이 성조사를 통하여 계속 메아리치는 하느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 아브라함(창세 12,1-25,11)
- 야곱(창세 25, 19-35, 20)
- 요셉(창세 37, 1-50, 26)
1. 역사적 배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충적토 평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끊임없는 세력 투쟁의 무대가 되어 왔다. 수메르인들과 아카디아인들의 뒤를 이어 들어선 우르 제3왕조(기원 전 2060-1950)는 웅대한 왕국으로 발전한다. 한편 아모리 족이라는 이름의 반유목민이 이 지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당시 페르시아 만에서 시작하여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평야를 지나 나일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내에서는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바로 이 이주하는 아모리 족 사이에 섞여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아브라함의 선조들은 우르에서 살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란으로 이주했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도 결코 정착을 몰랐고 시간도 그칠 줄 모른 채 사람들은 여전히 이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어떤 형태로 체험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그가 그것을 체험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하느님께서 장차 그에게 보여 주실 땅으로 옮겨가도록 요구 받았던 것이다.
*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고대 문헌들은 이 시기에 관계된 몇 가지 흥미있는 사실들을 보여 주고 있다. 첫 번째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이야기에 나오는 많은 관습들이 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관습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성조들의 이야기가 아주 오래된 전통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로 ‘히브리’라는 명칭은 ‘아피루(apiru)', 또는 ’하비루(habiru)' 라는 집단의 명칭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피루’는 하나의 사회계급이었다. 그러니까 사회변두리에 살면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그래서 곧잘 착취를 당하던, 고향 없는 떠돌이 계층이었다. 우리로서는 그들을 이주 노동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피루’란 대체로 이러한 인종적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라는 낱말은 성서에 사용될 때 천한 계층의 호칭으로 거의 모욕적인 어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창세 39,14이하 참조).
아브라함은 양과 염소떼를 몰고 가나안 중심부 야산지대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목초지와 물을 찾아 경작지를 헤매며 살았다. 그는 이 남부 가나안에서 지냈는데 이 지역은 후에 유다로 된다. 가나안에서는 한발과 기근이 늘상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나일강 덕택에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에집트로 옮겨갔다. 에집트로 이동하기가 비교적 쉬웠던 까닭은 당시의 가나안 대부분이 에집트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생애의 대부분을 떠돌며 보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들을 믿으며 살아야 했다. 이 약속들은 결코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못할 것들이었으나, 그에게 아들 하나가 생기리라는 약속만은 실현되었다. 이 아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약속된 땅’으로 말하면 그가 손에 넣었던 가장 가까운 땅이 자기 아내를 묻기 위해 산 땅이었다(창세 23). 아브라함은 죽은 후 사라의 곁에 묻혔다.
이사악은 그의 선조들의 땅 하란에서 아내를 얻었다. 야곱 역시 그러했다. 아브라함의 방랑생활은 그의 후손들 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에집트로 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곳으로 가게 된 이유 역시 한발과 기근이었다. 그들은 에집트에서 오랜 기간을, 사실상 여러 세기를 머물며 정착하였다.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하느님께 대한 시대에 앞선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들을 믿으면서 살았다. 하느님이 그들의 인도자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시대와 완전히 무관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조들의 신앙은 그들이 살던 당시의 인간들이 지녔던 신앙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보는 하느님은‘선조들의 하느님’ 즉 자기 자녀들과 함께 떠돌아다니시는 가족신이었다. 우리는 이 성조들이 가나안 족의 사당을 이용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하느님께 붙인 이름, ‘엘(EL)','엘리온(Elyon)', '엘사다이(EL Shaddai)'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우리는 성조들이 당대의 문화 속에서 올바르고 의롭게 여기지는 바를 실천하며 살았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십계명을 부여받은 바도 아니고 산상설교를 들은 바도 없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 이 시기 에집트의 역사
이 시기의 에집트 역사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그 후 한 세기 정도를 에집트는 문화와 세력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러한 세월도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못했다. 나라 내부에 문제점들과 권력투쟁이 발생함에 따라 에집트는 약화되었고, 그 결과 시리아와 가나안을 휩쓸고 나서 에집트 정복을 꾀하는 침략자들을 막아 낼 도리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발달된 무기를 지닌 침략자들은(이들이 최초로 기마대와 전차대, 무서원 칼 최신 무기들을 전쟁에 사용했던 것 같다) 에집트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힉소스(외국의 통치자들)라 불리었고 기원 전 1720년에 에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힉소스의 기원은 부분적으로 셈 족이었다. 야곱과 그의 후손들도 물론 셈 족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에집트의 통치자 힉소스가 야곱의 후손들을 반갑게 맞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에집트에 외국인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는 더 유리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에집트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요셉이 그 곳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이집트의 수도는 테베였으나 힉소스 족은 텔타(고센)지방의 아바리스에 소도를 건설하고 세력을 펼쳤다.
그러나 에집트인들은 이 외국 통치자 힉소스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와 제 나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에집트인들은 내부의 알력을 두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테베에 있는 에집트 인들은 새로운 무기를 입수해서 힉소스 족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대동단결하여 힉소스 족에 대항함으로써 기원 전 1550년에 그들을 내몰고 거의 2세기 동안을 외국인에게 눌려 지냈던 굴종을 청산하면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에집트 역사에 있어 이시기는 신왕국 시대라 불린다. 이 신왕국이 들어선 처음 몇 세기 동안 에집트는 더욱 강대해졌고 외국 영토에 대한 지배도 한층 넓어졌으며 문화와 종교 역사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화려한 신전과 왕궁과 창고들이 세워지고 새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힉소스에서 에집트 본토인들에게로 통치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에서 히브리인들에 대한 태도 변화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의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에집트에서(필경 힉소스 족의 통치 하에)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났고 그들은 이제 위험스런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왕좌에 올랐고 그는 자신의 건축사업을 위해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 참고문헌: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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