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22장(1):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마리아 아나빔 2010. 11. 25. 14:31

 

 

 

                     성서나눔25-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들어가면서

 

     이제 창세기 22장 1절-24절은 엘로힘계 전승에 속한 것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받게 되는 최대의 도전을 기술한다. 즉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정점, 그가 받은 가장 큰 시련 및 그의 신앙과 순명을 이야기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있는 재능 전부를 쏟아 붓고 있는데, 그 결과 이 대목은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것, 문학작품의 걸작이 된다.

    그리고 통상 ‘이사악의 희생제사’로 불리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도 자행되었던, 아기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을 간접적으로 단죄하고,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부드럽고 정교하며 느린 동작으로 진행되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여기에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 있으며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그의 무조건적 순명도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후 성서의 전통에서 신앙을 따라 순종하는 의인의 전형이 된다.

 

Text 안에서

 

창세 22,1-8 에서

 

- 아이를 번제물로 바치는 풍습은 고대 가나안에 널리 유행하던 우상숭배의 경신례였다. 그리고 서부 셈족들 사이에서도 곤경의 때에,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봉헌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서부 셈 족이 살던 팔레스티나 북부 에집트 여러 곳에서 어린애들의 유골을 집단적으로 발견하였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불살라 바치는 풍습을 신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사로잡는 경신행위로 보았다. 성조시대에는 없었던 이 악습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이후 그곳 원주민들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 악습은 율법(레위 18, 21; 20, 2-5)과 예언자(예레 7, 31; 에제 23,37)들에 의해서 철저히 금지된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이 악습에서 온전히 빠져나오게 된 것은 유배 시대 이후에 와서였다. 그리고 사람 대신 소나 양으로 희생제물을 바치던 이스라엘의 제사는 나중에 예언자들의 줄기찬 노력 덕분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희생을 지향하게 된다. 곧 이런 희생제물보다 봉헌자들의 통회하고 뉘우치는 마음, 진실된 마음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은 경신례 배경이 깔려 있는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자유로운 선택에 대하여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야기의 저자는 서두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한다. 시험이란 유혹이라는 함정을 파놓고 길가에 숨어서 걸려들까 피해 갈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것과는 다르다. 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시험은 바로 이런 뜻이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단련시키시기 위하여 갖가지 위험과 시련을 보내신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이 장애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시험은 이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그런 일들이 있은 후에’라는 어구로 엘로히스트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흔히 도입하는 상투어이다(15,1;22,20;39,7;40,11).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어서 말씀하십시오”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원문에는 “여기 제가 있습니다.”로 되어 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쓰기를 원하시면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개인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이 대목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 히브리 성서의 본문에 이사악의 봉헌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네 아들, 너의 외아들, 네가 사랑하는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로 되어 있다.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지극히 소중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 아이에 대해 세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모리야 땅(아모리- 사람의 땅: 가나안 사람과 같이 팔레스티나의 고대 주민)’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장소이다. 역대기 하권 13장 1절에 모리야는 솔로몬이 그 위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산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되던 희생제사를 아브라함의 제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번제는 희생물을 온전히 태워 바치는 제사라서 가장 완전한 제사로 인식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온전히 복종한다.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는 표현에서 아브라함의 성실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아침에 떠난다.” 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아브라함이 전날 밤 꿈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꿈을 통한 현시는 이 이야기 대부분을 기록한 엘로히스트의 흔한 수법인 것이다.

 

-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는 표현은 삼일 동안 걸어서 산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는 바로 앞 절의 보고와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는 9절의 표현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완벽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노아처럼 곧바로 정확하게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실행했다는 것이다. 산이 가까워 오자 아브라함은 길을 떠날 때의 고대 근동인들의 풍습대로 종들에게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저기 산에 가서 기도하고 오겠다.”고 에둘러 말한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위험하지 않은 장작을 짊어지게 하고 자기는 위험물질인 불씨와 칼을 챙겨든다. 종들에게 완전히 벗어나 단둘이 되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아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하여 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 저자는 둘 사이의 대화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억제하고 간결한 문체로 처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깊은 고뇌에 빨려 들어가게 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각자의 짐을 지고 한참 길을 간 후에 이사악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다.

“아버지!” “애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 아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버지는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회피성 대답은 자신도 모르게 발설한 예언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사악 대신 뿔이 덤불에 걸린 수양을 제물감으로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 대답에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연민이 깃들여 있은 동시에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소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감히 하느님께서 아들 대신 다른 희생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 우리는 간혹 가정 안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자신과 자녀들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또는 자녀들을 수도자나 성직자로 하느님께 바쳐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육친의 정은 본능적인 것이기에 그 만큼 강렬한 것이고 더 높은 사랑을 위해 이를 희생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인간적인 회의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들 안에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우리들의 기도 안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