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2, 9-19: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
-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내내 각기 자기 생각에 묵묵히 빠져 들어간다. 하느님께서 이러 주신 장소에 도착해서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침묵 가운데 제사 바칠 준비만 한다. 이사악도 침묵 속에서 그의 일을 곁에서 거들었을 것이다. 제단을 쌓고 장작을 그 위에 얹어 놓은 다음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는다. 이야기의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필요 이상으로 상세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상세한 행동의 묘사는 짧은 대화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고뇌를 보다 진하게 강조하는 저자의 의도와 억제된 감정을 다시 한번 엿 볼 수 있다.
- 이사악을 묶어 제단에 올려놓은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는 순간 주님의 천사가 그를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22장 1절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한 번 부르시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천사가 두 번씩이나 그의 이름을 부른다. 두 번 이름을 부른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아들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사가 부르는 소리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는 종의 자세를 취한다.
- 천사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고 하면서 아이에게서 칼을 치우도록 한다. 여기서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는 표현은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인정하여 그분을 공포의 대상으로 알아 모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명령을 존중하여 그대로 지켜 나간다는 뜻이다. 자녀가 아버지에게는 갖는 존경과 효성과 애정을 모두 포함한 내적인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다.
- 아브라함은 이사악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지만 하느님께서 그 외아들을 주셨기에 그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해 왔고 따라서 그분에게 이사악을 바치는 걸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 중 가장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다. 하느님 정말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바치는 희생제물 자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이었다. 하느님은 고령의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점지해주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아이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갖고 계신다. 이와는 달리 가나안의 신들은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낳는 데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 그런데도 가나안 사람들은 아이들을 죽여 신들에게 번제로 바쳤다. 이 가나안 신들은 이사악의 생명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절하신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바치려는 아브라함과 그의 마음만을 받아들이시고 그에게 소중한 아들의 생명은 다시 되돌려 주시는 하느님!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오가는 가장 아름다운 친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 하느님은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을 희생제물로 선정하신다. 하느님이 섭리에 따라 이사악을 대신하여 제물이 된 이 숫양은 맏배를 기워갚는 제물이 된 첫 예다. 뒤에 출애굽기 34장 19-20절에서 말하는 맏아들을 물러내기 위한 규정이 있는데, 이 규정은 어린 아들 예수님 봉헌 떼에도 지켜졌다.
이스마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천사를 시켜서 하갈의 눈을 뜨게 하여 브엘세바(맹세의 샘/일곱 샘)의 빈들에서 샘을 발견케 하신 하느님은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여 희생제물이 될 수양을 발견하게 하신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자기 외아들을 죽이지 않고도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바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 편에선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을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첫 열매 이사악을 희생시키지 않으시고도 아브라함의 정성 어린 예배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번제의 제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배려가 너무 고마워서 그 산의 이름을 야훼 이레,( 곧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예루살렘 성전과 결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라고 불렀다. 여기서 이레라는 동사는 ‘주님께서 보신다.’ 로 옮길 수 있다. 번제물조차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모리야’의 라틴역은 ‘나타나심의 땅’에 부합된다.
- 수양의 번제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15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장엄하게 갱신하신다. “네가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되리라.” 아브라함의 충성을 보시고 하느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느님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가 없으므로)하신다. 하느님은 당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없기 때문에 당신 이름 이외에 어떤 것을 걸고도 맹세하지 않으신다. 이후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표현은 예언자들의 신탁과 더불어 나타난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성문을 부수고 성을 점령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다. 든든한 요새로 둘러싸고 도시를 점령하고 그곳의 지배자가 되리라는 약속인데 여기서 저자는 가나안의 성벽도시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덕분에 세상만민이 덕을 입을 것이라는 구원의 보편성을 약속해 주신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이로써 하란을 떠날 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 덕분에 가까이는 이사악이, 멀리는 이사악의 후손인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모든 히브리인들의 맏자식들이 구제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후손 가운데 자신을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봉헌하심으로써 만민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 사도 바울로와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사악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성부로 보았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이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바치신 것이다. 즉 이사악이 그리스도의 전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사악이 번제물을 사는 장작을 운반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또 양이 이사악 대신 제물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번제의 어린 양 곧 제물이 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의 중재로 자기 외아들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게 되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참혹한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신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르는 이사악과는 달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에 절대복종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바쳐지는 이사악이 되는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아브라함도 되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와 사랑의 만남은 아브라함의 제사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에서나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03-110.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95-98.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출판사,1986, p.259-263.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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