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text에 접근하는 방법들
성경의 Text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1) 성경의 Text로 하여금 내 삶을 읽게 하는 법
우리는 어떤 문학작품이나 음악 예술품을 “감상”한다고 말한다.
이 “감상”이라는 말 안에는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접근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한 예로, 우리는 루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유명한 빛의 화가인 렘프란트가 그린 유명한 이 그림은 더 잘 알고 있다.
자, 여기서 한번 text에 접근하는 법을 배워보자,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각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ex)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주변 사람들
만약 우리가 이 그림을 감상한다고 할 때,
자신의 육체적, 영적, 환경적 상황들이 모두 반영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경의 Text가 우리의 삶을 읽게 하는 것 과 똑같은 방법이다.
여기는 성령이 우리에게 민감히 작용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상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상황은 모두가 다르기에 같은 Text라도 모두 다르게 해석된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성서신학적인 요소들로 다양하게 재해석 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누구나 성서신학을 할 수 있다.
2) 말씀의 Text와 Context안에서 지닌 본래의 의미를 알아듣는 법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이제 그림을 그린 렘트란트의 본래의 의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렘트란트는 그가 그린 ‘돌아온 탕자’는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되어야 할 존재가 바로
‘아버지’ 상‘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 ‘아버지 상’은 부성성과 모성성을 가득히 지닌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의미한다.
또한 이 그림은 하나의 ‘영적 과정’을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한 손은 아버지를,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을 그려 넣었다.
즉 그림 안에서 큰 아들, 작은 아들, 주변 사람들, 등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렘트란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되어야 할 존재의 모습과 상은 바로
‘부성성과 모성성’을 지닌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성경의 Text은 언제나 그 삶의 자리에서 해석되어지질 필요가 있다.
그 삶의 자리들이란 바로 원 Text(원문에 충실) Text의 저자의 의도,
Text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즉 Text를 Context안에 이해하는 것이 된다.
즉 성서를 언어, 문화, 역사, 사상, 관습, 등 다양한 범위 안에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일차적인 것은 본 Text 안에서 자구대로의 해석이 일차적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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