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를 읽기 전에
성서는 성서가 씌어지기 전에 먼저 사건들이 있었고 신앙공동체의 삶이 있었다. 이 사건들과 공동체의 삶은 대부분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구전으로 되풀이 되다가 늦은 시기에 와서 비로소 전문적인 글장이들에 의해서 이야기의 꼴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이야기의 교훈적인 내용에 다양한 주제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ex) 성서의 백성인 히브리인들이 쓰던 언어는 셈족어인데 “그리고... 그리고”로 계속 연결되어 나가는게 특징인데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엮어나가는데 안성마춤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 내용은 선사시대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 안에 ‘역사적’ 사실을 찾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성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문자’가 아니라 이야기 내용 속에 들어 있는 ‘진리’이다.
ex) 바울로 사도가 남긴 서간들 가운데 바울로 사도 자신이 받아들인 시대적 약점이 군데군데 노출되어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노예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이다. 이것은 20세기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문제다. 따라서 성서라는 이유에서 이런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약점까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자 뒤에 가려진 진리는 중요하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를 현대과학이 증언하는 창조이론과 대립시키거나 조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처음서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보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진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 세상과 인간의 기원을 하느님께 둔다는 것
-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의 동업자로 초대하셨다는 것
- 한편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인간이 창조의 길 대신 악의 길로 들어서서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애쓰신다는 것
그러므로 성서을 읽고 만난다는 것은
-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삶의 차원, 신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만남
-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 인류 역사의 어느 일정한 순간에 주고 받 았던 대화 그리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대화의 결정
- 깊은 사색으로 들어가는 초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내면으 로 들어가는 초대이며 길이다.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눈이 육안, 심안, 영안을 가졌다면,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삶으로 초대이고 길잡이 된다.
따라서 성서를 일고 만난다는 것은 하느님과 개인의 만남과 교회를 통한 만남 보다 돈독하게 하는 길을 다시 찾자는 움직임이며, 우리가 당신을 알아뵙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뵈려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말씀과의 만남은 이론적인 성서 공부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만남, 삶을 건 만남을 도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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