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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본성

마리아 아나빔 2013. 3. 29. 19:24

 

 

 

                                                신학의 본성

 

                                                                                                                             - 이정배 교수의 강의를 듣고 -

 

I. 신학의 본성

 

<신학에 대한 물음과 대답: 1베드 3,15>

 

“ 두려워 하시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 종교체험의 세계를 말로 담아낼 수 없기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이다.

또한 온유와 두려움을 갖춘 대답은 구체적인 신학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원리> -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말하고 살아갈 때

- Deus Revelatus(계시 실증주의)

- Deus Absconditus(계시 신비주의)

 

<신학의 언어> : 예수님의 언어는 비유(Metapho) 이다. 이것은 "it is but it is not"이다.

 

ex)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 안에 고백되어진 그리스도

사도신경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삶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하나만을 강조 할 수 없음을 예수님의 언어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확정지어지는 언어는 온유와 두려움이다.

ex) in homo/ in Deus: 칼체톤 공의회(그 시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postmorden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신학하는 방법은 ‘우리의 물음’에 대한 물음이 철저해야 한다.

 

it is 가 우리 시대에 맞는 it is이어야 한다. 과거의 it is는 중요한 범례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의 it is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신학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델레스에게 생물학의 영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남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즉 남자만이 우성인자로서 그리스도의 완벽성을 지녔다는 사고가 후에 백만의 마녀 재판을 자행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은 시간과 공간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ex)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논쟁 안에서

 

파니카 신부(인도) -------------------- K . 라너신부

칼 라너: 서양 사람은 가시적인 그리스도인지만 흰두인은 잠정적 그리스도인이라는 포괄주의를 입장을 취한다.

파니카 신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임을 용납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익명의 흰두인으로만 부를 수 있는가? ------- 수락하지 않음(배타주의이다.) 즉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이, 자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개신교에 대해서는 가톨릭이가 우월하다.

그러므로 동일성의 기준에 맞지 않는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남자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여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차이는 ‘초월’이다. 그래서 지금은 차이의 차이의 축제의 시대이다.

EX) 배타주의 , 포괄주의, 다원주의

 

파니카 신부는 기독교인들에게 세 종류의 대화가 있다고 본다.

1) 실존주의적인 대화: 서구의 기독교인들로서 단지 시간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2) 변증법적인 대화: 동일한 세계 안에 태어난 종교에서 변증법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3) 대화적인 대화: 성경이 불교와 유교와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알아보기 위한 대화를 해야 한다. 익명의 기독교인이라   말 을 하지 말고 대화적 대화로 서로의 종교 인정하는 대화가 필요하다.(공간적 대화)

 

<성경을 읽는 세 가지의 눈>

 

신앙은 ‘보는 눈’이 아닌 ‘보려는 눈’을 갖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눈’‘관’ 역사관을 갖고 있었는데 ‘신명기 사관’이다. 역대기와 열왕기의 사관으로써 “율법”을 기준으로 역사를 정리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이 ‘사관’이 맞지 않는다. 즉 이것으로 오늘을 바라볼 때 맞지 않는다. 이에 다른 사관이 생겨났는데 바로 “욥기”이다. 욥기의 세 신학자는 ‘신명기의 눈(율법을 지키는 자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으로 욥에게 이야기를 하고 욥은 “의로운이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사야서의 어린양도 고통을 당한다. 이처럼 우리의 신학도 또다른 it is 가 만들어 지지 않으면 그러하다.

 

1) 신앙의 눈: 성경이 나를 읽는 것

안식일은 나를 지켜주기 위함에 있지, 내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만 있으면 하나의 이데올기가 될 수 있다.

 

2) 의심의 눈: 성경 안에서 성경에 대한 비판)

시대의 제한성을 벗겨내기 위해서 비평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ex) history 만이 아닌 herstory도 있다. 가부장적인 특성은 어머니와 처녀만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다함께 연구해야 한다.

 

3) 자기발견의 눈: 생태영성

지금의 세상을 73권의 성경으로만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 동종교배는 열성이다. 이종교배가 우성이다. 마치 오순절은 차이는 축제이다.

 

 

 

II. 풍토와 자연의 상호관계 이해:

                  - 세계관의 핵심은 자연이다. -

 

 

< 풍토와 인간>- 와쓰지 데쯔우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에서 지금까지 서양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신과 철학을 시간 속에서 존재자의 물음을 찾아야 한다.(탈형이상학) 이에 반면 와쓰지 데쯔우고는 나는 공간성 속에서 ‘존재자’의 물음을 찾겠다고 한다.

 

ex) 물(세계관)과 물고기(종교) 그러나 이 둘은 하나가 아니다. 물고기도 종류가 다양하다.

따라서 인간은 풍토(환경) 안에서 '자기이해방식'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종교적 특성'이 생겨난다(ex:천, 지, 인)/ ism은 인간이 만든 허구이다. ity만이 종교이다.

 

1) 몬순형(인도)

자연이 주는 해택이 풍요롭다. 반면 자연이 주는 폐해도 크다. 그러기에 이 안에서 “수용”의 이해방식이 생겨나고 ‘업’이나 ‘윤회’(아버지의 죄/ 어머니의 죄)사상이 생겨난다.

 

2) 사막형(이집트, 히브리 문명)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집단적 이해방식이고 되고 '초자연적 종교성'을 갖게 되었다. 즉 인간의 의지와 신의 초월성이 합져진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신'만이 자연을 이길 수 있다.

 

3) 목장형(그리스 문명)

처음에 있는 자연은 거치고 황량하지만 인간이 공을 들이면 편해지고 길들여진다.(cosmos)

이에 ‘합리성’이 이해방식이고 여기서 철학이 발생한다.

 

4) 독일(음울형)

유럽의 문명이 북서부로 이동하면서 그곳은 빛이 없고 잿빛 하늘로 가득하다. 이 안에서 인간은 ‘내면으로’ 깊어진다.

ex) 괴태의 파우스트나 마르틴 루터

 

ex) 사막형 + 목장형 풍토 = 가톨릭

      사막형 + 음울(독일) = 개신교

      사막형 + 한국형 풍토 = 한국형 토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