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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의 특성- 생태신학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아나빔 2013. 3. 29. 19:47

 

 

 

                              현대 신학의 특성- 생태신학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이정배 교수의 강의를 듣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가톨릭

 

- Analogis entis(존재의 유비): 가톨릭 - 토마스 아퀴나스(Idea :플라톤) + (physis: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변화하는 총체로 하느님 나라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공간이다.

영지주의(가현설)은 현실을 극단적으로 악하다고 본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원론을 이데아가 반영된 그림자로 본다. 여기서 AD 12세기 아랍상인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들어온다. 자연 속에 초자연이 담겨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공동체가 성장하려면 낯선것이 들어와야 한다.

 

교부 안셀름(12-13c) ‘알기위해서 먼저 믿으라.’ 그는 아랍지역의 상인들이 고리대업을 행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시간을 담보로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의 종교는 잘못된 사회 현상에 대해서 말을 못하고 있다.

 

ex) 플라톤 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초자연          +                자연

      하느님           +                인간

       복음             +                 문화

     기독교             +               이웃종교

             (은총강조) (도덕적 선행 강조)

 

이러한 원리에 존재의 유비가 설명되고, 이러한 구도 안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의 원리 가능하게 된다(포괄주의). 은총도 중요하지만 인간들의 수행도 중요하다. 초자연과 자연이 서로 닮고 있다.

→ 토미즘 포괄주의: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개신교

- Analogis fidei(신앙의 유비): 개신교- 마르틴 루터, 칼 바르트

 

초자연 + 자연(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완전히 지워버림(부정)

자연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신앙으로 강조하면서 신앙과 정신적 측면을 강조한다.

 

이로써 초자연과 자연 사이에는 수많은 협곡이 있다고 본다. 이로써 초자연과 자연, 하느님과 인간, 복음과 문화,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을때 가능했다고 믿는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것은 배타주의적 성향을 가진다. “신이 인간이 되었는 것에 대한 믿음”만이 있다.

 

 

유럽 1934년 바르멘 선언(Barmen)은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히틀러를 두 번째 메시아로 고백한 98%에 교회가 2%로 안 되는 교회가 고백교회를 한다(본 회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되지 않는 어떤 고백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배타주의 때문이다. 즉 현실세계를 부정함에서 온 것이다.

ex) 일제시대 가톨리과 감리교/ 장로교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는 쓸모가 없는 신학이 된다. 오늘날은 모든 것에 문을 열고 잇는 가톨릭이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제3의 기독교 유형은 어떤 것일까?

 

- 장로교회(대륙의 풍토) - 합리주의(연역법)

경험이 자리하지 않음(칼빈: 예정론): 선택구원, 성경만을 신앙의 규범으로 선택한다.

자유의지를 약하게 본다. 선험적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교회를 세운다.

- 감리교회(섬나라 풍토) - 경험주의(귀납법), 성공회

경험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웨슬리, 헨리8세 :선행 은총론)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으로 개인적 회개와 경건주의를 강조한다. 성공회는 정치적 문제로 전례는 가톨릭, 성경은 개신교를 사용한다. 만민 구원으로 경험과 자유의지 강조한다. 그래서 먼저 학교를 세운다.

ex) 순복음교회(오순절) 감리교 - 선결교회 - 순복음교회

 

→ one who knows one, knows none(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른다): 괴테

자기종교만 알아도 자기종교를 모른다. “너를 통해서 앎”

따라서 신학적으로 옮아도 목회적으로 기다릴 필요가 있다. 목회적으로 옮아도 신학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목회와 신학은 다르다.

 

 

<신학의 요소>

 

Fides quae creditur : 신학의 객체적 요소- 성경, 전통(근재이전) - 중세(가톨릭) - 획일주의

Fides qua creditur : 신학의 주체적 요소 - 인간의 이성과 체험(근대이후) - 개신교 - 많은 종파가 파생됨(분파주의)

 

따라서 신학이란 객체와 주체의 만남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중세: 성경, 전통(신학의 알파요 오메가) - 교의학

- 종교개혁: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해석학(번역은 반역) - 오직 믿음으로만, 믿음의 행위가 성경과 전통에 못지않게 중요함/ 모든 종파적 해석이 다름(이에 가톨릭의 예수회 에서 반종교개혁이 나옴)

- 구정통주의(17-18c) : 재 성경, 전통 중시- 신학함에 주체적 요소의 피해가 켰기에 신학암의 객체적 요소로 돌아감: 교의학(Dogma)

- 근대신학(19c): 슐라이허 마흐의 해석학으로 근대신학의 태동, 종교란 사유도 의지도 아닌 무한한자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란 절대의존일 때 절대자유할 수 있다. 신 안에서 윤리가 나옴(신앙의 주관적 표현) ≠ 칸트는 이성의 한도내에서 설명(윤리의 요청으로 신이 옴)

 

- 신정통주의(20c): 헤켈의 변증법/ 이성강조 ≠ K. Barth(조직신학) “말씀의 신학” 강조.

전통주의인데 신 정통주의이다. 슐라이허 마흐에 대항하여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신학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전체경험은 신학이 된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을 “church dogma"라고 함

 

- 조직신학: 포티엘은 칼 바르트가 공동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공동체의 신학만 신학이라 할 수 없다. 교회 밖에서도 일어나는 신학적 질문들도 있다. 신학과 철학은 상관론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과 철학 안에 물어지는 많은 질문들이 조직신학 체계주의 갖고 발전한다.

 

- 구성신학(현대): 셀리 맥 혜이 는 포디엘이 말한 이성은 누구의 이성인가? 이성의 체험도 제각기 다르다. 백인여성과 흑인여성의 체험이 다르다.

동일성의 철학 파생: 여성- 남성/ 유식인종- 백인/ 자연- 인간/ 이웃종교- 기독교/ 민중- 부르조아가 기준이다.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차별’이 존재한다. 포티엘의 이성의 질문은 동일성의 기준이다. 그래서 동일성의 철학이 해체되고 ‘타자의 철학’'차이의 철학’'차이의 축제’가 생겨난다. 여기서 여성신학, 생태신학, 종교신학, 민중신학이 생겨난다.

 

 

구성신학(재구성신학)의 분류: 민중. 해방신학, 여성신학, 종교신학, 생태신학 등은 지금까지 한번도 주체가 되지 못한 것으로 주체로 내세우는 소유격의 신학이다. 한편 이 세상을 만든 분은 하느님, 그런데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신학자가 걸머질 십자가이다. 이로써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다. 재구성신학은 신학의 마지막 단계로써 그 누구도 예외없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신학으로 고립이 아닌 통합의 신학이다.

 

1) 민중신학. 해방신학

 

‘민중’이 역사 안에 한번도 주체가 되어보지 못했다. “you shall be a God" "원죄론”으로 고착화 된 것에는 문제가 있다. 원죄의 교만으로 인간이 교회 안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성직계열에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에서 선악과란 하느님의 것이고 이것은 모두의 것이다. 그런데 원죄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구원이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만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 안에는 이것이 살아 있어야 한다.남미의 해방신학은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볼 때, 자본가는 이것을 축적하고 소외시킨다. 이에 노동의 소외는 하늘이 보상한다. “경제적 인간”에서 지금까지 신학은 부르조아 중심의 신학으로 프로레타리아를 살려내지 못했다고 본다. 선악과는 모두의 것인데 한 사람이 사적인 것으로 취한 것이 원죄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공적인 것으로 돌려야 한다. 이로써 자본주의를 비판하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인간의 노동은 소외된다. 소외된 구조를 종교는 눈감게 한다. 이것을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다. 노동, 인간, 소외는 중요한 관점이다.

 

ex) 이바니치 신부의 ‘유언’에서 "useful un employment", 말하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강생의 신비가 초고의 기독교의 신비인데, 이것이 떻게 우리들에게 재현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이 재현되지 않을 경우 회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서 율법학자가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을 하는 반면 예수님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실천을 말한다. 이반니치 신부는 “현장”을 읽어버리며 강생의 신비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현장을 잃어버리면 타락할 수 있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개념을 묻기보다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도르테 켈리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데 인간은 다음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 즉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일이 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기를 사고파는 매춘행위이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실을 낸다. 이처럼 인간은 복음을 먹고 기쁨을 풀어낸다. 둘째, 자기의 행위가 이웃을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자기의 행위가 자연을 얼마나 지키고 보호하는가이다. 이처럼 민중 행방신학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으로 이것을 “肉”의 신학이라 말한다. 단지 예수의 육화만이 아니라 물질 안에 하느님이 내재해 계시는 “物”의 신학이다.

 

2) 여성신학

 

20c에 많은 여성이 교회를 떠났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해방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남아있는 여성들이 성경 안에서도 여성의 해방이 있음을 발견한다. ex) 다말, 룻, 바쎄바, 라합

 

가부장 시대에 인정하는 여성은 오직 어머니와 처녀였다. 이것만 강조하면 가부장을 더 곤곤히 세웠다. 예수를 길러낸 어머니의 모습도 중요하다. 여성신학자들은 족보 안에 있는 여성들 안에서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더욱더 저하시키고 싶었다.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더욱더 저하시키고 싶었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저하시키고 싶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신비한 여성만이 아니라 밖의 사람들도 중요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in memory her 하고 싶었다.

 

ex) 로즈마리 루터는 “남성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여성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문에서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남자였기에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열등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했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나왔다. 후에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을 사회의 일꾼으로서 창녀로 다룬다. 즉 자본주의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남성들을 위한 위로하기 위한 존재로의 여성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남성이라는 것 사고 안에 많은 것이 잘못되어온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예수는 인간구원이 중요하지 남성만이 중요하지 않다.

 

ex) 칼 융은 “Jesus der mann( 그 남자 예수)"에서 심층심리학을 바탕으로 실제 예수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주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남자이다. 그 안에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을 경우 사회는 내 안에 남성성만 강조해왔다. 그러나 우리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통합이 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될 수 있다. 가부장 시대에 예수는 자기 안의 남성성을 충분히 발휘함과 동시에 여성성도 발휘했다. 융 안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통합되어 있기에 여성과 남성의 주님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여성에게 돌덩어리가 아닌 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 복음서’를 읽었던 공동체가 있었다. 부활의 첫 증인 가운데 마리아가 있다. 그런데 정경화 과정에 이것이 빠지게 된다. 성경의 정경화는 필요했지만 오늘날 우리시대에 그 당시에 배제했던 모든 것을 연구해야 한다.

ex) s. 맥케이는 백인여성의 경험과 흑인여성의 경험이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는 그는 자신의 신학은 미국 백인 중상층 여성을 위한 것임을 대상을 분명히 한다.

 

3) 종교신학

 

종교신학은 종교가 중심이 되는 신학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만났던 방법은 배타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포괄주의이다.

 

            개신교--------------------------- 가톨릭

   Analogia fidei                            Analogia entis

     배타주의                                             포괄주의

   철학을 배제하고 성상을 파괴한            자기 종교에 대한 헌신 하느님의 은총과 실천강조

                                                   아리스토델레스의 아리스토델레스의 자연관을 수용

                                                 자기종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다른 종교로도 인정한다.

                                                                 (초자연이 자연을 완성한다고 봄)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의 대화는 레이문드 파니카 신부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이후, 상대방을 인정하고 아는 것 자체가 선교이다. 자기 종교의 정신을 부정하고 타인의 종교도 부정한다면 이것은 유아기 상태이다. 청년기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생각해야한다. 즉 자신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으로 건너갔다가 건너오는 것이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태양계는 지리산 자락에서 머리카락 하나 빠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경도 이 지구적인 구조 안에 해석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을 문자에 가두는 것이 될 수 있다.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풀려고 했던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분이 가장 보편적인 분이라는 역설이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난제였고, 삼위일체론이 등장한다. 이처럼 다원주의는 내 종교의 절대성과 타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ex) 종교간의 공동근거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가톨릭신자들은 한결같이 있다고 보는 반면 개신교 신자들을 없다고 말한다.

 

종교간의 대화는 ‘차이’를 이야기 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차별과 다르다. 이러할 때 언젠가는 상호변혁(mutual transformation)이 가능하다. 종교간의 선험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없다.

ex) 마르틴 하이테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꽃피는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생물학자는 나무의 품종과 분류법에 따라, 지리학자는 토양의 조건의 관점에 따라, 종교인은 하느님의 창조의 오묘함으로, 사과주인은 경제적 관점에서 사과나무를 바라본다. 사과나무는 여기에 있는데, 인간의 사유는 자기자리로 내려와서 그것을 생각한다. 인간의 사유는 한번도 사과나무 자리에서 사과나무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가 다른 사과나무를 이해하기에 ‘계시된 하느님’, ‘숨어계신 하느님’처럼 이 모든 관점을 수요할 때 더 많은 '꽃 피는 사과나무'를 이해할 수 있다.

‘사유’의 방법을 통해서 '종교간의 대화'를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그분의 활동은 다른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서 열어놓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충분히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종교가 기독교 신학만이 아니다. 절대성과 다원주의 문제도 오래 동안 토론되어야 할 주제이다.

 

4) 생태신학

 

생태신학은 “자연”이 주제이다. 인간은 실존이고 역사이지 자연은 아니다. ex) 칼 바르트는 하느님은 인간과 계약을 했지 자연과 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톨프 볼트만은 자연은 실존의 인간에 비해 동물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이들의 신학은 반자연주의 신학이다.

 

Lynn white는 “생태학적 위기는 역사의 뿌리는 성경에 있다”라고 한다. 창세1, 26(Imago Dei)와 창세1, 28(Domonum Terrene)는 하느님의 축복이 자연을 지배하라. 하느님의 형상으로 주어진 축복이 땅을 지배함이다. 그러나 원죄론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하느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땅도 회복된다.

 

19c에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성한다고 여겼다. 이것을 뒤집어 문명으로 만드는 것이 구원으로 보았다. 식민지시대에 제일 먼저 선교사가 파견되고 그 다음은 기업 그리고 군대가 들어갔다. 군대의 주둔으로 분업화가 일어났고, 유색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었다. 땅이란 자연이고 여성이었다. 자연은 new poor의 개념으로 본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을 지키는 것을 넘어 되갚는 것을 이야기 한다. ex) 생태윤리, 생태신학, 환경 ete.

 

생태(ecology) 란 말은 그리스어 “Oikos"에서 나왔다. 헤켈이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생명의 공간으로 ‘살림살이’가 일어나는 곳으로 살리는 일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EX) live↔ evil / 지문(地文)은 땅의 터 무늬이다. 땅에는 땅의  무늬가 있는데 인간은 땅의 무니 없애는 터 무니 없는 일을 인간이 한다(생태파괴). 즉 땅의무늬를 지워버린다. 자연도 역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없앤다.  사실 기독교의 창조신학은 하느님의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없이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Oikos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법칙이 있다.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창조질서이다. 진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태신학이다.

 

첫째, 모든 것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관계성이다.

 ex) 암(癌)은 하나의 입으로 만이 아니라 세 개의 입으로 산(山)처럼 먹어서 생기는 병(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이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다. 암은 주변 세포를 죽이면서 자기만 성장시킨다. 그리고 끝내 자신마저 죽여 버린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 때문에 이 세상에 암세포처럼 살고 있다.

 

ex)석가는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보리수 나무아래에 묵상한다. 그는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실체가 있는가? 자문한다. 그런데 없다. 이것이 허상이다. 실제로 있지 않고 연기로 있다. 즉 A와 B의 의존적 관계로 존재한다.

EX)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실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허상)/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연기) 이렇듯 생태학 세계 역시 관계 안에 있다. 이것이 깨질 경우 제일 약한 것부터 죽게 된다. 이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Oikos 이다. 즉 하늘을 주님처럼 모시는 일이다(장일주).

 

반면 영(靈)은 동서양의 무당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늘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한다. 비는 생명이다. 똑같은 입으로 어떤 입은 생명이 되고 어떤 입은 죽음이 된다. 이처럼 어떤 지역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3명만 있다면 그 지역은 바뀐다. 

EX) 강남문화의 특징: 1) 실컷 먹는 곳이 많은 곳/ 2) 실컷 뺄 곳이 많은 곳(목욕문화)/ 3) 무수한 방의 문화가 많은 곳/

      4) 실컷 용서 받을 때가 많은 곳

ex) 종교문화는 ‘생명’을 만들어 내어 치유하는 문화이다. 가톨릭의 중세의‘면죄부’보다 지금 더 타락한 것은 개신교의   '은총’이다. 기독교인들이 생태를 제일 많이 깨트려 왔다.

 

둘째, 어떤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우주의 열역학의 법칙이다.

셋째, 자연을 개발해서 얻는 이익보다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이롭다. 개발해서 주는 것은 소수에게 돌아가지만, 있는 그대로 두며 누구에게든지 돌아간다. 기독교 신학은 Oikos 와 만나는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