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코헬렛(1,1-18): 허무한 인생

마리아 아나빔 2013. 9. 1. 16:54

 

 

 

                                       코헬렛(1,1-18): 허무한 인생

 

 

코헬렛은 자연과 역사의 순환을 토대로 인간이 태양 아래에서 허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인생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허무를 넘어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기 위한 서문일 뿐이다.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2)은 중심 주제는 허무를 선포하며, 둘째 부분(1,3)은 지상에서 인간이 노력한 만큼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을을 제시한다. 셋째 부분(1,4-7)은 변함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을 통하여, 넷째 부분(1,8-11)은 새로움 없는 인간역사에 대한 숙고를 통하여 지상에서 인간의 노고가 헛되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 코헬렛은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한계와 파악 불가능한 삶의 신비 앞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깊은

   절망감을 표현한다.

 • 이러한 한계 상황 앞에서 코헬렛은 현실적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권고한다.

 • 코헬렛은 전통적 신학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여는 계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코헬렛이 숙고한 자연과 인생사의 여러 현상을 토대로 그가 세상을 향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또한 코헬렛의 메시지를 토대로 허무를 극복하고 실존적이고 의미 있는 참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Text 안에서

 

  표제 (1,1)

 

이 절은 책의 표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편집자의 손으로 된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형식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잠언 30,1/ 예레미야 1,1/등 참조)

• “다윗의 아들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 코헬렛(설교자/ 회중(에클레시아스테스)이라는 말이 7번 나온다. 즉 집회의 사회자, 지혜의 교사, 설교자라는 뜻을 갖는다. 편집자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이 직함을 붙이고, 설교자의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

• קֹהֶלֶת: 현자의 별명 ; ‘지혜를 모은 자’ 혹은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 자’ Ecclesiastes

 

  (Greek translation)

 

 

Round and Around (1:3-11) : 서문

 

• 코헬렛이 말하는 ‘허무’의 첫 번째 의미를 설명

• 특별한 목적이 없이 순환되는 세상사의 덧없음을 지적

• “무슨 보람 (이익)이 있는가?”(1,3) •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1,9)

 

 

중심주제인 허무(1,2)

 

 

허무(הֶבֶל: 코헬렛에 38번 나타남)란 말은 매우 시적인 리듬을 지녔으며 맺음말(12,8)에서 반복되는 이 구절은, 코헬렛 전체의 중심 주제이며 제목과 같다. 코헬렛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말로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라는 것이다. 이 책이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하고(1,2) 끝난다는 것은(12,8), 이 표현 안에 코헬렛이 전하고자 하는 지혜의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무로다 허무!:는 최상급 표현으로 ‘완전무상’ 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허함’을 뜻한다. ‘허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헤벨’은 숨결, 입김, 수증기, 실바람 등을 뜻하는 단어로 실체가 없는 찰나적인 것(“meaningless” or “temporary or fleeting”)을 의미한다. 추상적으로, 허무, 허망, 무상, 덧없음, 헛됨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용어를 통해 코헬렛은 삶의 현실에서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와 그로인해 느끼는 인간의 무능한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다.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하면서, 그 중간에 마치 자신의 서명과도 같은, “코헬렛이 말한다.”라는 표현을 삽입한다. 그리고 끝부분에 “모든 것은 허무로다”라는 표현을 덧붙여 “허무 중의 허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곧 이 세상의 모든 것, 지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쓸모없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쓸모없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생사를 온전히 인간적 지혜나 이성을 통해 파악하려는 태도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욕망과 노력이 쓸모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보람에 대한 물음(1,3)

 

“태양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코헬렛의 체험이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의 물음이 지상 세계에서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것임을 뜻한다. 코헬렛은 ‘인간’을 가리키기 위하여 ‘아담’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담’은 ‘땅’ 또는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는 코헬렛이 인간을 흙으로 돌아가야 할 유한한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이트론’은 ‘유익’, ‘이익’, ‘소득’, ‘이득’ 등을 뜻한다. 따라서 코헬렛의 물음은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가져다주는 유익 또는 소득이 무엇이냐는 뜻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1,2에 나와 있지만 그것은 인생사와 관련된 보편적 의미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코헬렛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노고와 그에 대한 결실을 놓고 삶의 의미를 묻는다.

 

자연에 대한 숙고(1,4-7)

 

코헬렛은 유한한 인간과 변함없이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대조하면서 ‘허무’에 대한 자신의 깨우침을 전한다. 이는 1,3의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기도 하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1,4). 이 표현은 반복되는 자연계 안에서 사는 인간에게 그 노고의 특별한 보람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새로움(소득)이 없는 똑같은 현상만 반복하는 자연처럼 인간의 삶도 덧없는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4). 곧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되거나 그 의미가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1,5). 다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서쪽으로 기운 태양은 밤 동안 땅 밑을 지나 동쪽으로 돌아가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태양은 서둘러 먼 하늘 길을 달리고 달리지만, 늘 같은 길만을 반복하면서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서 뜨고 진다는 것이다.

 

코헬렛은 바람도 태양처럼 항상 같은 운동을 되폴이 한다고 생각한다(1,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1,6). 현대 상식에 따르면 공기가 지표면으로 내려온다. 이처럼 온도의 변화에 따라 기압이 변하면서 대류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공기의 움직임을 ‘바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코헬렛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은 창조 때 바람이 만들어졌고, 그 바람이 계속해서 순환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 순간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며, 전혀 새로운 것 없는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다로 흘러가는 물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한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1,7). 고대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을 이루고, 다시 비가 되어 땅을 적시는 순환 원리를 알지 못하였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바다로 흘러간 강물은 지하 통로를 거쳐 아랫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샘처럼 솟아오르거나, 윗물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하늘 문을 통해 비가 땅에 내린다. 따라서 강물이든 바닷물이든 모두 처음 창조도리 때와 동일한 물이며 위치만 달리하는 순환운동을 계속할 뿐이다.

 

이렇게 자연의 순환은 쉴새없이 계속되지만 동일한 물질의 단순한 반복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다 주는 소득(보람)에는 특별함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도 전혀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인생의 노고도 아무런 보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역사에 대한 숙고(1,8-11)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1,8). 이 표현을 통해 코헬렛은 아무리 지혜로운 말로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려 해도 인생은 결국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지혜로운 현자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고 높이 평가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코헬렛은 현실적으로 현인의 지혜가 인간 역사를 뒤바꿰 놓을 수 없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코헬렛은 현자의 가르침이 지나온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나 획기적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언어로는 그런 인생과 인간 역사를 결코 설명할 수도, 그와 관련된 물음에 대답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눈으로 보는 거소가 귀로 듣는 것도 같은 한계를 지닌다(1,8). 이처럼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감각을 지닌 인간의 모든 노고와 그 인생을 ‘허무’일 수밖에 없다. 코헬렛은 인간 역사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구분될 수 없으며 동일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있었던 것은 다시 았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앙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1,9). 현재와 미래는 과거를 되풀이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히 ‘쳇바퀴 도는 일상’이라고 표현하는 삶의 현실을 묘사해 주는 말이다. 그러나 코헬렛은 한층 더 강도를 놓여 ‘인생의 권태로움’을 표현한다. 게다가 인생뿐 아니라 태양 아래 있는 세상 모든 것이 언제나 동일하고 새로운 것이 없는 권태로움과 허무함을 지녔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1,10). 라는 표현은 ‘새 시대’를 예고하는 예언전승(이사 43,19; 예레 31,27-28)과 반대되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코헬렛이 예언 전승을 거부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태양 아래”(1,3.9) 사는 인간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지상에서 인간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실상 이미 창조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왔다는 것이다.

 

코헬렛은 인간 역사 안에서 새로움이란 찾아 볼 수 없다(1,9-10)는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망각이 그것을 새롭게 보이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옛날을 기억하지 않듯이 장차 일어날 일고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1,11). 순환하고 반복하는 역사가 인간의 망각 때문에 새롭게 느껴질 뿐이라는 말이다. 망각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옛 사람의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더 나은 모습이나 새로움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어떤 노력도 옛 사람의 일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코헬렛의 고백 (1:12-18)

 

설교자는 인생과 인간의 동경을 탐구하고, 그 헛됨을 증명한다. 재산과 지혜와 권세를 가진 솔로몬에 의장하여 온간 각도에서 인생을 경험한고 탐구한 결과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고 하는 결론에 이른다. 솔로몬의 인격을 빌어 자신의 수고의 헛됨을 고백한다.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고 애썼지만 구부러진 것은 똑바로 될 수 없고, 오히려 걱정과 근심이 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12-18절까지는 저마다 시적인 속담을 포함하고 있다.

 

“구부러진 것은 똑바로 될 수 없고” 는 저자가 당시의 격언을 그대로 쓴 것이다. “구부러진 것”이란 일반적으로는 본래 어리석은 자의 인생을 가리키며, 그의 구원이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곧 이 절은 인간생활에도 자연 안에도 구부러진 것과 결핍된 것이 있지만, 이것을 바로 잡을 힘도 보충할 힘도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바람을 붙잡는 일임을”이란 잡을 길 없는 헛되니 노력과 탐구를 의미한다. 끝으로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들기 때문이다”(1,16). 은 일반적인 속담으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도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식이 깊어질수록 불행도 깊어진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불완전성, 덧없음을 더 한층 깊이 깨달은 것에 있다.

 

 

나오면서

 

코헬렛이 태양 아래 순환과 반복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이 모든 허무는 지상 세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려 아무리 애쓴다 해도 매번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한계를 설정해 주고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지혜로 도달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코헬렛은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인간은 파악할 수 없음을 보았다고 말했으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3,11)고 고백한다. 또한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과 달리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3,14) 고백한다.

 

결국 코헬렛이 말하는 ‘허무’는 하느님의 지혜와 그분의 섭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평가이다. 코헬렛은 하느님을 벗어난 모든 것, 그분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 스스로 지혜를 찾고 설공을 이루여는 인간 존재는 그 자체로 허무임을 깨달은 것이다. 코헬렛은 그러한 깨달음을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12,8)라는 말로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무’를 주장하는 그의 시선은 항상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고 모든 일을 영원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속의 자녀들이 말하는 인생무상과는 무관한 삶, 하느님 안에서 보람을 찾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을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 곧 돈, 지위, 성, 명예 등에 대한 관심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겸손과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 참고문헌: 구약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1813-1814.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 딸, 2007, pp.201-208.

              전도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249-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