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헬렛 (2, 1-26): 헛된 쾌락과 헛된 지혜
들어가면서
코헬렛 2장 1절에서 26절은 지혜를 가지고 한 실험과 그 결과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먼저 2장 1-12절은 인간의 노고가 가져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시험의 경험들을 나눈다. 설교자는 즐거움, 술, 물질적 부(건축사업, 종들과 가축 떼, 금과 은, 영토, 소리꾼들과 궁녀들) 등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지속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헛된 쾌락임을 발견한다.
2장 12-26절은 지혜의 헛됨에 대하여 나눈다. 코헬렛은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나은가? 을 질문하면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면 지혜롭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16절) 자문하며 지혜조차 헛됨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코헬렛은 22장 17-23절에서 결론으로 태양 아래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허무한 일임을 말한다.
그런 다음 코헬렛은 2장 24-26절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주어진 모든 것을 최대한 누리되 앞으로 닥쳐올 결과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은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내리는 선물이다. 죄인들에게는 앞에서 말한 운명을 겪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남에게 넘겨주게 될 재물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2장의 구성은 1절에 문제를 제기하고, 2-10절에서 쾌락의 경험을 서술하고, 11-26절에서 그 체험의 가치와 결과를 말하고 있다. 전반은, 행복은 웃는 것도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어리석은 행위 안에서 찾아볼 수 없고, 또 설교자의 위대한 업적 안에도 없음을 말한다. 후반은 허무라는 말을 가지고 일곱 문장으로 나누며 그 모든 쾌락의 헛됨을 나열한다.
Text 안에서
2,1-11: 헛된 쾌락
코헬렛은 이 세상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를 탐구하려고 쾌락주의에 흠뼉 젖어 본다. 그러나 결과는 그 모든 쾌락의 추구가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2,3).
지혜의 헛됨을 경험한(1,12-18) 설교자는 지금 쾌락을 경험하여 행복을 얻고자 한다. 여기서 저자는 솔로몬 왕에 대하여 씌어진 것을 자신의 일처럼 말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그러나 이 또한 허무라는 것이다. 코헬렛이 말하는 ‘웃음’ 이란 일반적인 즐거움이 아닌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너털 웃음을 의미한다. 코헬렛은 한정된 생애 동안 인생의 모든 경험을 해보리라 결심한다. 그래서 술과 어리석음을 경험하고 지혜의 가치를 보다 깊이 깨닫고자 한다(3절: 잠언 20,1; 23,29-35; 31-4-5).
4-6절은 솔로몬에 의하여 이루어 놓은 사업을 서술한다. 특히 “궁궐”에 대하여는 열왕기 상권 7장, 1-12절, 포도밭에 대하여는 역대기 상권 27장 27절, 아가 8장 11절, 정원과 공원에 대하여서는 아가 4장 13절을 참조할 수 있다. “못”은 지금도 베들레헴 남서쪽 4킬로미터 떨어진 에담에 “솔로몬의 못”이라고 부르는 못이 있으나 그것을 가리키기보다 왕실의 못(2열왕, 25; 느헤미야 2,14)으로 보는 편이 낫다. 또한 설교자가 큰 공사를 벌였다는 것은 사업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절에서는 돈으로 사들인 노예와 집에서 태어난 자식들로 주인께 신뢰받은 이가 온갖 일을 맡고 있었다는 표현의 의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없었던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설교자는 솔로몬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말한다(열왕기 상 4,7;21,9;28,10,14). 금과 은은 재화를 의미하며 그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의 세공품일 것이다. 남녀의 소리꾼들은 접객을 위하여 고용한 사람들(이사야5,12; 아모스 6,5), 궁녀들 등은 아마도 솔로몬의 하렘을 가리킨다(1열왕 11,1-3). 즉 사람들의 즐거움이 될 많은 첩을 손에 넣었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헬렛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고 일을 함으로써 얻은 온갖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한평생 지혜로 말미암아 인도 되었다(9절).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뿌리치지 않았고, 마음의 어떠한 즐거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노고에 대한 보람으로 즐거움을 얻은 것으로 노고의 몫이다(10절). 모든 위업과 애쓴 일의 노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일, 태양아래 아무 보람이 없다고 이야기 한다(11절). 그는 모든 것의 최고 목적을 쾌락에 두지 않는다. 코헬렛이 목적으로 삼은 것은 항상 “하느님”이다.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2, 12-26절: 헛된 지혜(실망스러운 결과)
임금의 뒤를 잊는 인간도 이미 선왕이 이룩한 것밖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혜와 우매를 비교해 보았을 때, 지혜는 빛과 같은 것이며, 어리석음은 암흑과 같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도적적인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눈이 있어도 언제나 암흑 속을 걷고 있다. 도덕적 지혜와 깨달음의 상징으로서 빛을 제시한다. 지혜로우면 제 앞이 보이고 바른 판단력에 이끌려서 나날의 생활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모두 같은 운명을 겪음을 보았는데, 무엇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는가? 하며 당시 격언을 인용하며 반문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허무이다(12-14절). 즉 지혜가 어리석은 자 보다 낫다고 인정하고 있으나, 운명 곧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써 양자는 같은 것이라고 역설한다(욥기 21, 26; 시편 49,10-11). 어리석은 이의 운명처럼 나또한 그것을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이는 영원히 기억된다.”(시편 112; 잠언 10,7)고 하는 개념을 부정한다. 그래서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고 고백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으로써 끝난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모든 활동은 단절된다. 인생의 일을 좋아하고, 태양 빛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즐거움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그럼에도 삶이 싫어졌다는 이야기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은 항상 위협을 받고 있으며, 생명을 잃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명에 대한 깊은 애착을 나타내고 있다(9,4 참조). 그래서 태양 아래 노고의 결실을 짜내며 애쓴 것을 그가 차지하게 되더라도 또한 허무라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 자기의 재산을 남기고 간다. 그것이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다. 그 후계자가 만일 어리석은 이라면 확실히 재산은 잃고 말 것이다. 이에 설교자의 실망을 한층 더 추가 시킨다. 이에 코헬렛은 태양아래 애쓴 그 모든 노고에 대하여 절망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 또한 허무이다.
코헬렛에 나오는 먹고, 마시고, 즐긴다는 동사는 그저 단지 물질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식탁에서의 음식은 사람과의 사귐의 자리이며, 그것은 영과 마음의 기쁨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세 가지 동사를 가지고 인간의 나날의 기쁨과 행복을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는 현실적인 진리를 말한다. 수고한 보람으로 얻은 행복의 기쁨이다(24절).
사람은 행복과 기쁨을 받기 위하여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느님께서 이것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의인과 지혜로운 이에게 선물로 주시고, 죄인에게는 불행을 주시어 그 수명조차 짧아진다는 것이다(욥기 27,14-17; 잠언 13,22; 28, 8). 그러나 설교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의 행복과 수명은 그 사람의 행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역설한다(집회1,10). 그래서 인간의 행복과 기쁨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고 말한다.
나오면서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하지만 코헬렛은 애쓰는 만큼 보람 있는 삶임을 일깨운다. 인간의 바람과 만족은 충족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마음을 쓰며 고심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바라고 그것을 싫어하였다고 해도, 또다시 새로운 바람과 만족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순환이 인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면 결국에는 ‘인간에게는 완전한 만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2,11).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직시한 코헬렛은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생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보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3,22). 그리고 인간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3,12-13).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섭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기쁨과 행복 그리고 지혜는 하느님에게 있고 오로지 그분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생에 주어지는 모든 쾌락과 지혜조차 헛된 허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있다.
※참고문헌: 구약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1815-1818.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 딸, 2007, pp.201-208.
전도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25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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