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코헬렛(11,1-10): 삶의 처세법인 현명과 절제

마리아 아나빔 2014. 3. 30. 17:01

 

 

코헬렛(11,1-10): 삶의 처세법인 현명과 절제

 

 

들어가면서

 

• 삶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을 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관대하고 부지런히 일하여라. (1-6)

• 인생에 어둠이 있을 것임을 무시하지 않되 최대한 오늘을 즐겨라. (7-8)

• 누릴 수 있을 때 네 청춘을 마음껏 누려라.

앞날의 걱정이 네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말라.(9-10)

 

 

TEXT 안에서

 

1-6: 불확실한 인생

 

설교자는 인간의 삶의 방법에 대하여 살아가기 위한 예측과 슬기로움(1-3절)의 필요성과 때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지 때문에(4-5절) 항상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절에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원문에 따르면 “네 빵을 물 위에다 놓아 보내라. 많은 날이 지난 뒤에도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에서 1) “물위에”를 해운업으로 보면 해운업에 투자하라는 학설, 2) “빵”의 뜻을 취하고 농업에 적용하여, 물기가 많은 땅(옥토)에 파종하면 풍작이 된다는 학설이다. 이 둘은 모두 다 넓은 의미로 ‘재산’, ‘자금’으로 이해한 것이다. 위험해서 어리석은 것 같지만 결국 이득을 가져와 지혜로운 사업으로 판명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3) 위에 말한 학설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면, 후에 그 보상을 받는다는 학설(신명 15,10; 시편 112,9; 잠언 19,17; 마태 10,42; 루카 18,9 참조) 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아랍 금언에는 ‘좋은 일을 하여라, 네 빵을 물에 던져라. 너는 언젠가 보상을 받으리라.’가 있다. 어느 입장에서 보거나 그런 실천에는 용기와 대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절에서 “일곱 또는 여덟 몫으로 나누어라.” 를 1절의 농사(빵)에 투자할 경우 선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곱 사람, 혹은 그보다 많은 사람에게 행하라. 그러면 재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당신을 도우리라는 뜻이다.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위험부담을 분산시키라는 것이다.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기 전에 취한 조처와 같다(창세 32, 7-8). “일곱과 여덟”은 크나큰 수를 의미하는 용법으로 특히, 지혜문학에 있어서는 수에 의한 이러한 점진법적 표현을 써서 큰 수를 나타내는 경우를 자주 본다(집회 38,17; 욥기 5,19; 잠언 6,18 참조).

 

3절에서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남아있다.” 는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이해하여 “남쪽으로든 북쪽으로든”으로 옮기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자연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거기에는 불변의 법칙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예로서 말하고 있다.

 

4절에서 “바람만 살피는 이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는 너무 타산적으로 생각하여 일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농사짓는 일에 있어서도 자연현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 파종시기도 수확기도 놓친다. 파종은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을비가 온 뒤(10-11월)와 겨울비(1-2월)사이에 하고 있으며, 수확은 과월절 전후와 오순절 동안에 하였다.

 

5절에서 “바람(숨결, 영)의 길을 네가 알 수 없고”는 격언으로 여겨지는 이 말은 본디 앞날의 불확실성에 너무 얽메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수행하라는 뜻을 지녔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코헬렛의 전체적 의미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임산부의 배 속에 든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듯이”는 수태와 태아의 발육이 신비인 것처럼 하느님 하시는 일도 신비스러우며, 아무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없다(시편 139, 13-18; 요한 3, 8 참조).

 

6절에서 “아침에 씨앗을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놀리지 마라.”는 “아침”은 청년기를 “저녁”은 노년기를 의미하고, 인간의 일생을 가리킨다는 주장보다는 농부의 하루하루의 생활을 묘사하며, 아침도 저녁도 항상 자연현상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고(4절) 씨를 뿌리라고 주장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 따라서 수확의 다소는 하느님께 맡기는 길밖에 없다.

 

 

7-10: 젊음을 즐겨라

 

이제부터 하는 설교자의 말은 장수에 관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덕의 보상은 장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자는 이에 찬성하지 않는다. 늙는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이며 젊음에 대한 애석함이다. 그러므로 그저 죽음을 기다리라고 한다.

 

7절에서 “정녕 빛은 달콤한 것” 빛과 태양은 같은 뜻의 말이지만, 원인과 결과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빛과 태양은 사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잠언 5, 30; 바룩 3, 20). “태양을 봄”은 살아 있음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시편 58, 9). 그리고 빛과 태양은 삶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욥기 18,5; 이사 30, 26).

 

8절에서 “어둠의 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둠의 날이 많은 것”이란 노인의 나날도 아니고 앓는 나날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그들의 나날의 길이를 예언할 수 없다. 이 기나 긴 나날은 죽음과 사후의 어둠 속에서 사는 어둠의 나날을 가리킨다(욥기 10, 20-21, 시편 88,13 참조).

 

9절에서 “젊은이야 ...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에서 설교자를 쾌락주의라 할 수 없고(이사 22,13; 지혜 2, 6-9; 1코린 15, 32 참조), 젊은 세대에게 청춘을 즐기라고 권하지만, 만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심판 앞에(욥기 14, 3 참조) 설 것을 잊지 말라고 타이르고 있다. 또한 저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이 책 끝(12,14)에서 강조하고 있다. 즉 괘락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방종과 비윤리로 흐르기 쉬운 일종의 에피큐리즘을(지혜 2, 6-9; 이사 11, 13; 1코린 15,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셈을 바쳐야 함을 잊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즐기라고 젊은이들에게 권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이 책의 “발문” 끝에 다시 되풀이 된다.

 

10절에서 :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버려라.” 는 생애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는 온갖 고통을 제거하라고 설교자는 말한다.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로서, ‘머리칼의 검음’ 또는 ‘여명’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 경우 다 청준시절을 가리킨다.

 

 

 

※ 참고문헌: 구약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1839-1841.

              시서와 지혜서, 성서와 함께, 영원한 도움 성서 연구소, 1981, p.149.

              전도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301-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