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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삶

마리아 아나빔 2014. 8. 21. 16:16

 

 

 

 

                       죽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삶

 

                                                      - 마리아 아나빔 -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인간(에누쉬)’은 나약하고 덧없이 죽어야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흙으로 빚어진 나약한 존재로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덧없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시고 생각해 주신다고 말한다(시편 8편 참조).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덧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인 인간을 생각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 무한히 크신 존재께서 무한히 작은 존재를 생각해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이 있고 인간의 위대함(인간을 한 순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함)이 있음을 피력한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다. 이 인격의 특징에는 자존성(존재론적), 의식(심리적), 통교(대화론적)에 자기초월을 가진다. 따라서 인격을 지닌 인간은 존재의 자율, 자기의식, 통교,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가진 한 자존적 존재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죽음의 신비 앞에 놓여진 존재이다. 죽음은 인간 각자가 스스로 떠맡아야 할 극적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의학적인 죽음이란 신체에 본질적인 모든 기능의 중단을 야기하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를 초래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절대적인 분리현상이다. 즉 인간의 정신적 차원인 영혼의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과 천사가 아닌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성질이다. 인간의 절대적 죽음은 영원한 삶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또 이것은 죽음의 신비와 직면해 있다.

“부르심이 들려오면 여러분이 하던 일을 접고 가야합니다. 간혹 부르심은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응답하기 가장 어려운 형편의 때에 찾아옵니다. 하지만 부르심이 찾아오면, 그때가 언제이든 반드시 여러분은 가야합니다.” -조나단 다니엘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음은 우리가 부름 받아 향해 가는 영적여정의 필수 경유지이다. 또 죽음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고, 우리가 순명해야 할 명령이다. “마치 성령께서 내 목덜미를 잡아 나를 낚아채신 듯...” 우리는 죽음에 수반된 슬픔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하나의 엄연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확히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 뒤에서 불어오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바람타고 비상할 것이다. 이 죽음은 희망을 견지한 죽음이며, 그 다음 다가올 우리의 존재는 죽기 전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죽음의 독침이 분명 쓰라린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결코 죽음은 최후의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솟아나라, 봄이여. 솟아나라 영생의 나무에서! - 카릴 하우슬랜더 -

 

 

 

 

I. 일반적인 인간학

 

인간을 특징짓는 독특한 유형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삶(성찰)에서 다른 존재들과 명백히 구별된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삶은 그것이 도달한 정신적 수준과 그것이 성취한 사회적 차원에 의해서 동물의 삶으로부터 구별된다. 나아가서 인간의 삶은, 그가 삶에 대해 취하는 새로운 태도(창조성)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삶은 고도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한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언제나 영원한 것과 초월적인 것을 지향한다. 인간의 삶은 그 모든 풍요함과 다양함이 모두 고려될 때에만 비로소 인간 자신의 존재를 이해되도록 한다.

 

 

1. 생명을 지닌 인간의 삶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인간만큼 삶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특히 생명은 인간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생명은 그 자신의 존재를 위기에 빠뜨림 없이는, 즉 파괴함이 없이는 중단될 수 없는 그러한 활동이다.

 

과학적 입장에서 생명은 물질의 특수한 조직 현상이다. 살아 있는 물질의 분자들은 그 99%가 탄소, 수소, 질소와 같은 네 가지 기본 요소들에 속하는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원자들의 결합의 결과로 각각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핵산이라고 불리는 유기적 구성물들이 생겨난다. 이것들 각각은 생명적 사이클의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매우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다. DNA와 유전 인자는 생물의 여러 종들 간에, 나아가서 생물과 무생물간에 명확한 구별을 지어 준다. 그러나 과학은 단지 생명 현상이 물질세계에 나타날 수 있기 위해 어떤 물질적 조건들이 필요한지를 확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생명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요컨대 과학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알 수도 없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이 바로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오늘날의 생물학은 생명의 구성 요소만을 주제로 삼으면서, 생명체 다양성과 복잡성의 문제는 손도 못 댄 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따라서 생명 자체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적 문제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그 가치상으로는 절대적이지만 그 현실적 존재상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 가치는 근원적 절대성이 아닌 파생적 절대성이다. 인간의 절대성 배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절대성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신적 절대성이 존재한다. 인간 가치의 배후에는, 그의 존재론적 ․ 가치론적 절대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치론적인 것이지만 또한 미래의 삶에 있어서 존재론적 절대성을 준비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수여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그러한 절대성을 인간에게 부여해주는 신적 가치가 존재한다.

 

 

2. 죽음

 

죽음과 불멸은 종종 명백하고 정확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죽음의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의학적인(“살아있는 유기체에 있어서 생명 과정의 중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영혼이 육체로부터의 분리”) 이다. 의학적 죽음은 인간에 있어서 신체에 본질적인 모든 기능의 중단을 말하며, 반드시 영혼의 육체로부터의 분리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절대적 죽음은 영혼의 육체로부터의 절대적인 분리 현상이다. 불멸은 인간의 정신적 차원인 영혼의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죽음은 각자가 떠맡아야 할 극적사건이며 대치될 수가 없다. 모두가 죽음에 굴복한다(보편성). 죽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 그것이 도래할 시각을 미리 예정해 두었다. 죽음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불가피성). 죽음은 언제나 현존하는 가능성으로서 끊임없이 삶과 함께 있고 삶을 위협한다(절박성).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어떤 탄언도, 어떤 주문(呪文)도 소용이 없다(냉혹성). 죽음은 인간에게 공포, 혐오, 고뇌를 일으킨다(두려움). 따라서 존재의 중단으로서의 죽음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자체의 가능성, 즉 각기 제한된 방식으로 존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 죽음은 인간에게 생물학적 필연성이다. 또한 인간의 죽음도 인간이하의 다른 존재들과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이들 다른 존재들에 있어서 죽음은 저절로 일어나는 기계적인 생물학적 사건일 뿐이다. 동물들은 죽되, 그것을 예견하거나 연구하거나 그것에 대비하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죽음을 의식한다.

 

 

3. 죽음 뒤의 삶

 

인간은 죽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죽음은 인간학적으로 정신과 인격의 영역 안에서 자기의식, 자기초월, 자유, 정신성, 자존성 등이 주어져 있는 한 존재에 관련된 사건이다.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끊임없는 점진적인 죽음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격적 실존이 영생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일체 신뢰 가능성을 박탈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연구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또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죽음 뒤의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해서 자문하게 된다. 파스칼은 “죽음을 외면하기에는 우리 양식 자체를 완전히 상실해 버려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불멸이란 생명의 영속성, 죽음의 결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불멸성은 죽지 않고 언제나 사는 어떤 능력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 차원인 영혼의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신과 천사가 아닌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성질이다.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 연구가 행해지기 훨씬 전부터 인간이 직면했던 것이다. 그 해답은 직관과 상상에 근거한 지식인 일상적 지식을 사용해서 내려졌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육체의 사후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입증하는 많은 논거들을 수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지성적 활동 안에서 정신성의 징표를 발견한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에 관한, 즉 죽음이 인간 전체의 종말을 의미 하는가 또는 그렇지 않는가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실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도 역시 지성적 지식 안에서 정신성의 징표를 발견하였고, 이것을 영혼 불멸을 증명해 주는 논거로 삼았다.

 

영혼의 영적 본성을 당연시했던 데카르트는 영혼 불멸을 부정하는 설득력 있는 논증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칸트와 더불어 사변적 이성은 형이상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버린다. 즉 사변적 이성은 현상의 세계에만 국한되어야 하고, 따라서 현상의 심원한 의의나 그 궁극적인 의미에 관한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실천 이성의 입장에서 도덕의 필수적인 요청으로서 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실천 이성은 인간에게 그의 의지를 도덕법과 일치하도록, 즉 덕행의 길을 가도록 가르쳐 준다. 이리하여 칸트 이전에는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영혼 불멸을 긍정하였지만 칸트 이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영혼 불멸을 영원토록 살려는 욕망의 투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에 고유한 본능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즉 차라투스트라의 저자에게는 죽음이란 인간 자유의 최고의 가능성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최고의 표현이다. 20세기에 죽음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었던 거의 모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즉 고전적 형이상학의 논증에 의해서는 죽음이 영혼을 파멸시키지 않고 다만 육신만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의 의미에 관해서 20세기의 사상가들은 두 가지의 서로 대립된 경향으로 구분되는데, 그 중 하나는 허무주의적 경향으로써 죽음을 인간 즉 그의 심신의 전체적 존재의 전체적 종말로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비허무주의적 경향으로서 죽음을 그처럼 인간의 전체적 종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역사적 개관으로부터, 죽음의 드라마에 관해 제출되어 왔고 또 언제나 제출될 수 있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귀착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1) 완전한 소멸. 이것은 매우 편한 이론적 해결책이다. 그것은 사실적 자료 자체가 죽음의 사건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의 의미를 깊이 천착하지 않는다. 2) 카르마에 의한 부분적 재생. 카르마는 인간 인격이 수행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전우주적 삶에 남기는 흔적이다. 3) 환생에 의한 재생. 이것은 경험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해결책이다. 4) 영혼 불멸로서의 재생. 영혼 불멸을 통해서 인격이 향유하는 그 절대적 가치는 확고하게 보장된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의 절대성은 당연히 사후의 존속을 요구하게 된다.

 

 

 

II.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에서 종말에 대하여 말할 때,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즉 죽음, 부활, 연옥, 영원한 생명과 같은 개인의 운명과 관련지어 ‘종말’을 일컫기도 하고, 주님의 날, 세상의 종말, 심판,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역사의 운명과 연관된다. 종말에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은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 기회는 단 한번이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진다. 셋째, 미리 징조가 있다. 기상이변, 전쟁, 거짓 예언자들의 득세 인간 생명의 파괴, 인간의 타락 등으로 자연적 사회적 혼란의 징조를 보고 종말을 예감할 수 있다. 넷째, 종국에는 악마가 영원히 제압된다. 종말에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가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현재의 고난, 실패, 역경, 패배를 극복하는 큰 힘이다. 다섯째, 의인, 악인으로 갈려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삶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이다.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끝인 인간적 종말에 관련해서 나누고자 한다.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교는 세말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고 확신한다(사도신경: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영원히 사시는 것과 같이, 의인들도 죽은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육신'이라는 용어는 연약하고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사람(adam)을 가리킨다. ‘육신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 불멸하는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로마 8,11)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죽은 다음에 우리의 ‘몸’이 부활한다는 믿음이다. 죽은 다음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영육 통일체가 부활’하게 된다는 교리이다. 영혼 통일체란 인격 전체 곧 이 세상에서 살았던 ‘아무개’의 고유성과 특성 전체를 말한다.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이 세상에서의 ’인간성‘ 전체 그대로 저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영혼만 분리되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통째로’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은 다음이 시체는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몸’의 양식이다. 저 세상은 3차원보다 훨씬 고차원의 세계이다. 저 세상이 몇 차원인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물리학계에서 파악된 차원은 11차원이다. 여하튼 인간은 저 미지의 차원으로 가면서 이미 ‘새로운 육신’을 입는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썩을 몸이 ‘불멸의 옷’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도 ‘몸’이 소멸되지 않고 ‘육체적인 몸’(3차원 공간의 몸)이 ‘씨앗’처럼 죽어서 ‘영적인 몸’(부활한 자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한다. 마치 씨앗이 죽어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하듯이 ‘육체적 몸’이 죽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당신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한다. 죽은 자의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 전체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내적 결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그 후손과 맺으신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분이다. 마카베오 가문의 순교자들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한다(2 마카 7,9). 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2 마카 7,14).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주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희망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마르 12, 24). 부활신앙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이신 분께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한 신앙을 당신 자신과 연 짓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 25).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살리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몇몇 죽음 사람들에게 생명을 돌려주심으로써 부활에 대한 징표를 주시고, 이로써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은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이 독특한 사건을 요나의 기적 성전의 표징과 같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곧, 당신이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흗날에 부활하리라고 예고한다.

 

사도행전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부활의 증인”(사도 1,22)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사도 10, 41)하고 증언한다.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으로써 아주 분명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

 

‘부활’이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 부활은 “마지막 날에”(요한 6, 39)세상 끝 날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1테살 4,16).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으로, 예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우리 육신을 우리 영혼에 결합시킴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주실 것이다.

 

이때 죽은 이들은 부활할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 5, 29). 부활의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듯이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는 우리의 상상과 이해력을 뛰어 넘는 것으로, 신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육신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앞당겨 맛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금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 생명에 이미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믿는 이들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품위에 참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시 자신의 육신을 소중히 여겨야 함은 물론 다른 사람의 육신도, 특히 고통당하고 있을 때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의 죽음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 어떤 의미에서 육체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다. 반면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의 ‘죄의 대가’이다.(로마 6,23). 그리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은 주님의 죽음에 들어가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죽음은 지상생활의 마침이다.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 계산되며,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늙어가므로, 지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생명의 정상적인 끝마침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우리의 삶에 긴박감을 준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삶을 실현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아직 젊었을 때 너를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코헬렛 12, 1.7). 교회의 성경과 성전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본다. 죽음은 사람의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친다. 비록 인간이 죽을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도록 정하셨다. 따라서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물리칠 원수(1코린 15,26)이다.

 

그러나 이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변화시켰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의 인간 조건인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도,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유로이 순명함으로 죽음을 축복으로 변화시켰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리 1,21).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2 티모 2,11).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미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중에 죽으면 육체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성취하고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구속행위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된다.

 

하느님은 죽음을 통하여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신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필리 1,23)고 말한 바오로의 바람을 체험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성부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이 시간의 끝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상생활이 끝난 다음 인간은 또 다른 지상 생활을 위해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되며 죽음 뒤에 환생이란 없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한 삶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시간인 인생에 끝을 맺는다. 신약성경은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 하지만, 각자가 죽은 뒤 곧 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셈바치는(사랑에 대하여) 사심판으로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 이러한 댓가는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

 

사심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 앞에 설 때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말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 10). 각 사람은 죽자마자 사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로마서 2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 가지 기준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1) 양심: 이는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된다.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줍니다.”(로마 2,14-15).

2) 율법: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사람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사람들은 누구나 율법에 다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2,12).

3) 믿음: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 21-22)

양심이란 기준은 주관적이고 그 기준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율법이란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다. 그러나 율법으로 ‘의인’ 인정을 받는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믿음’이라는 기준은 ‘양심’과 ‘율법’이라는 기준보다 수월하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Good news)인 것이다. ‘믿음’을 버리고 ‘율법’이나 ‘양심’의 기준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하고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공심판(최후의 심판)

 

공심판은 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포함한 온 인류가 받게 되는 ‘최후의 심판’이다. “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잇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 28-29).

 

최후의 심판에 앞서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사도 24,15)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마태 25장).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선인과 악인을 갈라놓는 이 공심판을 통해서 실현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정의를 실천에 옮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결정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아버지만이 그 시간과 날짜를 알고 계시며, 그분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결정하신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자비의 때에, 구원의 날에”(1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이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당신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경탄을 받으실”(2테살 1,10)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디도 2,13)을 알리는 것이다.

 

 

천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참 모습을(1요한 3,2) “얼굴을 맞대고”(1코린 13,12)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된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 완전한 삶,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 천국은 성된 형태의 사랑이며 통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곳이 이미 천국은 시작되었다.

 

천국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의 복된 공동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된 친교의 신비는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다. 이처럼 천상 영광 안에서 하느님을 뵙는 것을 교회는 ‘지복직관’이라 부른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계속 수행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묵시 22,5).

 

 

마지막 정화(연옥)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음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 전혀 다르다.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심판하기 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죄는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피렌체와 트리엔트 공의회 확정).

 

만일 ‘천국’과 ‘지옥’ 밖에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의인 아니면 악인으로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전사자들은 안타깝게도 ‘반쪽의 의인’들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반쪽 의인’인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의 단계를 연옥이라 보았다. ‘갇혀있는 영혼들’(1베드 3,19)은 지옥도 천국에 있는 영혼들도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넓게 봤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이다. 이것은 개신교에서 천국과 지옥만 있다고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죽음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2마카 12, 45).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렸다.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한다.

 

 

지옥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결합될 수 없다. 또 우리가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중한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옥’이란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님은 믿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지옥’( Gehenna)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곳에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마태 25,41).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한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런 지옥은 존재할까”, “그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취한다.

 

지옥은 “영원한 불”이 활활타거나 사람들을 질식시키는 그런 장소(locus)가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처하는 고통의 상태(status)를 말한다는 것이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기를 고집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고통이며 심판이라는 것이다. 지옥이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이미 이 세상에서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야한 할 때 ‘맛보기’로 치르게 된다.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초래하는 고통이다. 선택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도 있다.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의 뜻을 사는 이, 이웃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배척한다면 그 삶에 ‘이미’ 지옥이 전개되고 있다. 남을 바라볼 줄 모르고 영원히 자기 자신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그래서 흔히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고들 한다.

 

이렇게 볼 때, 지옥에 대한 성경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다.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하느님은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예정하지 않으신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2 베드 3,9).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천국을 살 수 있다. 나눔의 삶 속에서 천국을 만난다. 나누고 베푸는 삶은 하늘나라에 나 자신의 꽃밭을 일구는 삶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공심판 후에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이다. 인류와 세상을 변화시킬 이 신비로운 새로움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부른다(2베드 3,13).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에폐 1,10) 하느님의 계획의 결정적 실현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가운데 거쳐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인간에게 이 완성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류 일치의 궁극적 실현이 될 것이며 순례 중인 교회는 바로 이 일치의 성사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구원된 사람들의 공동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묵시 21,2),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묵시 21,9)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는 지상의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죄와 더러움과 이기주의로 생겨나는 상처를 더 이상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시적인 우주도 변화되고, 세상 자체도 그 최초의 상태로 복원되어 아무 장애 없이 의인들에게 봉사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들이 누릴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 우주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바라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들이는 새로운 집과 생복은 인간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도 넘칠 것이다. 그러나 새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가꾸러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 땅에는 이미 새로운 세계의 어떤 밑그림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저 새로운 인류 가족의 몸이 자라고 있다. 따라서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진보가 인간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돌려 드릴 것이다.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1코린 15,28).

 

 

 

 

III. 신과학 개념

 

 

1. 우주이야기 안에서 죽음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현대의 온갖 기술과 노력으로 오는 것을 막거나 되돌리려 해도 우리는 각자 정해진 때에 죽음을 만나야 한다. 우주에서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아주 불편해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사소한 죽음도 잘 다루지 못한다. 사소한 죽음들이 사실 인격을 형성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도 말이다. 이는 ‘우리’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고 사는데서 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체 상황에 대한 큰 그림을 잃어버리면 사소한 것을 움켜잡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아주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에 대해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은 독특한 의식과 자유를 가지고 삶/죽음을 만나는 순간이다. 죽음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리고 죽음의 그날까지 어떤 의식으로 얼마나 자유로울 것이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죽음은 삶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우리를 소멸로 끌어당기는 죽음 덕분에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역량도 커진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무기력에서 빠져나와 우리가 가진 갈망에 불을 붙여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을 책임지려 한다. 우리는 목덜미에 죽음의 숨결을 느낄 때 도리어 새로운 원기로 생명을 들이마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창조적 성령의 동반자이다. 두려움이 저 멀리로 물러나 가라앉은 조용한 순간에 우리는 창조와 파괴가, 삶과 죽음이, 두려움과 갈망이 신비 안에서 모두 뒤얽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강렬한 힘에 압도당할 것 같지만 그 신비는 겨우 머리카락 한 올처럼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죽음에서 도망치는 것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끊임없이 발전을 계속해 온 우주의 일부였고, 우리는 초신성의 이미지에서 인류가 그토록 어려워하는 죽음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다. 초신성은 별이 죽으면서 폭발하는 현상이다. 허블우주망원경으로 찍은 초신성의 모습은, 그것이 사실은 죽음과 파괴의 현장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릴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 신비의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아이콘 초신성은 소멸과 탄생의 현장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별들에게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얼마나 창조력이 생겨났든 별에게는 죽을지 말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음은 과정의 일부이다. 사실 죽음은 모든 과정의 일부이고,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죽을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서 배우게 되는 중요한 점은,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고 은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셨음을 안다. 그분의 죽음을 그토록 품위 있게 맞을 수 있음도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죽고 또 죽는 연습을 되풀이하시며,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작음 죽음들을 기꺼이 맞이하셨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작음 죽음들을 맞이할 때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평생에 걸쳐 그런 선택을 한 삶은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영성적인 힘으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의식과 자유를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죽음에 참여하셨다. 그 결과로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꿈을 바꿔 놓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는 하지만 마지막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부활은 예외없이 언제나, 늘 있기 마련이다. 우주이야기 안에서 부활이란 의식의 변환, 즉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에서 삶을 살아 내는 초월의 체험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의식의 진화를 계속하며 점점 더 큰 사랑의 존재로 성장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빛 속을 걷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한 빛이 된다. 두려움과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겠다는 선택 후에 오는 작은 부활에도 성령은 강림하신다.

 

삶과 죽음의 신비는 하나이다. 이것이 파스카 신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실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올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죽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어느 정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 죽음 한가운데서도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우리 삶 속으로 흘러드는지 깨어서 지켜보자고 선택할 수 있다. 생명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모두 폭발로 흩어져 버리는 초신성처럼, 우리는 초월할 수 있고 또 죽음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IV. 연습이 필요한 죽음

 

인간이 해야 할 마지막 영적 도전은 죽는 연습이다. 죽음은 비단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늘 삶 속에 있다. 칼 라너는 “행하는 모든 것에 내재한 죽음” 대해 이야기 한다. 이는 인간사에서 시간이 갈수록 죽음의 요소가 점점 쌓여가는 구체적 과정을 뜻한다. 또한 행하는 모든 것에 내재한 죽음이란 결함, 질병, 실망의 체험에서 한 조각 죽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는 질병의 경험은 죽음의 현존으로 보았다.

 

 

1. 십자가 사랑 연습

 

죽는 연습이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된다고 본다. 즉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십자가 사랑을 연습하는 일이다. 삶은 죽음의 나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을 연습해야 한다. 노쇠 현상과 삶에 죽음이 현존한다는 사실에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죽는 연습을 할 수 있다. 분의 십자가에서 나는 내가 늙어 간다는 사실, 점점 커지는 고독, 또래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칼 라너는 나에게 요구되는 죽음을 연습하고 죽음을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랑이 바로 열쇠라고 본다.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 변화 시키는 것이다.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헌신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죽음의 사랑의 완성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음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다. 죽음은 어떤 저의 때문에 흐려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 헌신의 행위이다.

 

죽음의 준비는 인간 안고 있는 과제이다. 음을 자기 인생을 완성시키며 하느님의 영원 가운데서 새롭게 피어나게 해 주는 의미심장한 목표로 여기는 사람만이 평정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활기차게 산다. 목표를 염두 해 두고 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선사된 불사에 대한 믿음은 실제로 심리학에서도 영혼의 치료제다. 영혼은 죽음을 준비하고,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목표로 대할 때 건강하다. 제대로 산 사람이 잘 죽을 수 있다. 성경 안에서도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린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창세기의 이들에는 죽음은 나보다 먼저 살았던 모든 사람과의 연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죽음에 반항하지 않는다. 감사하며 삶을 되돌아본다. 죽음으로 선조들과 하나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2. 좋은 임종을 위한 준비

 

중세는 나름의 ‘죽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기술의 핵심은 좋은 임종을 위한 준비다. 좋은 임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 준비는 가끔 불안을 일으킨다. 그러나 거듭 죽음을 상기하고 마지막 발걸음을 잘 내딛게 해 달라고 청하는 의미가 있다. 좋은 임종을 위한 기도의 핵심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고 그 단계에서 의미를 찾는 데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는 죽음이 되기 위한 연습, 다른 사람들이 우리 죽음에 힘입어 살기 위한 연습이다.

 

 

3. 새로운 시작과 연대

 

죽음 앞에선 인간은 현세의 삶에 대한 용기와 영생에 대한 희망 사이의 기이하고 유일무이한 긴장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살아 있음으로 살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이곳의 삶의 빛은 확실히 점점 더 흐려지고 낮아지며 불안하게 떨리곤 한다. 삶의 기력이 감퇴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담담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살고 있다. 그러니 여생을 정말로 살고 또 가득 채우고 싶어 해야 한다(Rahner).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모든 인간과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죽으면서 우리는 인류 가족과 하나가 된다. 죽음이 어떤 것보다 우리를 강하게 다른 사람들과 연대감으로 이끌고 합일 시킨다. 죽음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기쁨을 열어 준다. 삶의 최후로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약속이 된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죽으면 다 땅으로 돌아가지요.”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우리와 친숙한 사람들과의 일치 가운데서 죽는 일이며 그들을 위해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복음서들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신앙 가운데 견뎌내면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잘 죽는 길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 죽을 때 열린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감을 주저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게 된다. 죽음에 있어서 가장 좋은 연습은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 살면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나오면서

 

죽음은 우주의 기본 틀 안에 짜여 있으며 삶이라는 신비에 떼어 낼 수없는 부분이다. 한 걸음 물러나서 크게 바라보면 우리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삶과 죽음은 창조력과 연결되어 삶을 움직이는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한다. 당연이 이때 두려움이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지배할 여지는 없다. 두려움을 느낄 대가 분명히 있겠지만 두려움에 지배당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식과 내용이 통제당하거나 힘을 소진할 필요는 없다. 관상하는 삶을 살며 자유를 포용하고 의식을 확장시킬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한없이 경이롭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죽음과 죽어 감에 참여하며 두려움에 응답할 수 있다. 죽음이 일어나는 매순간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성령께서 움직이는 순간마다 부활이 있다. 그리고 생명도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모두 자신의 ‘마지막 때’를 생각한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진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역시 ‘언젠가는’ 나이 들고 머지않아 죽는다. 머지않아 자신에게 다가올 노후의 일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천국이 되었건, 연옥이 되었건 종말은 우리에게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형태를 훌훌 떨어 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는 모습 속에 미래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한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된다. 오늘을 천국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된다. 그리고 아무로 하느님이 자비로운 사랑 안에서 제외될 수 없다.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아야겠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이 우주만물과 더불어

비롯함도 마침도 없는 님의

그 신령한 힘으로 태어났다.

이제 이 지구란 별에 와서

육신이란 옷을 걸치게 되었지만

마침내 우리는 또다시 그 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님의 품, 우리의 그 본향이

광대무변한 이 우주 안에 있는지

아니 그것도 넘고 넘어서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저렇듯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

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

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리 실패와 좌절의 수렁 속에서도

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굳게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 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

사람의 징표로 은혜롭게 심어주신

양심의 소리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

-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중에서 / 구상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