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 '평범함 속의 숭고'
19세기 유럽 사회는 과학과 산업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고, 이러한 급속한 변화에 민감한 화가들은 증기의 사용과 광학 등의 현대 문물에 대해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인상주의, 고전주의적인 전통적 가치를 준수하면서 '순수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사실주의, 그리고 자연주의 등의 큰 갈래로 나뉘게 된다. 특히 1840년에서 1880년 까지 프랑스에서 발달한 사실주의는 미술계 뿐 아니라 예술 분야 전반을 포괄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18세기 스위스 태생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주장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에 뿌리박고 있다. 그는 "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부터 자연스레 증명된다" 주장했으며,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회귀'하는 길은 바로 '자연상태'로 돌아가는데 있다고 믿었다. 이 사상은 당대뿐 아니라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인간본성과 원초적 자연에 대한 동경 등 정치뿐 아니라 문학, 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40년 부터 유럽의 대도시로서의 인구 집중 현상은 대규모의 빈민을 초래하면서 빈부차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하였다. 정치에서는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그리고 미술에서는 오노레도미에와 같은 삽화가가 정치, 사회 풍자적인 캐리커쳐를 담아내고, 장프랑수아 밀레는 화려한 대도시 파리에서 벗어나 작은 시골 마을인 바르비종에 정착해 살면서 시골릐 농부, 빈민층의 모습을 소박하게 진솔하게 화폭에 담아내며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평범함 속의 숭고'를 찾아 화폭에 담은 밀레는 거의 평생을 이곳 바르비종을 떠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평화로운 시골의 대자연 속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무수한 화가 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로비종 학파'의 화가들로써 파리근교 퐁텐블로 숲 주변에 있는 마을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수 많은 화가들이 이곳에 살명서 작업하였다.
밀레는 1814년 셰르부르 근처 그뤼쉬의 부유한 농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명문 미술대학인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 캐리커쳐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와, 후에 같이 바르비종 화파를 형성하여 활동한 테오도르 루소와 친분을 맺고 활동하다가 1849년 바르비종에 정착하여 자연속에서 소소하고 평화로운 전원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거의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소박한 농부들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았지만, 그는 대단한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성경이나 인문주의는 물론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셰익스피어, 존 밀턴, 사토브리앙, 빅토르 위고등 당 대 작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
1850년 살롱전에 입선한 작품 '씨뿌리는 남자'에서는 '무너질 듯 경사진 언덕'을 힘찬 발걸음으로 내딛는 강인한 의지의 충실한 농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념비적인 웅장미가 느껴지는 이 그림의 배경은 그가 살던 바르비종이 아니라 고향의 그레빌의 둔덕이고, 여기 씨 뿌리는 남자는 바로 밀레 자신의 모습이다. 동이트는 아침인지 황혼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보랏빛 하늘 아래 투박한 모자 밑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과묵한 얼굴에서는 종교적인 진지함마저 느껴진다.
당대의 작가 이자 고전주의 옹호자인 테오필 고티에는 이 작품에 대해 " 이 남자의 거친 동작 속에는 웅장함과 기품이 서려있다. 남루하지만 긍지에 차 보이는 이 인물은 마치 자신이 씨 뿌리는 그 땅의 흙으로 칠해진 듯 보인다."라고 묘사하였으며, 또 다른 비평가는 "빠른 산업화로 메말라가며 믿음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생명의 원천이 되는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 반영되었다."고 보았다. 이 작품은 "씨 뿌린 만큼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와 성경의 비유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숭고한 노동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1848년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프랑스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래서 이 그림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의 진정한 의도는 인간과 땅의 영원한 결합으로,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있었다.
'살아 꿈틀거리는 붓터치의 '해바라기'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밀레의 작품과 그가 내포하는 깊은 종교 정신을 깊이 존경하였고 이를 본받으려고 그의 많은 작품들을 모사하였다.
1863년 살롱전에 전시된 '괭이를 든 남자'는 끝없이 거대한 대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열심히 괭이질을 하던 남자가 잠시 괭이에 지친 몸을 싣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인간 삶의 고된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어 깊은 감동을 주는데, 당시 고전주의적으로 미화된 그림에 익숙했던 비평가들을 격분시켰다. 그 어떤 미적 포장 없이 삶에 찌든 남자의 추한 얼굴에 배어있는 고통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진실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양치기 소녀'에서는 무한대로 펼쳐진 평화로운 들판 한 가운데 순박한 소녀가 서 있다.
바로 대 자연 앞에 서 있는 겸허한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 일상적인 단순함, 아니 이 가난 속에서 대자연의 기념비적인 무게와 위엄이 느껴지고
구름 뒤에 모습을 감춘 해는 구름 사이로 햇살을 비추며 대 자연의 모든 사물을 고루 비루어준다.
고요하고 평온한 침묵이 흐르는 전원에서는 하느님의 넓디넓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이 대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고독하지만 아름답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
이 작품을 본 오스트리아 낭만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 한 그루의 나무처럼 목자가 있다. 바르비종의 광야 속에서 단 혼자 서있는 것이다."
- 경향잡지, 2010(9),자연을 사랑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박혜원, P.55-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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