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외 모든 것들은 생태적이지만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생태적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할 수 있다.
즉 생태에서 먼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를 다시 정의 한다면
파괴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4대강을 살리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니다.
참된 정의라 균형을 이루는 것인데 4대강 사업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정성의 문제들을 식별해야 한다.
생태는 물질과 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만나고 하나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을 뺀 몸이 있을 수없고, 육체가 없이 영으로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예로
배추벌레를 들 수 있다.
배추벌레에게 있어서 집(배추), 밥과 몸이 하나이다.
인간은 땅이 키워주는 것들을 우리가 먹고 산다.
우리 조상들이 묻힌 땅에서 우리는 먹고 자란다.
일본의 ‘마라나타’ 병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 라면 어떻게 했을까? 며
4대강을 할 때라도 충분한 영성을 동반해서 행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살려내는 방법으로...
따라서 이러한 생태를 살기위해서는 먼저 깨달으면 먼저 살아야 한다.
생태란 바닥이고 집이다.
Oikos = Eco = 생태
Oikos의 그리스말의 어원은 ‘집’, ‘거처’의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는 하느님의 집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 집을 잘 관리하라고 맡겼다.(창세기)
이것이 바로 가톨릭 영성의 시작이다.
그러기에 생태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
계속되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21C에 우리들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집(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집은 어떤 집에 사는가에 대한 것도 있지만
또한 누구에게 집이 되어 주는가? 동사적 의미로도 이해 할 수 있다.
집을 잃어버린 이 시대,
이 본당, 이 공동체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곳에서 할 일은
그 곳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구축하고 쇄신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가톨릭 생명에 충실하는 것이고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이란 화두를 가지고
Lectio Divina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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