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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타난 사막의 의미와 수도생활에 대한 고찰 VI

마리아 아나빔 2010. 8. 3. 13:30

 

Ⅴ. 오늘날의 수도삶

 

   

예언자(איבנ)라는 용어는 본래 성서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Seer) 이전에 그 시대와 환경에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의 의미가 본 뜻 이었다. 따라서 예언직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가운데 하나로써 복음을 전하고 증거(martyr)하는 직분을 의미한다. 이러한 증거의 삶은 순교자들의 복음 증거의 삶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대상과 결부되어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의 신앙의 증거를 의미하기도 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봉헌생활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봉헌생활 안에서 예언직을 강조하면 시대에 야합하게 되는 세속화의 위험이 강조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예언 직이야말로 봉헌생활의 본질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한다. 또한 봉헌 생활을 통한 예언직의 수행에 관해서 신학자들 별로 사회 참여에 다양한 기준이 제시되기도 한다. 즉, 육화론적 차원에서 시회 참여가 강조되거나, 종말론적 차원에서 현대의 인본주의를 대체할 신중심주의 형태로, 혹은 참회를 강조하는 형태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오늘날 봉헌생활은 많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이에 교회의 문헌은 예언직 증거라는 제호로 수도생활 안에서 복음적 권고를 기준으로 예언직을 증거할 방향을 상세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으며(vc.84-95), 예언직은 봉헌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증거행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의 봉헌생활이 현대사회가 직면한 부조리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시대의 예언적 징표로써 살아가게 되고, 그 그복은 여타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봉헌생활의 생명인 복음적 권고의 3대 서원을 실행함으로써 성취됨을 제시하고 있다.

 

5.1.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봉헌생활의 예언자적 증거

 

5.1.1. 봉헌 생활이 위기에 처한 현대 세계에 주는 의미

     현대 사회의 특징은 하느님이 없는 사회, 하느님 현존의 표징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멀어진 상황에 있다. 봉헌생활은 바로 이 상황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수도자들의 예언직이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 분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신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의 현존과 영원한 생명을 입증한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체를 통한 형제 생활, 복음 선포와 생활의 일치, 교도권과 규율의 완전한 조화를 통해 드러나며(vc.85), 특히 현대사회의 주요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성욕, 소유욕, 자유에의 욕구)의 절대화 앞에서, 창조물의 가치를 긍정하는 동시에, 하느님을 절대 선으로 가리킴으로써 창조물을 상대화하는 영성 생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게 드러낸다.

 

5.1.2. 봉헌생활이 직면하는 주요 도전들

    현대 사회의 특징에 따라 현대 수도 삶을 살아가는 봉헌된 이들이 직면한 주요 도전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봉헌생활의 기본 요건인 복음삼덕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5.1.2.1. 향락문화와 봉헌된 정결

    현대 사회의 첫째 도전인 향락문화는 성(性)을 모든 객관적 윤리규범과 분리시키고, 흔히 단순한 기분 전환이나 소비 상품으로 여기며, 사회홍보수단과 공모하여 성적 본능에 대한 일종의 우상숭배 현상이다. 그 결과 온갖 타락과 개인과 가정에 정신적, 윤리적 고통을 초래한다. 이것은 또한 수도삶에 대한 성소자들의 부재를 촉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봉헌생활의 응답은 완전한 정결을 기쁘게 사는 것이다.(vc.88) 즉, 성에 내재된 가치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죄악시 하는 태도, 기계적이고 냉혹한 중성적 태, ‘남성이나 여성과 담을 쌓았다.’는 식의 배타적 히스테리의 태도는 위험하다. 그러므로 성(性)과 성욕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앙의 증언, 혼인의 긍정까지 포함한 증언으로써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하게 되고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봉헌된 사람은 증언한다.

    수도삶 안에서 봉헌된 정결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께 도로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께로 가는 도구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사명이며,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써 기쁨과 자유의 체험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봉헌된 정결은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되어 하느님께로 갈림 없는 사랑을 드리는 것이 된다. 이 점에서 봉헌생활은 다른 생활 신분에도 부합하는 성교육, 정결교육의 임무를 수행한다.(vc.88)

 

5.1.2.2. 물질주의와 복음적 청빈

    현대사회의 둘째 도전은 소유를 탐하는 물질주의 도전이다. 이러한 탐욕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 자연 자원의 균형 문제 등을 초해한다. 이에 대한 봉헌생활의 응답은 복음적 청빈 서원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다. 특히 연대성과 애덕 증진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표현된다. (vc..89) 하지만 모든 활동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이기 이전에 복음적 청빈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참 행복의 첫째 정신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복음적 청빈의 근본적 의미는 인간의 진정한 부요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복음적 청빈은 금전에 대한 우상숭배에 강력히 도전한다. 균형감각과 사물에 대한 참뜻을 거의 잃어가고 있는 선진국의 여러 사회에 예언자적 호소를 하는 것이다.검소와 친절을 바탕으로 한 형제생활 속에 새롭고 힘차게 극기와 절제를 복음적으로 증언하고, 자기 이웃을 필요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물론 이 증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을 수반하며, 특히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생활조건에 동참하는 데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참 수도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주고, 칭송은커녕 이해도 받지 못하는 대의를 위하여 일생을 보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골로3,3,)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봉헌생활은 다양하고 상호보완적인 방법으로 주님께서 이끌어 안으신 철저한 청빈에 동참하며, 복음적 청빈은 최종적으로 구원의 신비인 그분을 강생과 죽음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는 삶이다.

 

5.1.2.3. 순명과 자유에 대한 도전

     현대 세계의 셋째 도전은 그릇된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의 증진은 인간 존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순수한 가치이다. 그러나 자유의 남용은 개인과 민족들이 당하는 불의와 폭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진리와 윤리규범과 가지는 본질적인 관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즉 진리의 절대성이 아니면, 자유는 상대주의 위험에 빠진다. 상대주의에 의할 때 진리 실천은 공허성을 지니고 결국 자신의 품위를 상실한다. 따라서 자유를 절대시 하는 임의적 태도, 혹은 민주라는 미명하에 주변 사람들의 동의나 단체의 분위기를 진리의 윗자리에 두지 않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잘못된 선량함은 유혹이고, 자유나 선은 오직 진리와 함께 할 때만 성공적이다.

     자유의 남용, 진리의 상대화에서 초래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봉헌생활의 응답은 순명이다. 이 순명은 단호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순명을 거듭 제시하며, 이 신비를 출발점으로 삼아 순명과 자유는 서로 모순 되지 않음을 증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명의 자세는 인간 자유의 신비가 성부의 뜻에 순명하는 길임을, 그리고 순명의 신비가 점진적으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봉헌된 사람들이 순명 서원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비로써, 순명을 통하여 자신이 성부의 자녀들이기에 그들은 그분의 뜻을 일용할 양식(요한4,34), 그들의 반석, 과 방패 및 요새로 삼는다. 그러므로 순명의 삶은 수도생활의 특징인 공동체적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상기한 현대 사회의 도전과 봉헌생활의 복음 삼덕은 결론적으로 건전하고 깊은 영성의 원천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영성생활에 대한 단호한 투신이 요구된다. 영성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 또는 성령을 따르는 삶이며, 교회 안에서 사랑과 봉사의 온전한 친교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적 삶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삶은 수도회 별로 다양한 은사와 직무로 표현되며, 하나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여러 측면들을 강조하고 재현하는 사도직 교유의 영성적 강조점과 선택들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도적 충실성,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 젊은 세대를 성소로 이끄는 능력은 이렇게 영성생활을 최우선으로 하여 인격적, 공동체적 투신 안에 영성생활을 성장시키는 데 달려있다. 절대적 가치인 가치를 갈망하고 있는 우리 시대 사람들을 고무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봉헌생활의 훌륭한 영성이다.(vc.93)

 

 

 

5.2. 본질로 돌아가기

 

5.2.1. 봉헌 생활(VITA CONSECRATA) 안에서

    오늘날의 수도생활은 봉헌생활(Vita Consecrata)이란 말로 표현된다. 봉헌생활이란 “하느님께 따로 떼어 놓은 것”으로써 이렇게 떼어 놓음은 즉,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여타의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거룩함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인간 편에서의 봉헌과 하느님 편에서의 축성 모두를 함께 어우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의미인 봉헌과 축성의 의미는 하느님의 전형적인 행위로써 피조물에게 당신의 현존과 역사하심 드러내는 특별한 도구의 의미를 지닌다.(E. M. Somalo,10)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생활양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살아있는 기념(vc. 22c)로써”그리스도께 동화되어 역사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현존을 지속시키는“(vc.19b) 생활을 말한다. 한마디로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려는 생활“(vc.3)이다.

    수도생활의 방법인 복음적 권고의 신적 기원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vc.1) 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복음적 권고인 청빈, 정결, 순명은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에 주어진 선물임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바탕을 두고, 사도전승과 교부들에 의해 전수된 신적 기원을 갖는다.

    또한 복음적 권고는 인간이 완덕만을 추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다. 따라서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려는 봉헌 생활”(LG44)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그리고 이은총은 교회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감도 하에 교회는 봉헌생활을 보호하고, 봉헌 생활은 교회에 생명력을 주어왔다. “봉헌생활이 교회와 유리된 가외의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로써 우리 모두의 일이다.(de re nostra agitur)"이다.(VC.3)이런 차원에서 ”봉헌생활은 교회의 생명과 성덕과 사명의 한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5.2.2. 교회법 안에서

    교회법 안에서 봉헌생활의 본성은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한 축성 생활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최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형식이다.”(교회법 573조 1항)가 된다.

    이 조항은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축성생활의 본성을 제시하여 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첫째는 축성생활을 포괄적으로 기술하고자 한 것이며, 둘째는 세례로 축성된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명의로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한 축성된 생활을 다루고자 한 것이며, 끝으로 봉헌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성소를 더 특수화 한 것이고, 새로운 단계의 성소임을 지적한 것에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주요한 내용은 첫 조항은 이 법이 항구한 생활방식에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즉 새로운  교회법은 축성생활을 “고정된 생활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법은 이 생활이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발하는 공의회의 취지를 반영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이 개념은 파스카 신비 안으로 새로이, 더 깊이 들어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들어감은 근본적으로 세례 때 시작된 것이며,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구속적인 죽음과 부활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수도 선서는 교회 안에서 오래 전부터 일종의 두 번째의 세례로 여겨져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더 깊이 들어가 그리스도와 더욱더 철저히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청빈, 정결, 순명의 생활은 선서함으로써, 축성된 그리스도인 “수도자이든 재속인 이든” 이렇게 더 가까이 따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고, “갈라지지 않은” 마음(1고린7,34)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최고의 것이고 온전한 것인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와 봉사로 표현되는 사랑과 결합된다. 축성생활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교회의 사명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교회법은 그 근원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요구하고 복음의 근본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성생활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들의 정결과 청빈과 순명 생활 안에서 이것을 추구하면서, 장차 올 삶의 표징이 된다. 종말론적 증거의 정도는, 회의 본성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5.3. 전문성 살리기

    미래의 수도삶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수도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더욱더 자신의 신원(Identity)을 철저히 살아가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수도삶을 살아가는 봉헌생활이 하느님의 은사(Karisma)에 비롯되고,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선물이기에 오로시 그분의 영광과 구원사업을 위하여 고유성을 지닌 각 지체들로써 동참하는 것에 있다.

 

5.3.1. 은사에 대한 충실성

    수도회들은 그 자체가 성령의 은총인 창립자들의 영감에 충실함으로써 봉헌생활의 본질적 요소들을 더욱 쉽게 식별하고 온 마음으로 이를 실천할 수 있기에, 각 수도회는 회의 창립 은사와 여기에 따르는 영성적 유산에 충실할 것을 문헌은 성덕의 첫 조건으로 제시한다.(VC.36)

수도삶의 전문성을 살리는 일은 크게는 관상과 활동 수도회가 자신들의 은사적인 삶에 뚜렷한 색체를 갖고 독자적인 고유성을 살리는 일이다. 즉, 관상수도생활을 지향하는 이들은 더욱더 철저히 세속과 격리된 삶의 형태를 지향함으로써 관상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며,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투신 할 것이며, 활동수도생활을 지향하는 이들은 세상 안에서 성령의 감도를 알아듣고, 철저히 시대의 징표에 적응하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우리들의 주님이신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과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에 투신해야 하는 것이다. 관상 수도자들이 마치 활동 수도자들처럼 살며, 자신들의 은사를 게을리 할 수 없으며, 활동 수도자도 세상 안에서 마치 관상적인 수도삶을 갈망하며 현실의 봉사 활동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수도생활의 전문성을 살리는 일은 앞으로의 수도생활은 교회 안에서 각 수도회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각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충실하며, 특별히 그 수도회가 세상 안에서 봉사해야 할 일들에 전문성을 살려 투신하는 일이다. 한 수도회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며, 각 수도회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증거한 지체들로써 자신의 수도회에게 하느님이 주신 은사에 충실하는 일입니다.(1고린12,12-31) 이을 위하여 성령이 교회 안에 많은 수도회을 만드신 것이며, 수도생활은 교회 안에서 은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며,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과 찬미가 더욱더 아름다우며 교회는 더 풍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5.3.2. 창조적 충실성

     은사에 충실하다는 것은 물리적인 고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들에 응답하여 창립자들의 진취적 창의성과 성덕으로써 재출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청은 무엇보다 일상생활의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성덕의 길에 정진하라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영감과 교회의 식별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젖힌 가운데, 개인활 동의 능력을 키우고 사명에 대한 자율적 충실성을 다지며, 필요하다면 새로운 상황과 다양한 요구에 따라 수도생활양식을 적응시키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나 수도회의 창립 정신에 충실하기위한 모든 쇄신 작업을 보장하여 주는 것은 바로 주님께 더욱더 일치하려는 동화 노력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오늘날 모든 수도회는 규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규칙과 회헌은 교회가 인준한 독특한 은사에 따라 제자생활의 전 여정에 대한 지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규칙에 대한 깊은 존중은 수도회의 창립 정신에서 벗어나 않고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증거생활을 추구하는 봉헌된 사람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준거를 제공해 줄 것이다.(VC.37)

 

5.3.3. 기도와 수덕 영적투쟁

    교회 안에서 은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도생활과 수도자로써의 신원의식(Identity)과 전문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도삶의 기본적인 요소들이며, 교회와 교회의 전승들 안에서 교부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주요한 몇 가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오늘날 수도생활 안에 다시 되살리고 싶은 수덕들 가운데 특히 사막의 영성이 그 바탕인 것 것들을 그 예로 제시하고자 한다.

 

5.3.3.1. 침묵(Silence)

    인간은 말하기에 앞서 침묵한다. 그리고 말을 중단하거나 말을 끝냈을 때 침묵한다. 이러한 침묵은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에 커다란 빛을 던져준다. 침묵은 하느님 안에서도 커다란 신비였고, 그 분은 이 침묵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의 업적들을 계속하셨다. 인간에게 있어서 침묵은 우유부단, 동의, 그리고 당혹이나 공포를 의미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침묵을 통하여 보다 깊이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의 대화로써의 역할이 크다. 침묵으로 마음속 깊이 숙고하는 이에게 겸손이 넘치는 침묵이 평온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계시에 다다르는 첩경이기도 한 것이다.

 

5.3.3.1.1. 순례자로 만드는 침묵

     사막의 교부들은 침묵은 고독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길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로 찬양했다. 그리고 미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순례는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순례한다는 것은 침묵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여정에서 세상의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채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침묵이 가장 완전한 길이라는 것이다. 침묵은 영성 생활의 중요한 수련규칙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고 이 규칙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아마도 말에 의하여 세상에 얽매이고 세속의 정신이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다름 사람들을 여행하는 우리에게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순례자라는 전제하에 있다면 순례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 되고 침묵하는 것은 순례자의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이다.

 

5.3.3.1.2. 마음속에 있는 불을 지키는 침묵

    침묵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내적인, 즉 영적인 불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 내적인 불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생명이다. 따라서 침묵은 하느님의 내적인 불을 보살피고 살아있도록 하는 수련이다. 특별히 세상에 하느님의 영의 현존을 증거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을 최대한도로 조심하여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로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하고 신앙을 증거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때때로 우리의 많은 말은 신앙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느끼는 회의의 표현인 것들이 많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일시적으로 도와주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불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말 많은 불신앙인 것이다. 많은 말은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고 우리를 냉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침묵은 성령을 지키는 거룩한 규율이요 수련이다.

 

5.3.3.1.3.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침묵

     힘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온다. 결실을 맺는말은 침묵에서 나와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이다. 그럼으로 침묵으로부터 나와서 우리를 그 침묵으로 다시 인도하는 침묵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말이다. 침묵에 바탕을 두지 않는 말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1고린토13,1)와 다를 것이 없는 약하고 힘없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도 말이 나온 침묵이 아니라 사랑이 안전하게 쉬는 신성한 침묵 일 때만 맞는 것이다. 하느님 역시 영원한 침묵 속에서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분의 침묵은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을 드러내신다.

수도자들은 에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감으로써 신성한 침묵에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은 이 침묵에서 말함으로써 신성한 말씀의 창조와 재창조에 참여하고자 노력했다. 말은, 그들이 나온 침묵을 어떤 형태로 나타낼 때에만 친교를 조성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말을 사용하여 타인의 감정을 해치게 하지만 실상 그 말이 치유와 침묵의 정적의 회복을 일으킬 때는 말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즉,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5.3.3.2. 기도 (Prayer)

    구약성서 안에서의 모든 기도들은 항상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 즉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그리고 미래의 어떤 사건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 지상에 하느님의 구원이 성취되도록 기도한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일치 자신들의 염원들을 담은 것으로써 하느님과의 신뢰 깊은 대화라고 할 수 가 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 사막생활의 진정한 목적이고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수도자들의 삶은 기도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을 수 가 있기 때문이다.

 

5.3.3.2.1. 지성의 기도

    기도가 중요하다가는 사실은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기도가 자신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기도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도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과 자신의 신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기도란 하느님께 대한 새롭고 지적인 발견으로 인도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 데 이러한 기도의 주목적은 또한 하느님의 체험에 대한 원의가 된다. 사실 기도생활의 위기는 마음과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의 관념으로 가득차 있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사막교부들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같이 바로 마음의 기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수도자들 역시 그 누구보다도 기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기도 안에 진정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언제나 깨어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5.3.3.2.2. 마음의 기도

    영혼을 하느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휴식으로 인도하는 헤서케시즘(Hesychastic)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매우 지성적인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현대의 수도자들에게 세속의 변화하는 많은 사건들 안에서 분명 깊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이런 기도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이 자신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은 지성과 함께 마음속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당신 안에 영원히 현존하시며 널리 만물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다.” 즉 기도는 마음에 지성이 함께 구분이나 구별이 없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라는 우리 존재의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로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서는 것인데 그곳에서는 마음이 마음에게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이란 신체적, 정서적, 지성적, 의지적 그리고 도덕적 에너지의 원천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수도자는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인격전체를 개조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진정한 기도란 순수한 곳까지 스며들어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그 본 성상 하느님의 진리와 자신의 진리에 영혼이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로 변형시킨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즉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오5,8)“가 수도자의 기도에 있어서 현실이 될 것이다.

 

5.3.3.3. 고독(Solitude)

    흘러넘치는 충만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당연히 하느님 및 그의 동료들과 친교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따라서 고독은 그 자체로는 죄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악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베푸시는 고독과 결합하면 그것은 친교와 풍요로움의 근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생활의 시초부터 사막의 교부들은 수도삶에 고독을 절대적인 하느님과 일치를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그리고 그 고독의 깊이를 더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떠났다. 이러한 고독은 우리의 거짓되고 강박적인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자기로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변형이 일어나는 용광로이다. 우리각자의 회심이 일어나는 마음의 언저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의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5.3.3.3.1. 변형의 광로인 고독

     사막의 영성인 이 고독은 오늘날 수도살 그 본질이 되살아나야하고 그리고 수도자들은 더욱더 깊이 이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하여 자신을 수련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수도자들 역시 세속 안에서 사막을 체험하고 있다. 세속주의 정신, 치러야 하는 많은 일들,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하여 부단히 고독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때 고독이 없으면 우리는 사회의 희생자로 남고 계속되는 거짓 자기의 착각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공생활 중에 이 고독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 자신을 새로운 자기의 실제로서 제공하신 사랑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5.3.3.3.2. 회심의 장소인 고독

    우리는 삶 안에서 고독이 얼마간 필요하다고 누구나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독은 생활에 있어서 진행되는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새로운 힘을 모으는 곳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고독은 사적인 치료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회심의 장소요,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장소요, 새로운 사람의 출현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럼으로 부단히 고독 속에서 견디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고독 속에 머물러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방해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5.3.3.3.3. 진정한 고독의 본질

    수도자가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선 주님과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고독은 첫째로 우리 주님이신 그 분을 생각과 마음을 다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죄들에 직면할 수 있고, 상처들을 보여줄 수 있으며, 고착된 두려움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참모습을 대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막의 혹독함을 극복할 수 있는 신체적 체질을 가지고 있지 못 할지라도 각자의 고독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현실의 세속적인 환경이 각자에게 영신수련의 방법을 별로 제공해 주지 못할지라도 일상적인 삶에서 물러나 주님의 온화하고 치유하는 현존 안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자신의 고독의 사막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고독은 정화와 변형의 자리고 위대한 투쟁과 위대한 만남의 자리이다. 그리고 고독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고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의 모상으로 개조하는 세상의 강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자리이다. 그것은 또한 어둠 속의 세상에서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자 하는 구원의 자리이다.,

 

5.4. 교회의 마르타와 마리아

    기본적으로 봉헌생활은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길로써, 인간적 덕행이나 생활 수단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생활의 근본 모델은 그리스도로써 복음 권고(정결, 청빈, 순명)가 이끄는 그리스도의 애덕에 따라 교회와 교회의 신비에 특별한 양식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즉 봉헌생활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에 자발적인 참여이고, 자신을 봉헌 제물로 내어놓은 그리스도처럼 세속을 떠나서나, 세속 안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처럼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적 권고는 신적기원을 지니므로 불변하지만, 생활 형태는 인간적 기원을 지니고 가변적이다.

    봉헌생활은 삼위일체적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방식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통하여, 갈림 없는 마음(indiviso corde)을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완전한 자기 봉헌의 삶이다. 그러므로 봉헌생활은 교회의 생명과 성덕으로써 관상 속에서의 활동, 활동속에서의 관상으로써, 또한 세속을 떠나서, 세속 안에서 교회의 마르타와 마리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

 

 

나오면서

    사막은 하느님 사랑의 장소이고, 인간이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는 장(場)이다. 그 사막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무한하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 분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사랑이신 분임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허락하신 사막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드러내신다. 같은 맥락에서 보다 더 가까이서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막을 택하여 그곳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사람들 안에서도 사막은 역시 하느님 사랑과 일치의 체험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끝임 없이 회개하고 쇄신하는 사막의 정신이 수도생활의 역사 안에서 여전히 계속되어 오고 있다. 특히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더 가까이서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도자는 이 사막에서 끝임 없는 기도와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더욱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렇듯 사막은 하느님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은총의 시간이고 장소로써 오늘날까지 그 사막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이 완성될 그 시간까지 말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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