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24: 이사악과 레베카의 혼인

마리아 아나빔 2010. 12. 9. 11:51

 

 

 

                                             성서나눔27 - 창세 24: 이사악과 레베카의 혼인

 

 

 

들어가는 말

 

 

     섭리에 따라 이사악의 아내를 찾아낸다는 목가적 색채가 풍기는 이 기사는, 야훼계 전승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복된 곳이 있기 때문에(라반은 두 번 우물로 간다. 29b, 30b절) 이 전승은 조금 다른 구전(엘로힘 전승)과 엮어서 만든 것 같다. 리브가의 직계존속에 대해서도 두 가지 다른 전승이 있다. 하나는 야훼계전승으로 라반과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녀로 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사제계전승인데, 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자녀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장은 유목민의 관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결혼은 두 종족에 관련된 일이고, 당사자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는다. 또한 동족결혼의 관례도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여자는 사실상 귀한 전통의 파수꾼이기 때문에 자기 종족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유목민은, 외부의 정주자를 싫어하고, 동족인 여자와 결혼한다. 후에는 사실상 이런 풍습이 사라졌으나, 또한 가나안 사람들과 동맹을 맺거나 결혼하는 것을 금한다는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었다.(출애 34,16;에즈 9-10장)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고 있다. 종에게 맹세를 시키고 아브라함은 이야기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후 그의 마지막 여생에 대해서는 편집자에 의해 25장에서 간단하게 묘사되고 있을 따름이다. 야훼계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죽음”본래 61절 뒤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마도 저자가 사제계전승에 따른 “아브라함의 죽음”의 기사를 다음 장 7-10절에서 서술하기 위해 이것을 생략한 것이리라. 따라서 연대순으로 말하자면, 25장 1-6절은 24장 앞선 것이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는 야훼스트의 작품인데 후대의 편집자들의 손을 거의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근동의 결혼풍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아브라함 앞에서 종의 맹세, 표징의 요구, 표징의 실현, 그리고 리브가와 그의 친권보호자들의 동의이다.

 

 

Text 안에서

 

창세 24,1-27: 주께서 주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를 지키셨구나.

 

    -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신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맹세하도록 한다. 사타구니는 히브리 본문에는 넓적다리로 표현되는데 남자의 생식기를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생식기에 손을 얹고 맹세함으로써 맹세를 어기는 일이 생기면 맹세를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아 더 이상 출산할 능력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하느님, 곧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시는 창조주 하느님은 종이 어떻게 계약을 이행 하는가 지켜보시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동작은, 남자의 생식력을 끌어들임으로써, 맹세를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여자와 자기 아들이 결혼하는 걸 반대한다. 신명기 7장에 보면 가나안 사람들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종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 우상숭배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낙타의 등장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원전 11세기나 12세기에 미디안 족들이 낙타를 몰고 쳐들어온 이후부터 낙타를 기르게 된다(판관 6,5). 우물가에서 신부감을 만나게 된다는 주제는 야곱과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여 길을 떠나 아람 나하라임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아람 나하라림은 ‘두 강 사이의 아람’이라는 뜻인데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상류의 아라메아 부족들이 살던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가리킨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데라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었다. 리브가는 나홀의 손녀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을 때 리브가의 할아버지 나홀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브두엘도 죽었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리브가는 생존해 계시는 그녀의 할머니 밀가의 손녀이자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딸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리브가에 대한 모든 권리가 그녀의 오빠 라반에게 위임되어 있다.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던 아브라함의 종은 하느님께 자기 상전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호소하면서 표징을 요구한다. 여기서 표징은 신적 능력의 표시로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임무를 받은 사람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장해 주는 외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말한다. 이 표징은 임무를 받은 사람이 요구하는 수도 있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출애굽 전에 모세에게 표징이 주어졌고 미디안 족을 칠 때 기드온은 하느님께 표장을 요구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요구한 표징은 신부될 처녀가 자신과 자기 낙타들에게 물을 흔쾌히 먹여 주는 것이었다.

 

    리브가는 종이 요구하는 표징을 실현시켜 준다. 이 표징은 하느님의 의향을 가리켜 줄 뿐만 아니라 리브가 자신의 고귀하고 관대한 처신도 함께 보여준다. 리브가는 나아가 자신이 아브라함의 친척임을 밝히고 그의 종을 자기 집에 정중하게 초대함으로써 종이 요구한 표징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브라함의 종은 더 이상 의심을 버리고 자신을 제대로 인도해 주심으로써 상전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성실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종은 “주님께서 내 주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참으로 신의를 지켜 주셨구나.” 하고 탄복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먼저는 종의 충직성이다. 과연 이 종은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신임을 받을 만큼 휼륭하다.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짙은 신뢰와 우정을 언제나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역시 두 분에게서 충직함을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종이 자기 상전 집의 신부감을 고를 때 내걸었던 조건이다. 재산이나 인물이나 세력과 같은 외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아가씨의 고운 마음씨였다. 아가씨는 종에게 먼저 물을 먹여 준 다음 남은 물을 낙타(낙타 열 마리는 아브라함의 많은 재산을 나타내고, 신부의 여행을 꾸미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의 여물통에 얼른 부어 놓고 샘터로 달려가서 물을 떠다 낙타들에게 흡족이 먹였다. 그리고 피곤한 나그네를 자기 집에 초대한다. 아가씨의 상냥하고 고운 태도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리브가는 아름다운 처녀이며 이웃에게 친절한 여자로서, 또 결단력이 있는 여인(58절)으로 묘사되고 있다.

 

 

창세 24, 28-67: 이사악은 아내를 사랑하며 어머니 잃은 슬픔을 달랬다.

 

   리브가가 어머니 집에 가서 알렸다는 말은 이 소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아버지가 안 계신 이 집안에서 출가하지 않은 딸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자연 맏자식에게 돌아간다. 리브가의 오빠 라반은 누이동생이 종에게서 받은 금 코 고리와 금팔찌들을 보고 종을 마중하러 달려 나간다. 리브가의 친절에 대한 사례로서는 너무나 값진 것이다. “코걸이”와 “팔찌”는 에집트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던 여인들의 장신구였다. 라반이 친절해서가 아니라 탐욕 때문에 부자인 외국인을 머물게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라반이 리브가의 혼사 문제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사심 없이 물을 청하는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그의 누이동생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성품은 후에 야곱을 접대할 때 나타나며 그는 똑같은 장삿속에서 그의 조카 야곱을 속이고 착취한다. ‘주님께 축복받은 이여’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친히 그의 걸음을 인도해 주신 손님에 대한 인사말이다.

 

    라반의 집에 들어온 종은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주인의 분부부터 말씀드려야 하겠다고 고집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추호도 양보가 없다. 저녁상을 받고나면 마음이 해이해질 수 있기 때문에 첫 숟가락을 뜨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라반이 뜻대로 하라고 하자 종은 이제껏 일어났던 일을 설명한다. 약간의 수정과 새로운 관심사를 곁들여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꾼들이 흔히 쓰던 수법이다. 종은 자신이 요청했던 표징이 그대로 들어맞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 집 문간까지 친히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라반의 가족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은 아브라함의 대리자로, 라반은 리브가의 대리자로 결혼협상에 나서고 있다.

 

    48절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자기 주인의 조카딸이라고 말하는데 야휘스트는 29장 5절에서도 리브가의 오빠 라반을 나홀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조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은 리브가와 라반을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자녀로 보는 25장 20절과 28장 2절-5절의 사제계 문헌과 서로 상반된다. 이 밖에 24장 여러 곳(15.24. 47. 50참조:22,23) )에서 리브가가 브두엘의 딸이요 나홀의 손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순은 이야기의 최종편집자가 두 남매의 아버지를 나홀로 보는 야휘스트 문헌과 브두엘로 보는 사제계 문헌을 조화시키려다 실패한 예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50절에 브두엘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설상가상으로 아들의 이름 뒤에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가장의 막대한 권위와 권한을 강조하던 이스라엘의 가정풍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도 최종편집자의 부주의로 삽입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난 아브라함의 종은 이제 결혼계약에 라반네 가족이 응할 것인가 아닌가 묻는다. 그들이 거절하면 종은 아브라함에게 한 맹세에서 해방된다. 8절에서 아브라함은 종을 떠나보내며 “신부감이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종의 설명엔 그의 상전댁이 부유하며 사돈댁도 물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물질적인 손익계산이 빠른 라반에게 군침이 도는 이야기다. 주께서 하시는 일인데 어찌 좋다 싫다 하겠습니까? 하면서 취사선택할 여지가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혼담의 결론으로 종은 가져 온 선물들을 리브가의 식구들에게 다 나누어준다. 어떤 선물도 되돌려진 것이 없는 걸로 보아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대신한 종의 청혼은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게 분명하다. 그래서 종은 이튿날 서둘러 여장을 차리며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나선다. 근동이 풍습에도 낯선 이 급한 이별에 당황한 라반과 그의 어머니는 열흘만이라도 리브가를 붙잡아 둘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아시리아 법률에 따르면 여자는 결혼 후에도 자기 아버지 집에 머물 수가 있었다. 후에 조카 야곱에 대한 라반의 지연작전이 벌써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종은 집에서 애타게 기다릴 주인을 생각하며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가려고 지체 없이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식구들은 리브가의 의사를 들어 보고 결정하자고 한다. 리브가는 흔쾌히 종과 함께 떠나겠다고 대답한다.

 

    리브가에 대한 오빠들의 축복의 말 ‘억조창생의 어머니가 되어라(17,16), “일만”원어와 리브가는 발음이 비슷하다. 아마도 멋을 부린 것이리라. 그녀에게 다산과 자손의 번영을 주는 작별인사이다.

 

    저녁 때가 되어 이사악은 들에 바람쐬러 나왔다가, 이 말은 그리스어역은 “이야기를 나누다”, 라탄어역에서는 “생각에 감기다.” “벌렁 누었다”는 뜻도 풍기고 있다. 멀리서 이사악이 낙타를 타고 달려오는 것을 보고 리브가가 누구냐고 묻는다. 종이 “제 주인이십니다.”고 대답하는데 이후부터 이 말은 이사악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실제로 종은 돌아와서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사악에게 경과보도를 한다. 이미 아브라함이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브가는 근동의 풍습대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낙타에서 내려와 이사악을 맞는다. 그리고 얼굴을 너울로 가리는데 약혼녀는 오직 신혼방에서만 너울을 벗고 남편에게 얼굴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에 “이사악은 아내를 사랑하며 어머니 잃은 슬픔을 달랬다.”고 되어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편집자가, 이어지는 25장에서 아브라함의 죽음이 정식으로 거론되기 때문에 원래의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어머니의 죽음으로 바꾼 것임에 틀림없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아브라함네 종의 충직성과 리브가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예의 바름이 돋보인다. 이와는 대조적 으 로 라반의 세속적인 장삿속이 매끄러운 위선으로 포장되어 드러나고 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15-123.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00-106.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69-276.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