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VII(레위기 5)
7. 신학적 주제들
1) 거룩함- 하느님의 현존
탈출기의 대단원을 장식했던 내용은 ‘성막건립’ 이었다. 이어지는 레위기는 ‘성막’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막건립’이 오경의 최종 편집자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였음을 드러내 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막은 하느님의 현존이 가시화되는 장소였다. 즉,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레위기가 제시하는 또 다른 주제와 연결된다. 그 대주제란, 성막을 통해 하느님과 같은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같은 속성을 유지해야 함을 궁극적으로 전제한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함께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속성이 다른 두 존재는 결코 공존할 수 없고, 따라서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지속하려면 그분과 같은 속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대표하는 제1속성은 ‘거룩함’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레위기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거룩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코데쉬(שׁדק)’로서, ‘카다쉬(구분하다, 분리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결국 히브리적 개념에서 본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됨’,‘성별됨’을 의미한다. 즉, 거룩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장소, 시간, 사건, 사람들 안에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함을 뜻한다.
이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구는 사실 현재의 우리에게도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요구일 수 있다. 전혀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 어우러져 살면서 혼자만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언급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육체적이고 물리적 의미에서만의 거룩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나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과 결별하는 이기주의적 발상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레위기가 언급하는 거룩함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상의 삶을 살되 그런 모든 상황 안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하되 거룩한 상태로, 즉 하느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구별되는’태도로 일관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어의 ‘거룩함’이 제시하는 ‘별제됨’이며, 이는 사실 매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마음에 담고 있다면, 그 이전과 구별되는 성숙함이 자연스레 우러나듯이, 하느님을 담고 있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과 구별되는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여러 규정들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
레위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여러 세부 규정들을 제시해 준다. 그런데 그 규정들이 너무나도 자세하고 사소한 부분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레위기를 읽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을 세부적 제시들을 통하여 레위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계시는 그들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점이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과 역사 안에 개입하고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다양한 자세한 규정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밀접하고 절대적인 관계를 비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기억’과 ‘기념’으로서의 전례
전례와 관련된 그리스어는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이다. 이는 ‘기억’과 ‘기념’이라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말인데, 이러한 내용은 ‘전례’는 곧 ‘기억’이고 ‘기념’임을 제시해 준다.
사람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능력, 즉 기억의 기능 때문에 생긴 말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규범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상식의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고, 나의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기억하기에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교적 삶의 형태 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누구인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지 못했을 때, 하느님 없이 사는 삶, 즉 죄의 삶이 시작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 없이 살게 하는 ‘망각’을 가장 결정적인 죄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사실 현재 실행되고 있는 가톨릭의 전례는 ‘기억’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특수한 구도를 드러낸다. 즉,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별되는 가톨릭의 전례는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주님께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거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전례는 독서와 복음의 낭독을 통해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를 ‘기억’하고, 성찬 전례에서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성변화’ 순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명령에 따라 그분을 기억한다.
구약의 역사 역시 이와 유사한 구조를 드러낸다. 시나이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탈출기 후반부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다양한 전례규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례 규정들은, 시나이에서의 계약을 잊지 않고 그 관계를 언제나 ‘기억’하기 위해 창안된 도구들이다. 언제 어디서고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친절한 수단들이 곧 전례와 관련된 법조문들인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백성들은 삶을 하느님께 ‘예배’ 드림으로써 그분을 ‘기억’하였고, 이 기억을 통해 그들의 삶을 하느님 앞에서 바르게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그 시절, 그 사건(시나이 계약)을 기억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었고, 이러한 기억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 안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위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각종 전례규정들은 바로 이러한 ‘기억’을 위한 친절한 도구로 이해해야 한다. 기억이 없으면 믿음도, 관계도 없듯이 각종 전례 규정들을 통해 하느님을 기억함으로써 유다인들은 자신의 현재와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례가 가지는 가장 궁극적 기능이며, 이러한 맥락에서만 구약 성경이 왜 그토록 전례를 강조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 레위기와 그리스도의 제사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의 의미를 레위기가 제시하는 각종 제사들에 비추어 신학적으로 조명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으신 분이기에, 백성들의 제사를 드려 주기 위해 자신의 죄를 먼저 속죄해야하는 일반 사제들과 구분되는 그런 대사제이다(히브 7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덮어 쓰시고 희생 제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이러한 내용은, 봉헌될 동물에 안수함으로써 봉헌자의 죄를 동물에 덮어씌워서 제사를 재내는 ‘속죄제’의 관습과 의미를 그대로 신화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히브 9,11-28; 10, 11-12; 13, 19-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로마 12,1).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일반 사제직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 참고문헌: 모세오경, 김혜윤, 2005, p.159-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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