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표징과 영성
이 주제는 현대 문화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현대 문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 징표를 바꾸어 놓기 위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현상과 화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알고 바꾸어놓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 현시대의 표징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찰(Re- flexion/ Reflection)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찰(Reflection)’은 빛을 다시 반사한다는 뜻으로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의미와 근원 그리고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다시 “이해”와 “해석”으로 나누어진다.
현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주제인 ‘성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고,
‘인간’은 무엇인가? 에 대한 본질에 대한 물음 된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만큼 인간은 존재하며,
해석하는 그 만큼 인간의 영역은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 그것이 바로 ‘성찰’이 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성찰’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리는
바로 현재(hic et nunc /here and now)’이다.
인간의 삶은 철저하게 ‘시간’ 속에 놓여져 있다.
여기서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으로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크로노스(Cronos)라 하였다.
반면 무엇이 이루어지는 결단의 시간, 선택의 시간, 성찰의 시간과 같은 다른 걔념의 시간을
그들은 카이로스(Cairos)라 하였다.
즉 성서 안에서 “때가 찼을 때”, 또는 “때가 무려 익었을 때”처럼
어떤 결정적인 순간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거나
당신이 인간의 역사 속에 무엇인가를 하실 때 이 모든 시간들은 이 카이로스적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이 시간을 뛰어 넘어서 존재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그는 ‘유한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그러기에 희랍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간파하여 인간의 존재와는 다른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시간 속에서 불러내어 ‘영원한 존재’로 상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성을 지닌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 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신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Pascal)은
하느님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고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며 말씀을 건네 오시는 분의 모습을
“인간과 씨름하시는 분”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를 구체적으로 애해하고 해석한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이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이고
이 ‘현재’ 안에서 과거를 해석하며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바로 현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의미가 된다.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재해석된다.
그래서 교회의 교부들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지만,
만약 그 죄가 없었다면 인간에게 구원 즉 구세주가 탄생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때,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인간인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것을“오! 복된 죄여(Oh! felix culpa)” 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이렇게 끊임없이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들이 복음사건들이 된다.
이러한 현재는 무엇을 바꾸어 놓게 되는데, 이것을 ‘현재화’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안에서 우리의 복음과 영성과 삶을 ‘현재화’한다.
만약 ‘현재’에서 해석하지 못하면 과거에서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미래 또한 언제나 근원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우리가 출발했던 자리, 원천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나간 현재인 과거는 우리의 현재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는 현재인 미래 또한 현재에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언어들은 서사(창세 1,1-11장)와 이야기(창세 12-50장)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또한 하느님 역시 ‘서사’ 안에서,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고, 인간도 역사 안에 일하는 존재가 된다.
‘야곱과 씨름하시는 하느님’ 이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역사 안에서 씨름함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은 대화하시고
인간은 그 안에서 성숙되어 가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학자은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을 이끌어 가시는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 ‘성찰’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비유(Metaphor)로는 ‘빛’을 사용한다.
이 ‘빛’이란 존재이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유하는 이해’와 ‘공유하는 해석’을 가지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가 된다.
그러므로 ‘공유하는 애해와 해석의 틀’이 바로 공동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의 측면에서 성 이냐시오는 ‘분산하는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즉 공유하는 이해와 해석의 틀을 가지고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을 ‘분산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어쯤 예수회원들의 삶의 모습일수도 있겠다.
따라서 ‘공동체의 빛’은 다른 말로하면 ‘공동체의 성찰’이 된다.
이 성찰은 각자가 지닌, 그리고 공동체가 지닌 ‘존재 이해의 빛’을 되비치며 성찰하는 것이다.
이 때 성찰의 매개체가 되는
‘빛’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되돌아보는 것으로
실존의 근원을 이해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이 된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테크는 “미래는 근원에 머문다.” 이 말은 ‘빛’이 머무는 자리에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빛’은 존재의 ‘근원’ 또는 ‘본질’에 대한 이해이고 해석이 되고 이것을 알아듣고,
이해할 때 그리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현상을 이해하게 되고 간파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상을 이해한다고 할 때 세상의 변화와 현상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근원을 되돌아보고 앎으로, 역으로 수 없이 변화되어 가는 것들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에 속하는 존재의 본질과 근원에 되비춤(reflection)으로 변화되어가는
모든 현상들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의미가 되고
또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할 때 모든 존재들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현대 사회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
‘진리(眞理)’란 바로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고 존재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존재자가 그 존재의 목적대로 완성되고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희랍철학 안에서 절대자에게 주어졌던 최대의 찬사의 말인 진선미(眞善美)
그리고 예수의 사건과 희랍철학을 해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그러므로 진리 또한 모든 존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에게 부여되었던 ‘선(善)’의 의미 역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족과 달성이 바로 ‘선’이다.
‘미(美)’또한 결핍됨이 없는 것이 ‘미(美)’이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부여된 진선미(眞善美)란
하느님 자체가 존재의 근원이고 본질이시며 그분의 존재가 충족되어 있고 결핍이 없음에서 부여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오로지 하느님만이 전선(全線)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충족되어 있지 않고 충족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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