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그 특별함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의 하나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고, 심지어 자신의 실존과 실체에 대하여 조차 원인을 규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시간”이라는 한계성안에 놓여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실존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편 시간과 반대의 것인 “영원”은 과거나 미래가 없는 현재의 지속성만을 유지하는 것으로써 시간의 유한성을 드러내어주고 또한 시간을 영원성 속으로 함축한다. 또한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바로 “시간”이며, 이 “ 시간”의 유한성 앞에 한결같이 모두가 “영원”을 갈망하고 희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요한 관심사중의 하나인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1. 시간과 영원사이에서
시간과 영원의 공통점은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개념 속에서나 사유의 세계 안에 존재하여 있으며, 또한 실제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의 위력과 영원성 앞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시간 밖의 세계에는 “영원”이 존재한다. 아니 영원은 시간 안에서도 그리고 시간을 떠나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 토마스도 그의 철학에서 실존이란 개념은 시간 속의 실존이 아니라 시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그 자체로써의 실존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 역시 시간 속에만 실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가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의 영원성과 수교하고 있는 한에서, 그는 또한 시간 그 자체를 초월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자체로 물질과 가멸성을 초월하는 지성적 실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선적으로 영원성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가 된다. 시간이야말로 인간 자신의 영원성을 끊임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1. 시간에 대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지구가 회전하는 것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면서 태양 빛이 비쳤다가 비치지 않는 것이 한 번 교차되면 사람은 그것을 하루로 인식한다. 이것을 24등분 나누어서 1시간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60등분하여 1분으로, 1분을 다시 60등분하여 1초로 인식하고 있다. 아폴로 10호와 17호의 승무원으로서 달 탐험여행을 했던 유진 서넌은 달로 향하던 중에 지구를 전체적으로 본 감동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구가 멀어짐에 따라 대륙과 대양이 한눈에 조망되었다가, 마침내 지구의 둥근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가 한눈에 보인다. ...게다가 지구상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뜨는 지역과 해지는 지역이 동시에 보이고, 지구가 회전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때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머문 시간은 21시간 36분이었고, 차츰 길어져 17호는 75시간을 머물렀다. 이 때 지구에서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아폴로 11호는 하루를 채 못 머물렀고 17호는 3일이 넘도록 달 표면에 있었으나, 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둘 다 하루도 머물지 아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에 있어서 하루는 자전과 공전주기가 같아 29.5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양하다. 벌새에게 있어서의 1초는 한없이 느린 나무늘보에게 있어서의 1초와 많이 다를 것이다.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에게 1년과 이곳 저곳 많이 나다니는 동물들의 1년과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생명의 종에 따라 시간에 대한 감각이 각기 다르다. 같은 종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시간에 대한 감각이 나이에 따라 다르고, 그 때 그 때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겨우 이성이 조금 트인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하루는 할아버지의 하루와는 다르다.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고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1시간과 매우 보고싶었던 연인을 만난 사람에게서의 1시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매 시간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이 다르다. 이렇듯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력의 세기도 시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구 중력의 중심에서 가까울수록 시간은 그 중력의 힘을 강하게 받아 천천히 흐르고 멀수록 빠르게 흐른다. 그래서 지구 안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해발 1m될까말까한 바닷가에서의 1초와 해발 1950m인 한라산 정산에서의 1초가 미세하지만 조금씩 서로 다르고, 지구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에서의 1초는 이들보다 좀더 크게 다르다. 시간은 이렇게 물리적인 상태와 시간을 인식하는 생명체의 종류와 심리적 상태에 따라 각기 다양하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근대철학의 아버지 칸트는 “시간이라는 것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한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삶을 가능토록 할 목적으로 인간의 뇌에 들어있는 하나의 인식의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것이다. 현대 물리학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라고 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뇌 안에만 존재할 뿐 우주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 세계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인간은 지구가 한 번 자전한 것을 하루로 인식하고 한번 공전한 것을 1년으로 인식하여 뇌 속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정리하여 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일상의 세계를 넘어 진리의 세계로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1.1.1. 자연적 시간성
바다와 시간의 친화성은 깊고도 넓다.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조수와 시간은 과거시대부터 인간의 마음에 외경을 불러 일으켰다. 영어에서 tide는 어원적으로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고대 영어의 time와 관계가 있다. 또한 current는 시간과 조수 모두를 의미한다. 이렇듯 시간 및 시간성의 본질적 구조는 영원성과의 대립 및 연관에 있어서 몇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시간은 방향이다. 시간의 방향은 장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향하고 또 반대로 과거에서 장래로 향한다고도 생각된다. 여기서 자연적 체험적 시간 즉, 시간성의 가장 기본적 근원적 모습에 있어서의 방향은 장래에서 과거로 향한다. 더욱이 이 방향은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과거가 된 것은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단순 솔직한 비 존재이다. 없어진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주체의 처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다. 요컨데 유(有)에서 무(無)로, 존재에서 비 존재로 향하는 것이 시간의 가장 근원적인 방향 및 본질적인 성격이다. 둘째로 시간성은 무상성(無常性)과 가멸성(可滅性)을 의미한다. 시간과 시간에 있어서 존재는 끊임없는 유동성과 추이 가운데에 유에서 무로 방향을 취하면서 쉬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쏜살같이 괴멸의 길로 나아간다. 세 번째로, 시간성은 단편성(斷片性), 불완전성(不完全性)을 의미한다. 시간적 존재는 언제나 멸망하면서 존재하는 따라서 언제나 결핍에 빠지면서도 현존하는 존재이다. 현재에 있어서 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소유하거나 또한 그 소유는 곧 상실이며 그 존재가 언제까지나 줄곧 확보될 수는 없다. 언제나 완성할 수가 없고 언제나 자기소유에 달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편적인 것. 이것이 시간의 본질적 특징이다. 네 번째로, 시간성은 주체와 실재적 타자와의 직접적인 관계교섭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쏜살같은 몰두를,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성의 본질을 이루어 자기주장에 가해지는 구속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태이다. 다섯째로,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유는 무와 같고, 삶에 대한 의미실현도 달성되지 않고 일체가 끝없이 환상으로 끝나는 곳, 더욱이 주체가 이 사태를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곳에는 삶의 의미의 부정, 행복의 상실, 공허의 느낌, 불안, 애수, 낙담 등으로 빠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귀결이다. 이에 “영원”은 시간의 극복인 한, 삶의 이런 특징에 대해 전멸을 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1.2. 문화적 시간성
왜 시간은 그토록 짧은 것 같은가? 시간이 바닥 날 수 있는가? 24시간 사회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인식되고, 근대성의 속도가 자연의 시간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그리고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어떻게 다르고, 어린이의 시간은 어른들의 시간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 모든 고찰들은 문화적 시간성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문화적 시간성은 자연적 시간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문화는 실재적 타자와의 직접적인 관계교섭에서의 이탈, 자연적 삶의 몰두, 구속, 긴장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타자의 압박침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세상 어디에서나 자기주장을 계속하려고 하는 곳에 문화적 삶의 본질이 있다. 문화적 시간성은 “장래”도 “과거”도 모습을 감추고 주체의 시간적 성격으로서의 “현재”만 남는다. 즉 아직 오지 않은 장래를 구실 삼는 일도 없고 다만 지금 슬퍼할 필요도 없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구실 삼는 일도 없이 다만 지금 그 속에 살고 있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 이로 인하여 문화적 시간성은 역사적 시간의 “과거”와 “미래”가 설립된다. 이 양자는 자연적 시간성과 다른 새로운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새로운 의의를 주면서 “과거”를 성립시키는 것은 “회상(또는 기억)의 작용이며, 회상의 내용으로써 과거는 무로 돌아간 유의 재현이다. 이때 재현되고 현재 하는 유는 물론 객체적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비 존재가 존재로 향하여 무에서 유가 불러 일으켜지면서 자연적 시간성에 있어서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존재의 이동이 행하여지는 현상의 발생이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시간성에 있어서 존재의 공급자는 미래이지만, 문화적 시간성에 있어서 그것과 동일한 임무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이다. 우리는 또한 문화적 시간성을 역사적 시간성이라고도 한다.
1.1.3. 객관적 시간성
우리는 일상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리의 세계에로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경우에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곰곰이 묵상하는 것도 인생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년 같다는 성서 말씀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수명에 있어서 시간의 길이에 연연해하는 것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객관적 시간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객관적 시간성은 문화적 시간성의 변종으로서 정관(靜觀)의 입장에 있어서 시간성이 취하는 특수한 성격이다. 이는 주체가 객체의 그늘에 숨어서 단순히 동작의 숨겨진 중심으로서만 존립을 유지하기 때문에 이 시간성의 주체에 대한 의미는 희박하고, 시간성의 이탈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적 삶에 대한 연관이 더욱 잔류하는 곳에서는 시간성도 역시 잔류하기에, 이렇게 해서 성립하는 것이 객관적 시간이다. 객관적 실재 세계의 인식이 정관(靜觀)인 이상 주체는 그림자를 감추고 활동의 성격은 표면에서 후퇴하기 때문에 이 시간성은 주체 스스로의 성격을 이루는 일 없이 다만 객체 세계의 성격을 특징지우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개관적 시간성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객관적 실재 세계의 구조를 명확하게 규정지어야 하며, 또 거슬러 올라가 이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실재세계는 객체를 실재적 타자에 귀속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이 일은 객체면에서 확대된 것이 새로운 실재적 중심을 얻고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경우 새로운 중심은 주체와 실체적 관계교섭에서 성립하는 실재적 타자이다. 실재적 타자의 표현, 즉 후자가 숨은 중심으로서의 자기를 그 속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기주장, 자기실현을 행하며, 실재적 타자는 객체에 대해서 새로운 주체의 위치에 서게되는데 이것은 인식하는 주체의 동작에 의해서 행해지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주체의 자기실현의 활동에 기초한다. 따라서 문화적 삶의 한 형태로써 성립하고 동시에 자연적 삶으로의 복귀까지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복귀의 작업은 인식인 이상, 인식이 문화적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한편에서 보면 정관(靜觀)의 성격을 지니고 문화적 삶의 본질적 경향의 관철을 뜻하며, 그 위에 다른 편으로는 자연적 삶으로의 복귀를 이룸으로써 같은 삶을 붕괴에서 구하고, 자연적 삶의 근원으로의 실재적 기초를 확보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미 행해지고 있는 일이고 인식이 학문으로 발전 확층 됨으로써 인식 본래의 지향을 완수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객관적 시간성을 통하여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의 비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 받는다.
1.1.4. 무시간성(無時間性)
성서에서 이 세상 안에서의 시간성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의 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시간의 지속성은 전 피조물의 속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시간성이란 무엇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바로 무시간성의 세계로의 시작일까? 시계 밖의 시간 즉, 무시간성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의 삶은 어떠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의 세계 안에는 무시간성이란 세계도 그려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시간성(無時間性)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시간성으로부터의 이탈일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순수한 현재, 과거, 미래까지도 모르는 단순한 「지금」이며, 거기에서는「있었다」라든가 「있으리라」등과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있다」라고 하는 것만 있는 시간일 것이다. 순수한 현재는 또 순수한 존재, 안에도 밖에도 비 존재를 갖지 않는 절대적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로부터 철학에서 「영원」이라 불러온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무시간성의 세계는 외면성, 관계성을 초월하고 살아있는 일도 멸하는 일도 없는 어디까지나 자기성 및 자기 동일성과 함께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 및 형상을 보유하는 것, 이와 같은 존재 및 형상 그 자체의 세계로써 이를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존재가 갖는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영원 또는 불사의 세계가 무시간성의 세계가 아닐까도 생각하게 된다. 무시간성은 시간성을 온전히 초월한 존재의 영역으로써 홀연히 오고 가는 시간의 흐름에 붙잡혀서 일체의 존재가 끊임없이 괴멸 속으로 사라져가고 끝없는 환멸의 여행에 내쫓긴 것과는 정반대로, 어떠한 일에도 동요치 않고 없어지지 않는 존재가비로소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적 시간성의 삶의 본래의 목적인 해방과 자유도 비로소 이곳에서 완전하게 성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시간성은 시간성의 극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으로 인정되는 존재는 과연 존재하며 그 존재자는 과연 시간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로 사고의 지평을 확장할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지평이동은 고대사람들에게 불사불멸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으며, 시간성을 떠난 죽은 후의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하여 표현하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으로 유한성의 시간과 삶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더 오래 죽지 않고 무시간성 속에서 계속하여 존속하여 사는 영원의 삶을 동경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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