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표징과 영성
예언과 관련하여
시대의 징표, 성찰의 행위들은 예언으로 드러난다.
특히 성서 안에 예언들을 볼 때
첫 번째의 특징은 자기배반적이다.
자기 배반적이란 말은 예언의 이야기가 충족되면 예언은 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의 목표는 자기비움(Kenosis)적이다.
즉 예언의 외적인 틀은 그대로 이지만 예언의 내적 목적은 달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8C 활동 수도회의 발생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생겨나게 되지만,
그 문화를 따라가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바꾸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특징이 자기배반적이란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맡아 둔 말씀(담지자)이다. 성서나 진리의 말씀을 맡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세번 째의 특징은 예언은 존재의미에 대한 결단이다.
시간에 있어서 카이로스(Kairos)는 존재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현재의 시간이다.
이는 자신의 존재 의미에 따라 결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이해한 만큼 존재하고 해석하는 만큼 세계가 넓어진다.
그러므로 예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다시금 결단하기 위한 것이다.
<현상>은 변화하는 것이기에 우리를 속인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 의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훗설이 말하는 현상학에 있어서는 ‘현상’을 괄호로 묶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현상을 괄호로 묶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해석학’이다.
해석학은 신학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으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해석학은 ‘본질’을 ‘자기 자신이 지닌 존재 이해’를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기에 오리네게스는 “하느님은 인간을 영원히 교육시킨다.”라는 말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실존들을‘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모든 ‘현상’은 언제나 ‘해석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은 해석하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즉 현상하는 사람들의 존재의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현대이 문화를 올바로 해석하기위해서 어떠한 잣대가 필요할 것인지 생각해 볼 거리이다.
현대 사회의 특징에 대하여
현대사회는 17c부터 이루어진 서구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체계가 현대 사회(modernism)이다.
이는 마치 근대의 철학적 원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 ‘근대성’이듯 말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 째는 자본주의(capitalism)이다.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인데
이것은 21c까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우리 시대의 당연한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18c 이후 독특한 경제체계가 전 세계로 체계화된 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이고,
이것이 더 나아가 극단주의 자본주의 또는 과잉 자본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마가렛 레첼, 레이컨 등이 말해왔다. 또한 우리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이다.
이는 1997년 IMF를 기점으로 우리의 ‘진선미’의 기준은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는 ‘진선미’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있다.
그러기에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교육’이 되었다.
지금 현 정부가 말하고 있는 ‘성장개발’ ‘4대강 개발’ 이모든 것은 바로 ‘자본주의 논리’들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다.
두 번째는 과학기술이다. 과학이란 자연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며 이것은 자연과학이 된다.
이것은 자연철학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중세시대까지는 우리 삶 속에 자연이 포함된 되었는데 이것이 자연철학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이 자연은 인간의 객체로 바뀌게 되었고,
자연은 인간의 도구화과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객체가 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도구화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과학이 진리의 기준으로 등장되었고 깊이 현대사회에 침투해 있다.
세 번째로 현대사회의 특징은 이성의 시대이다. 이 말은 바로 합리성이란 말과 연결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이성’ 때문에 가능해졌었다.
그래서 후에 철학은 고질화된 이‘이성적 세계’를 뛰어 넘기 위해서
‘영성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대는 이성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많은 이들이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만으로는 ‘본질’ 이나 ‘근원’ ‘직관’의 세계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영’의 세계로 넘어가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영성’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1c를 '영성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성의 시대에 있어서 참된 진리의 인간이란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며 자기 자신이 충족됨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끝으로 이렇듯이 현대사회는 유일하게 한 사회를 프로젝트(project)한 사회가 된다.
특히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프로젝트화 하였다.
- 현대의 표징과 영성, 신승환(가톨릭대학교 철학교수), 2011. 1.4, 성 빈센트 드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한 강의 -
P.S.: 강의를 듣고 (단상)
무엇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중심원리를 <잣대>라 할 때는
이 시대에 진정 우리가 <현상>을 뛰어넘어 본질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잣대>를 무엇이란 할 수 있을까?
나는 오직 이것을 ‘성경 말씀의 렌즈와 비젼’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경의 비젼은 바로 우리로 하여끔
깊이 세상의 본질과 원리를 이해하게끔 하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가치관은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 이유와 의미 목적을 알게하여 준다.
이 세상 안에서 창조의 목적과 존재 그리고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까지 말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우리를 일깨워 주고 또한 인도하여 주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이 본질과 직관을 이해하게 하는 ‘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한 의미 ‘존재의미’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영성 세계’이다.
이 <영>의 세계는 바로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하게 된다.
본질을 직관하게 될 때 모든 존재들은 그 본 모습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드러내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빛’ 속에서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리고 우리가 그 빛으로 모든 존재들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끝으로 이 세계는 하나의 긴 영적여정이 수반 된다.
그리고 이 여정은 공동의 이해와 해석으로 하나의 공동의 이해와 해석의 틀을 가지게 함으로
공동체 안에 깊은 연대와 이해 신뢰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게 하여 준다.
즉 말씀으로 인해 함께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와 해석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그 신뢰는 서로에 대한 작은 사랑의 불꽃으로 자라나 좋은 기운을 서로에게 주고 세상에 주게 된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해석과 체험으로 각자의 서로 다른 삶 속에 분산된 체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처럼
그리고 세상 속에 빛과 소금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작은 공동의 이해와 해석으로 얻어진 이 생명은
작은 밀알의 씨앗이 되어 세상을 생명을 주고 세상을 푸르게 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하늘나라의 이치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알고 듣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참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이 길로 들어오는 사람은 몇 안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참된 공동체와 세상을 이끌어갈 사람들이리라.
마치 성령의 법처럼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은 변화를 가져오며 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과 근원으로 초대,
주님의 말씀으로
공동된 이해와 해석의 틀(체험)로
함께
진리와 생명,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그들을 초대하는 마음이다.
- 마리아 아나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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