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다양한 모습과 “세상”과의 관계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요즘 교회 안에서 특히 본당의 신자들 안에서 ‘말씀’에 대한 관심과 맛들임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정이 지대하다. 특히 소그룹별로 ‘말씀’을 읽고 함께 복음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그것을 또한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마치 초대공동체의 모습을 재현하는 반별, 구역별로 그룹을 지어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소공체가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교구별로 청년성서연수나 그들끼리의 성서 나눔을 즐겨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안에 그들은 삶의 존재 의미와 본질에 대한 질문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들을 함께 모색하며 그들의 삶에 생명력을 심어주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성령께서 교회 안에 일하시는 또 다른 영성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또한 그 말씀이 한 사람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변화시켜주는 그리하여 그 한 사람의 복음적인 삶이 세상 안에 빛과 소금의 되는 것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확신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말씀의 다양한 모습들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황의 문헌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과 토마스 머튼의 「세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1. “ 말씀”을 넓게 이해한다는 것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서론의 끝부분(5항)에 말씀의 육화를 선포하는 요한복음 서문을 이 문헌의 전체의 기본 틀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서문에서 요한복음서의 본문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쓴 제자,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도 주목한 점은 의미가 깊다. 이것은 “말씀”을 넓은 의미로 이해한 것이 된다. 즉 “말씀”이라는 것을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고 할 때는 성경에 글로 적힌 말씀만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체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과의 사귐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지평 안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사람이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말”만이 아니라 그 친교를 전달해 주고 우리가 그 친교를 함께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말씀」7항에서는 이를 지칭하여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유비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200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면서 그들이 발표한 메시지를 참조한다면, 이 메시지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제목들 안에서 우리는 “말씀”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지 볼 수 있다. 메시지 1장 제목은 “말씀의 소리: 계시”이고 2장은 “말씀의 얼굴: 예수 그리스도” 3장은 “말씀의 집: 교회”, 4장은 “말씀의 길: 선교” 로 표현한 것 안에서 우리는 말씀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하나가 말씀이고, 계시의 완성이며 절정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말씀의 얼굴이고, 그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고 모든 이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의 담지자인 교회가 바로 말씀의 집이겠으며, 끝으로 그 소리 온 땅으로 펴져나가고 그 말은 땅 끝까지 번져간다고 노래한 시편저자의 말은 바로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선교로서 말씀의 길로 충분히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 할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넓은 의미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신다는 점이다. 그것은 요한복음서의 서문에서 말하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처음부터 계셨기 때문이다.
1) 말씀으로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
「주님의 말씀」문헌의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제목은 계시헌장의 본래 제목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바로 “말씀”, “대화”라는 인격적인 개념들에서 시작하며 또한 영원으로부터 계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계시헌장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있는 이 문헌 안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셨고, 무엇을 하고 싶으셨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원의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이토록 알려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와 사귀고 싶으셔서 우리가 당신을 알아챌 때까지 계속 우리를 향해서 신호를 보내셨고, 그 모든 신호를 말씀이라고 한다면 “말씀”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으로 공통된 의미를 지니면서도 또한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으로 신호를 보내는 말씀들은 매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아들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신호는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신호, 사랑의 메시지, 사귐의 신호일 것이다. 그 긴 신호의 메시지가 구약성경 안에 다양하게 펼쳐지고, 신약성경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실하게 인간에게 전달되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2) 이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인 말씀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지혜로 새겨져 있음을 보며, 이 세상의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온 우주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깃들어 있고 우리는 이성적인 능력으로도 그것을 알아보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느님을 알 수가 있다. 지혜서 13장 9절의 말씀 안에서 보듯이,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더구나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 졌기에(Imago Dei),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동물과 식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나, 특히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업적을 알아보고 또한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 안에서 유일한 우치를 차지한다.
또한 창조로 시작된 하느님과 세상의 사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진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시며,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이끄신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이다. 세상 만물과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튼튼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된다. 말씀에 귀를 막고 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려고 할 때 인간은 결국 실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제 길을 갈 수 없고 완성에 이를 수도 없다.
3)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축약된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 1-2) 이제 말씀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얼굴을 지니신 분이 된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미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조건 안에 사는 인간과 사귀려고, 그 인간에게 맞추어 당신 자신을 낮추셨던 영원하신 하느님은, 이제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작은 아기가 되신 것이다.
신학적으로 좀 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은 “말씀”의 이러한 다양하고 유비적인 의미를 요한 복음서 서문과 연결시켜 볼 때, 한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과거에 다른 방식들로 우리에게 계시되어 오다가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처음부터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셨다는 것의 연관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에 대한 이해가 된다. 문헌에서는 말씀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부각시키려고 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구약과 신약의 관계, 예언과 성취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욱더 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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