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다양한 모습과 "세상"과의 관계
2. 말씀의 세상과의 관계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과의 관계를 이야기 할 때에는 교회가 말하고 있는 10가지의 사회교리들의 원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원칙의 출처들은 무엇보다 그 첫 자리가 바로 성서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가져다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살아낸 마하트마 간디, 킹 목사 성 빈센트 그리고 교회의 교황들을 열거할 수가 있다. 인간의 생활과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들, 사회참여의 정당성과 그것을 보호받을 권리의 존엄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보호, 형제 자매적 연대성, 평등정신, 보조성의 원리, 그리고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한 공동선의 추구 등 이러한 모든 사회교리들은 그 출처가 바로 성서, 교회의 문헌들과 역사 안에서, 주교회의 그리고 사회단체들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거론되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더 큰 목소리로 울려 펴지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세상과의 관계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구분되고 식별되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이 문제를 말씀과 세상의 말,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들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세상 한가운데 선 우리 시대의 관상가인 토마스 머튼의 ‘세상과의 관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이러한 주제들로 깊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관계 맺는 데 남다른 ‘자기 상대화’능력, 즉 ‘공감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실로 타인(other)의 ‘다름(otherness)’을 선입견과 경계로 대하며 교정해 주려들거나, 가능할 때는 ‘흡수합병’, 불가능 할 때는 ‘제거’ 또는 ‘분단고착’을 선택하기 일쑤인 우리네 일반적 경향을 훌쩍 넘어선 영역에 살았다. 한마디로 그는 탁월한 ‘가톨릭적’ 감각을 태생적으로 갖춘 이였기에 가능하였다.
1) 토마스 머튼의 세상과의 관계
토마스 머튼은 1963년, 수도원 입회 25년 뒤, 그는 그의 자서전 고백록인 ‘칠층산’의 쓰게 된다. 그는 이 책의 일어판 서문에 수도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숨어 있음과 연민으로 세상 모든 곳에 있기 위해 흥미의 대상으로서 세상으로부터 은거한 곳”라고 쓰고 있다. 즉 이 말은 “수도승은 모든 이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모든 이와 하나가 되는 사람이다.”는 말이 된다.
머튼의 삶의 경우에 있어서도, 출가 뒤 고독을 향한 고통스러울 정도록 깊은 열망의 긴 여정을 통해 이 지점에 도달했다.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체험은 바로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도시 루이스빌의 어느 한 골목 - “제4가와 월넛 거리 사이”에서 한 체험이다. 그때 그는 문득, “내가 얼마나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이들에게 속해있듯 이들 역시 참으로 내게 속해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죄스런 방관자의 억측」.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깨달음의 체험이요 ‘계시’의 순간이었다.
그 때 그는 수도원이 마치 ‘인디언 보호 구역’과도 같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거룩한 삶’이란 환상이요 꿈일 따름이었음을 확연히 본 것이다. 자기가 사실상 세상 모든 사람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록 깊이 일치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도원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수도원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써 세상의 모든 투쟁과 고통 안에 있는 내 몫을 참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 나는 이 여인(수산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다니 13,46)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이는 정작 수산나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다니엘뿐이었다. 이 여인의 무고한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모두 세 노인과 공범일 수밖에 없다. 참된 관상은 우리 사회의 누구나가 이런 방식으로 ‘죄의 연대성’이라는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음을 꿰뚫어 보게 한다. 머튼이 수도승 전통의 근본가치처럼 인구에 회자되던 이른바 ‘세상험오(contempus muudi)를 근본에서부터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2) 수도승의 현실 관여
머튼은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그는 “수도승은 본질적으로 현실 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 관상적 삶이 본질에 속한다는 확신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여러 해 동안의 기도와 고독은 그를 자신의 환상과 정직하게 대면하게 했고, 그 영적 투쟁을 통해 그는 마침내 자신과 동료 인간들에게 차라리 숨기고 싶은 세상의 환상도 꿰뚫어 보게 되었다.
“ 수도승 생활과 그 서원으로써 나는 모든 수용소에 대해, 공중 폭격에 대해, 모든 불의한 정치 소송에 대해, 사형 집행의 살인에 대해, 인종차별적 불의에 대해, 허울 좋은 평화의 언어를 일삼으나 실상은 오직 전 지구적 파멸만을 가져올 따름인 경제적 독재와 사회- 경제적 장치 전체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 나는 수도승으로서의 내 침묵을 정치인들과 선동가들의 거짓말에 대한 저항으로 삼는다.”와 같은 발언이나, “내가 핵전쟁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여 복음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의 약속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정치적 함의를 함축하고 있다.”고 한 발언들이 이런 입장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은 “수도승으로서 하기가 몹시 힘든 말이었지만, 수도승이 되기 위해, 그리고 수도승으로 살기 위해 정작 필요한 말들이었다.”고 헨리 나인도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3) 더 세상 안으로, 덜 세속적으로
머튼이 살던 1960년대의 미국에서도 ‘교리’보다 더 큰 권위로 사람들의 의식 또는 무의식을 검열하는 아주 힘센 상투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교회는 세속 정치의 영역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얼핏 정교분리의 원칙을 존중하는 균형 잡힌 말로 들리지만, 이는 비복음적인 성속이원론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정의와 세상의 변모는 복음화의 본질적 구성요소”라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주님의 말씀」100항에서 보는 한결같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정작 멀리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흐름, 또는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세상적’이지 못해서 문제다. 교회공동체는 얼마든지 잘못된 의미로 ‘비세상적’일 수 있고, 그럴 때 실상은 여느 속물들과 다를 바 하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가 쉽다. 머튼은 거두절미하고 신앙이란 모름지기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분법이야말로 나쁜 의미로 사실상 가장 ‘정치적’이란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이 이분법의영역은, 복음이 관심하는 ‘정의’와 ‘세상의 변모’를 신앙의 영역 바깥으로 축출하고, 교회와 정치세력 간의 은밀한 거래와 야합이 싹트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사실 이것은 관상과 활동의 이분법처럼, 정확히 편리한 그만큼 비복음적이다. 왜냐하면, 신앙(관상)쪽에서 보자면 현실관여(활동)가 요구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경청, 연민, 선택, 연대의 의무를 면제해주고 편안한 양심을 보장해 주며, 현실관여(활동) 쪽에서 보자면 신앙, 기도, 관상이라는 필수불가결한 토대를 필요 없거나 부수적이거나 심지어 “낭만에 초 쳐 먹는 소리”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현장’에 곧 바로 뛰어들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요약해 주는 “더 세상 안으로, 덜 세상적으로(Plus in hoc mundo, minus de hoc mundo)”라는 구호는, 머튼이 세상과 수도원(교회)과의 관계를 두고 말하고자 한 바 역시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세상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전적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는”(히브 2, 17)일과, 점점 더 세상적인 정신에서 정화되고 자유로워지는 것, 다시 말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요한 17, 14참조)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애초에 불가능한 그런 관계이다.
4) 말씀 그리고 교회의 말과 문제
머튼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처에 목도하게 되는 언어의 타락 현상이었다. 교회와 정치 영역의 이분법에 관한 상투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거니와 “매스컴이 매일 같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정신적 상투어들을 합리화하기보다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서로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다시 찾으려 노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윤리관은 안타깝게도 간혹 그리스도교리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풍요로운 사회의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가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경제법칙 원리에 따라 공동선은 자동적으로 달성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윤리인 것이다.”「머튼의 평화론」는 말 역시 정확히 지금우리 사회에도 무섭도록 들어맞는 지적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격’이 ‘가치’를 대체하며 ‘돈’의 전횡 아래 인권이나 환경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져 가는 상황 앞에서 ‘침묵의 교회’일 수밖에 벗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럴 때 이런 현실이 복음을 ‘검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이 세상의 말들을 검열하게끔(영적 식별의 노력) 해드리지 않을 때, 세상의 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검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믿는 이의 정신을 말씀이 아니라 이 말들이 지배하게 된다. 즉 세상의 가치와 이데올로기들이 복음적 가치를 상실케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세상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한국의 교회를 변혁시켜 가고 있다”는 29년 전 김수환 추기경의 무섭도록 정직한 진단 역시, 머튼의 예언적 음성과 함께 지금 한국 교회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느껴진다.즉 4대강 살리기 죽이는 일이 ‘살리는’ 일이 되고, 막개발의 광풍이 ‘녹색’이란 말로 포장되어도 얼마든지 통할 만큼, 오늘 이 땅의 언어도 이미 오염되어 버렸다. 결국 “말을 지배하는 자가 생각을 지배”한다고 조지오웰도 말하였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의 말들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머튼은 정치인들의 희생제물이 되어버린 말의 총체적 오염과 타락이 일으키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교회 쇄신은 말의 쇄신에서 시작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의 말들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은 생각하고 살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가 고독의 침묵을 깨고 발언할 용기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였던 것이었다.
나오면서
「주님의 말씀」말씀과 머튼의 영성 「세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다양한 여러 형태와 모습을 보았고, 그 말씀이 세상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두개의 내용들을 접목해 보고자 하였다.
「주님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전해졌는지를 말씀의 소리 즉 그분 사랑의 업적들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말씀의 계시를 통하여 보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지금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언어인 성경을 통하여 매일 매순간 만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당신 자신의 계시와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 정점이 되는 말씀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고 깨닫게 되면서 바로 그리스도가 말씀의 얼굴임을 알아듣게 된다. 또한 그 말씀은 교회 안에서 보존되고 재해석 되며 교회를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하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 즉 말씀의 집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말씀은 한 곳에 머물러만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소식이 전해져야 함을 그리하여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말씀은 마치 길이 모든 곳으로 열려있듯이 모든 곳에 전해져야 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선교적측면의 길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변화되어 가는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머튼의 영성과 교회의 사회 교리적 측면을 아울러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결론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내적으로 복음화 될 때 우리들의 삶은 존재론적으로 변화되고, 그렇지 않은 세상을 객관적 진리에 비추어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말들이 우리들을 읽게 내버려 둘 때 우리는 어느 새 세속화된 삶을 살다는 것이다.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있을지라도, 우리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과 선택은 자신도 모르게 세속적인 삶의 형태와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역사와 문화와 삶 그리고 다양한 사상들을 읽게 할 때 우리는 문명하게 하느님적인 삶, 즉 복음적 삶, 그리고 사랑의 삶을 선택하고 그 삶을 지향하며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살아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이 비복음적이라해서 그 세상이 하느님의 적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충만했으며, 특별히 그 세상 안에 사는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기에 말씀을 읽는 이가 세상에 대한 사랑과 그 안에 사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 그리고 책임의식이 없다면 진정 복음적이라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것은 교회 안에서 사회교리 측면에서 재해석되고 있고, 이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삶을 살아낸 많은 휼륭한 이들의 삶 안에서 이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머튼도 봉쇄의 수도원 이란 세속과 결리된 세계 속에 살았지만 그 깊은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와 영적인 삶의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즉 하느님 생명의 말씀으로 혼탁한 세상을 밝히고, 그 말씀의 소리를 세상을 향하여 냄으로서 “말씀”으로 하여금 세상을 읽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그에 영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달아 알아들었기에 그리고 그이 삶이 복음적으로 사고와 삶으로 바뀔 수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 세상 안에 “빛”이고 “생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빛과 생명이신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그 말씀의 여정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말씀에 멱감는 내면화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말씀의 소리를 낼 수 있고, 세상 안에 말씀이 육화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될 수 있고, 세상 안에 말씀의 담지자가 되어 되는 교회 안에 생명과 성덕으로 살 수 있고, 그 말씀을 세상 모든 곳에 전하는 길인 이 시대의 예언자와 선교사들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참고문헌: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베네딕토 16세, 2010.
「말씀」, 경향잡지(2011/2월), 안소근, p.76-79.
「토마스 머톤, 세상 한 가운데 선 우리 시대의 관상가(1)」,경향잡지(2011/2월), 이연학, P.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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