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창세기)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 선택의 문제

마리아 아나빔 2011. 2. 14. 16:02

 

                                              하느님 자비의 그릇

 

 

 

창세기 해설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신학적인 주제들 가운데 특히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들에서 ‘하느님 선택의 문제’를

 신약성서에서 바오로 서간 로마 9, 19-26을 통해서 재조명하여 보고자 한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선택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야곱이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챘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장자인 에사오를 버리고

동생인야곱을 계약과 축복의 상속자로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거쳐 그에게 이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 하느님의 자유로움 선택 문제를 바울로 사도의 질그릇의 이야기를 통하여 한번 살펴보자.

 

 

 

예정론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어떤 사람은 멸망 받을 자로 선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자로 선정하신다는 것이다.

멸망 받을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반면

 구원을 받을 사람은 잘못된 길을 들어서있더라도 결국은 구원의 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예정론에 반대하여 우리는 성서의 하느님은 결코 인간에게 자유를 박탈하여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폭군이 아님을 역설했다.

 

 

 

하느님의 선택에는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이 특징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예정론, 율법주의, 편협주의의 오류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가 있다.

 

 

첫째, 느님의 선택 근본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지향한다.

창세기의 성조 이야기를 비롯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하느님은 결코 멸망을 위해서 어떤 인간이나 집단을 선택하시지 않고

오직 구원을 위해서만 개인 또는 공동체를 선택하신다.

 

둘째, 하느님의 선택은 일방적이다.

하느님은 방황하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접근해 오시어,

그에게 일방적으로 축복과 약속을 건네주신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인간의 선익과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인간 편에서 손해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ex: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ete)

 

셋째, 하느님의 선택은 배타적이 아니라 표본적이다.

하느님은 하나를 취하시고 다른 하나는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사실은 양자택일일 경우에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을 야곱을 선택하셨다 해서 에사오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그에게도 역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후손이 정착할 땅도 주셨다.

하느님의 선택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리기 위하여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하나의 표본으로 뽑는다.

야곱의 선택은 야곱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인류 전체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 하느님의 선택은 그분의 온전한 자유에 바탕을 두는 한편 인간의 자유를 결코 침해하지 않으신다.

느님의 선택에 대하여 인간은 ‘예’라고 응답할 수도 있지만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그 만큼 인간도 그분의 자유를 존중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선택은 일방적으로 특정한 인간이나 공동체에 주어지지만 인간의 신뢰와 참여를 요구한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이 지향하는 최종목적이 인간구원임을 밝혔는데,

 이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인간편에서 하느님의 선택에 대한 믿음과 자기투신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어우러질 때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ex: 야곱)

 

 

 

 

로마서 9장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선택의 이 다섯가지 특징이 잘 지적되고 있다.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옹기장이의 비유를 통해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

 옹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드는 것은

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지 진흙덩어리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진흙덩어리로 만들어진 천한 그릇이 “왜 나를 천하게 만들었소?”

하고 옹기장이에게 항변하는 것은 옹기장이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택은 일방적이면서 그분의 온전한 자유의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어 바울로 사도는 진노의 그릇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릇을 만드는 목적이 그것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임을 역설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노의 그릇으로 표현되는 악인들을 즉석에서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으신다.

구약성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심판에 더디시고 구원에 신속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이어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이 자비의 그릇으로 표현되는,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훗날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려고 그들을 미리 선택하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만민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행위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구원의 한 예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이 약간 수정하여 펀집한 호세아서의 인용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리라.”

 

 

마지막으로 바울로 사도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 걷는 성실한 사람들,

그분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그 선택에 동참하는 사람들만이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인용한 이사야의 말씀 중에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결코 배타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의 행보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편, 하느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을 하나의 표본으로 삼고자 하신 것이지

에사오를 배척하시기 위한 것이 아님도 깨닫게 된다.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1998, p.181-18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