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창세기)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마리아 아나빔 2011. 3. 20. 21:21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야곱과 에사오 간의 갈등과 투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선택과 축복은 하느님의 자유스러운 뜻에 의한 것이지 인간편에서의 기득권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방적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의 여러 가지 특징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방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던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하느님의 계획과 생각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아브라함이나 야곱, 모세와 다윗, 그리고 신약시대의 베드로도 모두가 이상적이거나 흠없이 완전한 인물이 아니다. 특히 야곱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 파렴치하고 무정한 사람으로 성서는 이야기 하고 있다.

 

 

        즉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선정하신 야곱은 결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출생시부터 그는 형 에사오의 대해 불리한 입장에 있었고,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은 당연히 장자권을 지니고 있는 형 에사오를 더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은 당연히 장자권을 지니고 있는 형 에사오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사악은 동생 야곱보다 형 에사오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묘사를 보면 에사오는 힘도 세고 성격이 남성다와서 사냥을 좋아했고 야곱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얌전하고 유약해서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천막 안에서만 지냈다. 야곱이 가진 최대의 무기는 인간적인 꾀와 성실과 근면뿐이었다. 야곱은 꾀를 써서 형 에사오로부터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훔쳐낸다. 그러나 이렇게 훔쳐낸 장자권을 에사오 앞에서 한 번이라도 행사할 수 있었던가? 또 이사악의 축복을 얻어 낸 후 이 축복의 혜택을 야곱이 과연 얼마나 누렸을까? 형 에사오의 분노와 앙갚음을 피하여 기나긴 방랑의 길을 떠나야 했고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 동안 갖은 학대와 고생을 감수해야 했으며 생전에 다시는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도 뵙지 못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챈 대가로 야곱이 지불한 댓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야곱의 힘없고 가련한 처지는 형 에사오를 만날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에사오의 잘 훈련딘 사백 명이 군사 앞에서 그가 얘써 모은 재산과 남녀 종들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겟는가? 다행히 에사오의 넓은 마음으로 야곱의 과거는 모두 용서를 받았지만 야곱은 에사오와 함께 안정된 생활을 꾸려 나가지 못하고 또다시 방랑의 길에들어섰다. 다시 말해서 에돔 땅 세일에 정착하여 평화롭게 살아가는 형 에사오와는 달리 야곱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돌아다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이 야곱을 축복의 상속자로 삼으신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를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대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함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들의 지혜입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1고린 1, 26-31)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를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인간 사회 안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재능이 중요한 덕목으로 평가되지만, 하느님의 통치 영역 안에서는 모자라는 인간, 빈약한 인간, 가난한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가 최일선에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 선택이 자신이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택함을 받은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야곱도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약한 입장에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때마다 하느님이 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알아보아야 하는 것은 이상적인 인물됨이 아니고 하느님이 인간적인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선택하시어 구원의 목적에 사용할 도구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완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변함없는 믿음을 두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겨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하느님은 구원을 위해 큰 도구만이 아니라 작고 하찮아 보이는 도구도 이용하신다. 언제 어떤 도구를 어떤 모양으로 준비하시고 사용하실지는 그분만이 아시는 계획이요, 그분의 자유인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런 작은 도구로 선택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우리는 우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하느님이 자유와 구원의지에 맡겨 드려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의 결점과 부족에 집착하여 실망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들이 보여 준 커다란 신뢰와 충성으로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그분의 일에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야곱의 후예들인 우리 모두는 그 옛날 아버지 이사악의 집에서, 그리고 하란이나 베델에서 야곱이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은총과 축복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선택이다. 이제 우리는 고린토전서 1장 31절에 기록되어 있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 이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