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창세기)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마리아 아나빔 2011. 1. 17. 17:49

 

 

 

 

                                       믿음과 공로,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윤리적 태도에 대하여

 

 

선택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 9, 6-18)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조합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오랫동안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켜 왔던 ‘믿음과 공로’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인간의 구원은 무엇을 통해 얻어지는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그분의 계명과 율법을 충실하게지킴 으로서 인가?

 

 

결론으로서 우리는 이 성조들의 이야기에서

믿음과 공로는 결코 대립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처음부터 주도권 쥐고 계신다.

그분 스스로 그 계획을 세우셨고, 그분 뜻대로 차근차근 계획이 실현되어 간다.

인간은 그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이 좋으신 분이고 성실하신 분임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의 구원 계획에 협조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인간의 구원을 놓고 ‘믿음과 공로’라는 문제 못지않게

오랫동안 그리스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신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문제가

바로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윤리적 태도’에 관한 문제이다.

이 두 문제들은 일맥상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구원계획과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성조의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은

인간 편에서의 그것을 받을 만한 조건과 자격의 유무에 관계없이 주어진다는 걸 배웠다.

그러나 이 사실을 더 나아가 ‘예정론’의 오류에 빠지게 한다.

 인간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이란 자유를 박탈당한,

하느님이 마련한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이다.

 

 

이러한 예정론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또 하나의 오류가 바로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란 인간은 철저한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스스로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이 예정론이나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선, 성서의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원하고 계신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의 길로 인도하거나, 아무도 멸망을 위해서 선택하시진 않았다.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어떻게든

다시 그 길에서 인간을 건져 내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멸망할 사람들과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부터 정해 놓으셨다는

예정론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과 축복을 당신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특정 인물들을 통해서 전달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하느님의 선택이 여럿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고르시는 것일 경우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때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다른 한 쪽이 버려진다고 여기지기 때문에 불공정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위해 누군가를 선택하실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카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사악, 야곱과 에사오의 경우엔 문제가 심각하게 된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한 쪽이 버려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은 양자택일에 있지 않다.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카인에게도 하느님은 끝내 자비와 관심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으며

그리고 동생에게 장자권과 축복마저 빼앗겨 울분 속에서 나날을 지내야 하는 에사오에게도 후손과 땅을 주신다.

 

 

이 모든 선택들은

사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선택에 앞서 준비하신 작은 선택들이라고 불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뽑으신 것은

그들만을 구원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뽑힌 것은 결코 그들이 잘나서,

 또는 선민이 될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 때문이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단순하면서 감동적인 진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배타적 선민의식, 율법주의, 예정론 등의 엉뚱하고 위험스런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성서의 근본 메시지를 외면하고 인간의 논리에만 집착한 데에서 나온 잘못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는 것 에사오를 ‘미워한다’는 표현은

에사오를 야곱보다 덜 사랑한다는 내용을 고대 근동의 표현법인 과장법에 의해서 전달한 것뿐이지

하느님이 에사오를 배척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인간을 선택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절대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에 주도권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인물이나 민족을 선택하실 때

완전히 자유를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근본적으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그분의 선택은 결코 양자택일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 편에서 할 일은

그분의 구원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구원계획에 협력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53-15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