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31장: 야곱이 고향으로 달아나다

마리아 아나빔 2011. 2. 16. 10:58

 

 

                            성서나눔 34(창세기 31장): 야곱이 고향으로 달아나다

 

들어가면서

 

     위의 성서 본문은 30장과에서 살펴본 본문의 내용과 모순된 부분들이 많이 나올 뿐 아니라 자체 안에도 불필요한 반복과 비논리적인 요소들의 첨부와 충돌되는 요소들이 많다. 이야기의 저자가 여럿이라는 증거이다. 야곱의 이야기는 크게 두 그룹의 저자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솔로몬 시대 때에 예루살렘 왕궁에서 근무하던 서기관 야휘스트 그룹과 남북 분단 이후 북쪽에서 문필활동을 벌이던 엘로히스트 그룹을 말한다.

 

 

Text 안에서

 

창세 31, 1-21: 어서 이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 앞과의 이야기는 주로 야휘스트 문헌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 과의 본문은 엘로히스트 문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모순을 빚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해설해 가면서 살펴보자. 야곱이 라반을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 “저 녀석이 우리 아버지 것을 다 빼돌려 부자가 되었다.”는 라반 아들들의 고발, “라반이 자기를 보는 눈이 전 같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에 대한 라반의 달라진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할아버지 때부터 네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거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여기서 야곱은 하느님의 보호를 약속 받는다. 즉 라반은 전부터 라반 집안에서 떠나려고 생각하였는데, 이때 하느님의 말씀이 그것을 촉구하였다. 야곱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 부인 레아와 라헬을 불러 장인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상의한다. 두 여인은 자매지간이면서도 한 집안에서 남편의 사랑과 안방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켰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이 부인들에게 설명한 떠나야 할 이유는 세 가지로는 라반의 변화된 태도, 야곱의 성실한 노동에 대한 라반의 불공정한 대우,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앞과의 이야기는 보다 세속적인 데 비해 이 과의 이야기는 엘로히스트의 사상이 그 토대를 이룬 탓이어서인지 보다 종교적이다. 야곱이 검은 양과 줄무늬 염소를 많이 얻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앞 과와 이 과의 본문이 서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앞과의 이야기에서는 라반이 비정상적인 색깔의 양과 염소들을 온전히 빼돌리고 난 후, 야곱이 정상적인 양떼 가운데서 흰줄무늬가 있는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검은 양과 줄무늬 염소를 출산해 냈다고 되어 있다. 곧 야곱의 양떼가 불어나게 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역할보다 야곱의 지혜가 강조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반면 이과의 이야기에서는 라반이 가끔 야곱을 속이고 그에게 돌아갈 몫을 떼먹는 수가 있긴 하지만 품삯을 지불한다. 때로는 점박이 양이 때로는 줄무늬 있는 양이 품삯으로 주어지는데 그 양들에게서 태어난 새끼들이 모두 하느님의 중재(하느님의 천사는 야곱의 계획이 하느님의 배려에서 온 것임을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적 원인을 쓰시어 야곱에게 이익이 되도록 마련해 주신다.)로 어미를 닮아 비정상적인 색깔을 갖게 되어 야곱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여기서 아무런 비법을 쓰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라반의 가축을 거두어 그에게 주셨다. 염소에 관한 이야기는 야곱의 꿈에 등장한다. 점박이 염소, 줄무늬 염소만이 교미를 하여 야곱에게 새끼를 낳아 준다. 그러나 여기서 검은 양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 꿈에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는 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초월적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어서 이 땅을 떠나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면서 야곱이 말을 마치자 그의 아내들은 야곱 편에 서서 하느님의 분부대로 하시라고 야곱의 결정에 다를 것을 약속한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부당한 대우와 비리를 고발한다. 아버지는 자신들에게 물려 줄 어떤 유산도 남겨 두지 않았고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먹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 주셔야 할 돈도 혼자 가로채신 거예요”라는 그녀들의 고발은 라반과 야곱 사이에 맺었던 결혼계약을 상기시켜 준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빈털털이 야곱에게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신랑 쪽으로부터 십사년 간의 노동을 약속받았지만 자신의 편에서는 아무것도 신부의 지참금으로 내놓지 않았으니 딸들을 신랑에게 팔아넘긴 셈이다. 또 그렇게 팔았으면 판돈의 일부를 딸들의 몫으로 내놓은 것이 당시의 혼인관습(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에서는, 특히 함무라비 법전에도 실려 있지만, 약혼자가 장인에게 준 신부 몸값의 일부가 혼인 후에는 신부에게 넘겨졌다)이었는데 야곱이 지불한 십사 년간의 노동에서 얻은 이익을 한 푼도 나눠 주지 않고 꿀꺽 삼켜 버렸다. 그래서 그녀들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주신 재산은 우리 것이요, 우리 자식들의 것입니다”하고 당연히 주장하게 된 것이다.

 

- 두 아내의 동의를 얻어 낸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도망을 친다. 앞과의 이야기에 나온 대로 라반의 양떼는 야곱의 양떼에서 사흘길이나 떨어져 있었던 데에다 양털을 깎는 작업이 여러 날 걸리기 때문에 야곱이 도망 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큰 잔치(양털을 깎는 것은 며칠씩 걸리는 일로서 잔치를 베풀며 기쁨 속에 거행하였다)가 벌어지게 되는데 라반이 그의 두 딸과 사위를 초대하지 않은 걸 보면 “우리를 남처럼 여겼다”는 딸들의 불평이 근거가 있는 것이다.

 

-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재산을 늘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충직한 남녀종들을 많이 거느리면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했지만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의 떠나라는 명령에 즉시 복종하여 고향을 향해 떠난다. 또다시 순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무런 미련 없이 고달픈 순례길에 접어든 야곱을 하느님께서는 즉시 동행해 주신다.

 

 

창세 31, 22-42: 아버지 이사악을 돌보시던 두려운 분이 내편이시다

 

- 위의 성서본문은 야곱이 자신의 뒤를 쫓는 라반의 추적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는 내용이다. 장인 집에서 이십 년 동안 불철주야 힘든 노동을 했건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야곱을 하느님께서 낱낱이 지켜보시고 마침내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어 야곱과 재산과 지위를 확보해 주신다. 라반의 집을 떠난 야곱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길르앗 산악 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 지역은 하란에서 무려 600km나 떨어진 거리이다. 뒤늦게 야곱이 도망친 것을 깨닫고 즉시 출동한 라반은 칠 일만에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따라 잡았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전에 하느님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를 가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야곱이 하는 행동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신다는 주제는 엘로히스트 문헌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대목은 엘로히스트 문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라반이 야곱을 질책하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야곱이 자기 딸들을 데리고 자기를 속인 채 은밀히 도주한 점자기네 집안의 수호신들( 집안 수호신- 테라핌 본래는 부패물이라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진 경멸어로 여기서는 우상을 가리킨다. 즉 사람의 모습을 한 신상이며 집안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후르인 사이에서 이러한 신상을 가진다는 것이 유산을 받을 권리의 증명이 되었다. 라헬은 이러한 신상에 미신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을 훔친 점이다. 첫 번째 질책에 대해 야곱은 장인에게 자신의 출발을 알릴 경우 그의 딸들인 자신의 두 아내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할까봐 몰래 빠져나왔다고 변명한다. 사실 집안의 모든 가솔과 소유물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던 욕심쟁이 라반이었기에 야곱이 딸들과 외손자들과 상당한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자기 집안에서 떠나가는 걸 호락호락하게 허용할 리 만무하다.

 

“네가 아버지 집이 너무 그리워 떠나간다는 것은 알고도 남을 일이다.”라는 라반의 말은 야곱에 대한 그의 이전 행동으로 보아 마음에 없는 빈말이다. 라반의 절대적인 권위행사를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중재 이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 라반의 첫 번째 꾸지람에 대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변명했던 야곱은 “수호신들을 왜 훔쳐 냈느냐?”는 라반의 둘째 꾸지람에 대해서는 완강히 그 사실을 부인하다. 실제로 야곱은 장인 집의 미신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선 평소에 관심도 없었기에 자기 가족들 중 어느 누가 그 집의 수호신들을 훔쳐 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집의 수호신을 훔치는 행위는 그 집의 유산을 탈취하는 행위와 똑같이 취급되었다. 야곱은 “우리들 가운데 장인 댁 수호신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죽이셔도 좋습니다.(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신전에 속하는 것을 훔치는 것은 죽을죄에 해당되는 죄였다.)”하고 자신 있게 각오했다는 선언과 마음대로 뒤져보라는 요청인 것이다. 이는 라반의 우상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니라 분명 자기 죄에 대한 무죄를 자신 있게 말한 것이 된다. 라반은 야곱의 천막을 시작으로 레아의 천막, 그리고 두 여종의 천막 순으로 뒤져 나가다가 수호신들을 훔친 장본인인 라헬의 천막에까지 왔다.

 

- 라헬은 낙타 안장에 수호신들을 넣고 그 위에 올라앉은 채로 라반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한다. 라헬은 라반의 우상을 훔치고, 야곱은 라반의 마음을 훔친다. “아버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월경 중이이서 아버님께서 오셨는데도 낙타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라헬은 생리 중이라 아버지에게 인사하기위해 일어서지도 가까이 다가가 포옹하지도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라헬의 말은 레위기의 법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백발이 성성한 어른 앞에서 일어서고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여라.”라는 권고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생리 중인 여자에 대해 레위기는 매우 엄격한 규정을 세워 놓고 있는데 15장 20절 이하에 보면, “ 그 여인이 걸터앉았던 자리도 부정하다. 그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닿은 사람은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저녁이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고 되어 있다. 이 규정은 사람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불결하다는 고대인들의 비과학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경신례와 관련하여 부정을 탄 채 하느님 앞에 나섰을 때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통념 때문에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은 더욱 엄격하게 이 규정을 지켜야 했다. 라반의 우상들은 낙타 안장 속에 갇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구나 생리 중인 라헬의 몸에 닿아 부정을 타게 되었다.

 

- 라헬의 재치로 상황은 역전된다. 기세등등하던 라반이 오히려 수세에 몰리자 ‘발꿈치를 잡은 자’ 야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사람들과 라반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인을 몰아세운다. 야곱이 장인의 집에서 고통스럽게 보냈던 이십 년의 세월은 자기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상적인 목자의 삶으로 엮어진 것이었다. 가축의 유산을 철저히 방지하였고, 수양 한 마리 훔친 적이 없었다. 가축이 맹수에게 물려 죽으면 야곱은 스스로 물어 냈는데 반해 , 장인은 양 도둑이 들어 가축을 훔쳐 가면 그 손해를 야곱에게 물렸다.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밤잠을 설쳤다. 한마디로 야곱은 자신의 권익을 포기했고 라반은 주인으로서 고용인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원래 맹수가 가축을 물어 죽이면 죽은 양이나 염소의 피 묻은 가죽과 시체의 나머지 부분을 주인에게 보이고 그 값을 목자 자신이 물지 않아도 되는 법이었는데 라반에게 이 규정이 통하지 않았다. 라반은 목자의 몫까지 착취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38-40절은 구약성서에 묘사된 “착한 목자”. 즉 유산이 없었다는 것은 야곱이 양떼를 잘 보살피고 사육법이 휼륭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야곱은, 뒤의 모세의 율법(탈출 22) 및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관습법에 마련되지 않은 일까지도 했다. 함무라비법전에 따르면 목자에게는 어떤 일정한 수의 양을 먹을 수 있게 허용하고 있었다. 또 양이 맹수에게 물려 죽을 경우 그 목자에게는 책임이 없었다.

 

-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이제 더 이상은 라반의 부당한 착취와 소홀한 대접 밑에서 보람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야곱을 버려두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꿈속에서 라반에게 나타나시어 야곱에 대한 그의 부정한 행위들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신 것이다. 야곱의 하느님은 생리 중인 여자가 깔고 앉은 낙타 안장 속에 쳐박혀 꼼짝 못하는 라반의 수호신들과는 달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

 

 

창세 31, 43-32,3: 돌무더기를 쌓아 너와 나 사이에 증거로 삼자

 

이 대목은 서로 다른 두 문헌이 혼합되어 있는 복잡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두 문헌이란 석상을 계약의 증인으로 내세우는 엘로히스트 문헌과, 갈르엣이라 불리는 돌무더기를 계약의 증인으로 내세우는 야휘스트 문헌을 말한다. 본문을 해설해 나가는 동안 두 문헌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석상과 돌무더기에 대한 언급이 본문 안에서 논리적인 순서 없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두 문헌가설을 미리 소개하는 것이다.

-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곱의 정당한 판단을 받고 라반은 당황했다. 그러나 야곱에게 속한 두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얼마간의 재산이 모두 자기에게 속해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도 “내 딸들과 그 애들이 낳은 아이들을 이제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라반의 말은 이미 풀이 죽어 있다. 라반은 야곱의 세찬 반발과 비난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평화조약의 체결을 제안하고 나선다. 그리고 “돌무더기를 쌓아 너와 나 사이에 증거로 삼자.”고 야곱에게 요청한다.

 

- 라반이 증거로 요구한 것은 돌무더기였는데 야곱은 먼저 석상을 세우고 그 다음에 돌무더기를 만든다. 서로 다른 두 문헌이 혼합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논리적 모순인 것이다. 석상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베델에서 하느님을 꿈에 뵙고 세운 바 있었던 기념비이다. 이 석상 또는 돌기둥의 숭배는 가나안의 풍산신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에 의해서 많은 배척을 받았다. 야곱이 세운 석상의 의미는 하느님께 단순히 감사할 목적으로 만든 기념비 이상의 의미는 없다. 돌무더기를 다 만든 야곱 집안과 라반 집안의 사람들은 돌무더기 옆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이 잔치는 아직 정식 평화조약을 맺기 이전이니 화해의 잔치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 라반은 아람 족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조부는 아람 족의 선조로 알려져 있는 나홀이었기 때문이다. 라반과 야곱이 만든 돌무더기는 라반 쪽에서 아람 말로 여가르사하두다라고 불렀고 야곱 쪽에서 히브리 말로 길르엣(요르단강 동쪽, 아르논강 북쪽 전지역의 명칭)이라고 부렀는데 둘 다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이다. 이 길르엣이라는 이름에서 길르앗 산악지대와 이 지방의 도시 길르앗(호세 36, 8;12,120의 명칭이 나왔다. 야곱이 세운 석상은 미스바라고 불렀는데 이 미스바는 ‘주님께서 지켜 보실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편 미스바는 기둥이라는 뜻의 마쎄바와 자음이 같다. 판관기에 의하면 미스바는 길르앗 지방의 한 도시로 등장한다(판관 10,17; 11,11.29 34). 이 지역은 판관 시대에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다.

 

- 석상과 돌무더기를 증인으로 삼고 야곱과 라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 째 내용은 라반이 자기 딸들에 대한 야곱의 성실한 태도를 확약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여기서처럼 부인의 보호, 또는 영토의 경계와 관련한 계약이 맺어졌다. 이 때 일반적으로 신이 계약의 증인과 보증인이 된다. 하느님은 석상 높은 곳에서 야곱이 라반의 두 딸을 구박하거나 그들을 버리고 새 장가를 가지 않나 지켜보실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용은 라반과 야곱 사이의 불가침협정이다. 두 편은 석상과 돌무더기를 넘어 서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불가침협정은 실제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길르앗 산악 지대는 아람 족과 이스라엘 족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서 기원전 9세기와 8세기 동안 내내 두 민족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이 격전지에 전쟁이 그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이 계약을 첨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야곱과 라반은 각자 자기 할아버지의 신을 두고 맹세했다. 둘 중에 어느 누가 이 돌무더기와 석상을 넘어 침범하면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의 하느님(결국 그들 아버지 데라의 하느님 - 라반의 기원은 다신교적이지만, 이 절 후반에서 야곱의 맹세가 일신교적인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이 그 진위와 적법성을 판결해 주실 것이다. 이는 고대의 관습에 따라 양쪽의 신들이 증인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의 끝에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의 하느님이 결국 한 분이심을 말하는 후대의 첨가문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계약을 확인하는 뜻으로 동행한 일가친척들을 모두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그 밤을 함께 산에서 지냈다.

공동식사는 일반적으로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우정 곧 연대성을 굳히는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의미하며, 계약은 이 공동체에 법적이며 강제적인 효력을 부여한다.

 

- 뒤따라오는 구절, “이튿날 아침 라반은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준 다음 길을 떠나 제 고장으로 돌아갔다.”는 대목부터 32장 마지막 절까지는 장 절 표시에 있어서 히브리어 사본과 다른 번역본들이 서로 틀린다. 히브리어로 된 마조렛 본문에서는 이 대목부터 32장이 즉시 시작되고, 희랍어 70인 역본과 라틴어 불가타 역본에서는 이 구절이 아직 31장에 걸려 있다. 곧 31장 55절로 되어 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 보면 절을 표시하는 여백의 작은 숫자들이 이 구절부터 32장 마지막 절까지 이중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 라반이 떠난 뒤 야곱도 길을 떠났다. 그리고 도중에서 하느님의 사신들이 천사들을 만났다. 천사들은 에사오를 만나기에 앞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곱을 격려해 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의 출현은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는 대복을 미리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성서는 당시의 다신중의에 반대해서, 하느님의 천사(또는 사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선조들이 믿었다고 자주 말한다(16장과 18장). 야곱은 그 장소를 마하나임이라고 부르는데 ‘하느님의 진영’ 또는 ‘두개의 진영’을 뜻하며,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 야곱은 베텔에서와 같이 이 장소도 하느님이 당신의 심부름꾼인 천사들과 함께 거처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기세등등하게 야곱을 추적해 온 라반은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야곱에게 설득을 당하고 엉뚱하게도 야곱의 안전을 보장해 줄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모든 것이 야곱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라반은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돌아간 반면 야곱은 라반에게서 불가침조약뿐 아니라 자식들과 아내들에 대한 축복까지 얻어 낸다. 하느님을 믿고 이십 년 동안 이국땅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 마침내 보답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의 처사를 보면“ 권세 있는 이들은 권좌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다.”라는 마리아 찬가의 한 소절을 생각나게 한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77-193.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29-135.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13-320.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