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32장: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다

마리아 아나빔 2011. 2. 20. 19:26

 

 

 

                     성서나눔35(창세기 32장):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다

 

 

들어가면서

 

     일반적으로 이 문헌은 엘로힘계와 야훼계 전승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전하는 전승 자체의 모호성에서 분명하지 않은 점들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야곱이 20년이나 떠나 있는 동안 에사오는 후에 에돔의 평야라고 하는 지방으로 옮아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는 후에 이두매아인이 살았다. 그것은 세일 땅이며 사해의 남쪽 기슭에서 아카바만에까지 퍼진 산악지대이다.

 

    야곱은 에사오가 강한 민족의 으뜸이 된 것을 알고, 에사오가 내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그 나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가 선물을 먼저 보낸 것은, 언제나 그러하듯, 야곱의 교묘한 수단으로 에사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한 것이었다. 야곱은 기가 막힌 선물을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 매번 “야곱은 뒤에 옵니다.”라고 종에게 말하게 하고, 에사오를 그 때마다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가족과 재산을 야뽁강나루 맞은 편으로 건너게 하는 일로 정신없이 바쁠때 에사오의 기습을 받지 않도록 밤중에 그들을 건너가게 하였다.

 

     이야기의 내용은 야곱의 영리함을 한껏 나타내 주고 있는데, 그의 외교술, 그의 약삭빠르면서도 교활한 책략은 에사오를 완전히 눌러 버린다. 그것은 정신과 근육의 싸움에서 정신이 근육을 눌러 이긴 것이 된다. 에사오와의 대면은 야곱의 삶 전체를 극적인 방법으로 특징지우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비유가 되는 하나의 사건, 즉 씨름 사건으로 일시 중단된다.

 

     하느님이 야곱과 씨름을 벌이시는 대목을 이해하려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말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말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얼마간 실제적인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전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의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축복이다. 자기 성격대로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서 축복을‘받아 낸’ 것과 어느 정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에게서 축복을 얻어 내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야곱의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지만(씨름 상대는 막다른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야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따라서 어떤 순수한 의미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권한을 갖게 할 만큼 그렇게 강력하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분명히 힘을 가졌으니, 하느님 자신으로 밝혀진 그 신비로운 씨름꾼에게서 축복을 ‘억지로 받아 낸’ 것이다. 야곱은 시합에서 축복을 얻어 내지만 부상을 당한다.

 

     이 이야기는 야곱을 첫째가 되기로 결정된 자, 축복을 받기로 결정된 자, 어떤 시합에서도 이기기로 결정된 자로 축약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 첫째가 되고 사람과 하느님 양쪽에서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과 겨루어서 얻은 그의 승리는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된다. 하느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시는데, 이는 당신이 야곱에 대해 권한을 가졌음을 뜻한다. 또한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은 자신을 내줌을 뜻하기도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름 밝히기를 거절하시지만, 야곱이 목숨을 걸고 요구한 복을 내려주신다. 여기서 ‘축복해주다’와 여기의 ‘복을 내려주다’는 히브리말에서 똑같은 동사이다. 사람과 사람끼리는 축복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하시는 하느님과 벌인 이 ‘야곱의 씨름’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종종 하느님의 신비에 직면한 신앙인의 영성적 투쟁과 끊임없는 기도의 효력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즉, 이 대목에서 전통적으로 특히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 발견되어 왔다.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커다란,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못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행위인 기도는 기도하는 인간을 반드시 변형시키게 마련이다.

 

 

Text 안에서

 

창세기 32, 4-22: 이 못난 아우 야곱이 문안드립니다

 

    이 과의 이야기는 에사오의 살의에 찬 분노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갔던 야곱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도망자의 불안한 신분으로 아버지 집을 나선 야곱은 하란으로 가다가 베텔에서 꿈에 천사를 만나서 하느님으로부터 약속과 축복을 받고 커다란 위로와 희망 속에서 순례의 길을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형 에사오를 정면으로 만나야 하는 큰 부담을 안고 역시 불안한 발걸음을 천천히 고향으로 옮기고 있다. 어차피 한번 넘어야 할 고비이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워낙 큰 것이어서 형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빠진 야곱에게 베텔에서 꿈에 만났던 천사들이 그를 격려하고 그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또다시 나타나준 것이다. 한편,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 야곱은 하느님의 도움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인간적 지혜를 총동원하여 에사오의 환심을 사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 본다. 성서는 당시의 다신주에 반대해서, 하느님의 천사(또는 사자)들이 있는 곳에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선조들이 믿었다고 자주 말한다(16과 18장).

 

- 야곱은 형 에사오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하인들을 보냈다. 야곱은 하인들로 하여금 형에게 비굴하리만큼 낮추면서 문안을 올리게 한다. 야곱이 하인들을 통하여 형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몸 붙여 살았다는 구차한 변명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는 보고도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는 형에게 재산의 많은 것을 건방지게 자랑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니라, 야곱의 저자세 말투로 보아 “원하신다면 형님과 이 재산을 기꺼이 나누고 싶습니다.”는 원의와 “아버님의 유산은 형님께 완전히 양보하겠습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하인들은 에사오의 전갈을 가져오지는 않고 그가 사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상황만을 보고한다.

 

- 야곱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되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는 전쟁을 위한 강력한 군대 조직체가 아니라 가축떼와 남녀 하인들과 가족들로 구성된 목가적인 가정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치른 세일 지방에서 다른 족속들과 생존의 사투를 벌리기 위해서 에사오에게는 잘 훈련된 군사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언제나 그들을 대동하고 다녔을 것이다. 야곱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에사오가 자기에게 복수하려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격해 오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야곱은 궁여지책으로 무리를 두 진영으로 나눈다. 만약 한 진영이 짓밟히면 그 사이에 다른 진영이 줄행랑을 쳐 반절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진영으로 나눈다는 대목은 앞 과에서 언급한 야곱의 숙영지 마하나임의 기원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 이제 인간적으로 필요한 조처는 다 취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도우심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야곱의 기도는 죄 고백의 요소가 빠져있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성서의 기도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호칭을 곁들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이 하신 약속을 상기시켜 드린다. 그분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으로서 선조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셨듯이 하란의 삼촌 댁에서 야곱 자신에게도 나타나시어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네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32,3)” 라고 약속한 것을 상기시켜 드린 다음, 야곱은 자기 자신을 한껏 낮추는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언급한다.

 

- “당신께서 이 종에게 베푸신 한결같은 사랑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분의 성실성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그분의 구원적 행위들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야곱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하소연한다.

“저를 형 에사오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에사오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여기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죽인다는 표현은 철저한 집단학살을 가리킨다(호세 10,4). 마지막으로 야곱은 하느님께서 중재하셔야 할 이유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성실성에 대해 언급한다. 야곱은 “여기서 에사오에게 학살된다면 ‘네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나리라’(참조:28,14)는 당신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고 항변하였다.

 

- 기도를 마친 후 야곱은 “그 날 밤 자기 소유 가운데에서 에사오에게 바칠 선물”을 골라 낸다. 양, 염소, 낙타, 나귀들을 암수 골고루 섞어 도합 550마리의 가축을 에사오에게 바칠 선물로 따로 갈라놓았다. 대단한 선물인 것이다. 이 선물에는 형 에사오에게서 훔친 축복의 결과를 되돌려 주려는 야곱의 의중도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야곱이 하인들을 시켜 에사오에게 선물을 바치는 방법은 고단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한 무리의 선물이 다가올 때마다 에사오는 새로운 선물을 기대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최상의 선물인 야곱이 등장하게 된다. 좋은 선물에는 누구나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선물이 점점 더 좋은 것으로 바뀌어 계속 주어질 때 주는 자의 뜻을 거절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앞서 가는 하인들로 하여금 에사오에게 선물을 바칠 때마다 “당신의 종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라고 말하게 한다. 이런 겸손한 말투와 값진 선물들을 대하면서 화를 내고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에사오를 만나기에 앞서 보여 준 야곱의 태도는 자신의 과거 잘못에 대해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지와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어떻게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준다. 야곱은 자신을 못난 동생, 에사오의 종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한껏 낮추고 사죄의 표시로 값진 선물을 바치는가 하면 에사오에게 자신의 선물과 진실한 마음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간절히 청한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중재도 요청했던 것이다.

 

 

창세 32, 23-33: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이 대목은 원래 세 가지 기원을 밝히는 이야기가 그 뼈대를 이루고 있다. 곧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브니엘 지역의 기

, 그리고 특정 음식을 기피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은 야곱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와 밤새 씨름하여 그의 축복을 얻어 낸 사건인데 이 사건의 기록 뒤에는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진 민담이 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옛부터 급한 격류가 흐르는 큰 강가에는 귀신이 살고 있어서 뭇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힘센 장사가 나타나 귀신과 싸워 이기고 강을 건너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는 얘기가 있다. 인간과 귀신이 싸울 때 한밤중엔 귀신이 우세하지만 새벽이 되면 사람이 우세하게 된다는 내용도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귀신은 낮에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벽이 다가왔다는 표시로 동이 터오거나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 야곱은 지금 절박한 위기 상황에 몰린 채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야뽁 강을 건너 자기와 가족들을 살해할지도 모를 형 에사오를 만나야 하고, 가나안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 형을 속여 이사악에게서 축복을 얻어 낸 야곱은 하느님 앞에서 지금 축복을 얻어 내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하느님에게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고 정면승부 이외엔 다른 길이 주어져 있지 않다. 야곱은 이 싸움에 이김으로써 에사오와 맞닥뜨릴 용기를 얻게 되었고 아버지의 고향 가나안 땅에서 힘차게 새살림을 차려 나가게 된 것이다.

 

- 야뽁 강은 현재 ‘푸르다’는 뜻의 제르카 골짜기를 말한다. 이 골짜기는 와디 곧 우기에만 개울이 형성되어 그 물줄기가 요르단 강으로 이어지는데 사해로부터 북쪽의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본문에 의하면 야곱이 가족과 소유물을 안전하게 강 남쪽 기슭으로 건네주고 다시 야뽁 강을 되 건너 강 북쪽의 브니엘로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브니엘이라는 이름의 원뜻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이해가 잘 안가는 행로를 정한 것 같다. 이곳에서 야곱은 느닷없이 낯선 남자를 만나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밤새도록 씨름을 한다. 이야기의 저자는 이 사람의 신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데 새벽에 도망가야 한다는 것으로 보아 강에 사는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나중에 본인과 야곱의 말을 통하여 이 사람이 하느님을 대표하는 심부름꾼임이 드러난다.

 

- ‘씨름하다’의 히브리 단어 ‘야박’은 강 이름 야뽁과 같은 자음을 가지고 있는데 저자가 강 이름을 두고 말장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이 아 낯선 사나이보다 우세하자 사나이는 야곱의 환도뼈를 물러나게 한다. 동이 터오자 사나이는 자기를 놓아 달라고 청했지만 야곱은 그를 붙잡고 축복을 내려 주지 않으면 결코 놓아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 여기서 야곱이 요구하는 축복이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초자연적 힘’일 것이다. 이로써 야곱은 자신의 환도뼈를 단 한방으로 다치게 한 이 신비스러운 남자가 초자연적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비로운 상대자는 “엘로힘”이시다. 이 말은 하느님의 일반 호칭인데, 때로는 “천사”란 뜻이 되기도 한다. 즉 호세아 12장 4-5절의 야곱의 상대 “하느님의 천사”는 “엘로힘”을 설명한 것이다. “그분”이 동이 트는 새벽에는 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이 이야기가 매우 오래된 것임을 말해 준다.

 

- 신비스러운 이 남자는 야곱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대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이 남자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준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원래 ‘하느님과 함께 겨루었다’, ‘하느님께서 겨루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강하게 두러내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본문의 저자는 이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해석인 ‘하느님과 함께 겨루었다’는 의미로 이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강가에서 하느님과도 겨루어 냈지만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다. 곧 에사오와 라반과의 갈등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한편, 이름을 바꾸어 주는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새로운 사명과 새로운 삶에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야곱은 에사오에게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서, 그리고 남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방랑자가 아니라 선조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의 상속자가 되어 가나안 땅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형성하는 원줄기가 된다.

 

-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후 이번에는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야곱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이름이 불려지는 자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비의 남자가 야곱의 이름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 데 반하여 야곱은 그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니까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최소한 이 낯선 남자는 야곱에게 복을 내려 준다. 곧,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야곱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아침에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와 자신이 간밤에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구약성서의 일반적인 상식에 의하며 하느님을 만나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게 되어 있다. 물론 역설적인 이야기로 하느님을 만나고도 살아남은 자에 의해서 하느님 체험이 보고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야곱은 간밤의 하느님과의 씨름에 승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겨우 살아남았음을 감지덕지하고 있다. 그리고 씨름한 장소에 브니엘, 곧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가 떠오를 때 낯선 방문객은 사라져 버리고 야곱만이 힘겨운 싸움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떠난다. 그리고 야곱이 혼자 뒤에 남은 곳은, 아마 그가 낙오자가 없나 살피기 위해 머무른 북쪽 기슭으로 풀이되며, 또 강을 건너보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가게하고 그만이 머물렀던 남쪽 기슭으로도 풀이한다.

 

-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 이유를 야곱이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환도뼈를 다쳤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환도뼈란 “힘줄”, “혈관”이라는 번역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좌골신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율법이나 탈무드의 음식에 대한 금기조항 가운데 환도뼈 힘줄을 먹지 말라는 규정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후대이 편집자가 유목민 시절의 음식 규정을 삽입한 것 같다(오래된 가필로 추정). 말하자면 오랜 옛날에 있었던 음식 규정을 삽입함으로써 편집자는 그 이야기가 실제로 오랜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는 축복에 대한 야곱의 집착이다. 야곱은 이미 이사악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베텔과 하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약속받은 바 있지만 에사오와의 대면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보다 확실하게 그 축복을 얻어 내고자 하였다. 야곱이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가지는 기대와 신뢰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하느님은 열렬히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보다 넓은 미래를 보장해 주실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94-210..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35-138.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21-324.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