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29장: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하다

마리아 아나빔 2011. 1. 29. 10:37

 

 

 

                  성서나눔32(창세기 29장):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하다

 

 

들어가면서

 

     29장에서 31장까지 소개되는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는 원래 독립된 전승으로서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야곱이 하란에서 그의 외삼촌 라반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라반은 모진 사람으로 야곱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만 야곱은 쉽게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원하던 아내를 얻기 위해 일하는 과정에 있어 용기와 결단력을 나타내며 또 자기 가축떼를 늘리는 데 있어서도 재주를 한껏 발휘한다. 하느님이 야곱이게 축복을 내려 대가족과 번영을 주신 것은 야곱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이다. 여기 29장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야훼계 전승에 속한다. 그리고 약간 사제전승을 짜넣은 듯하다(24, 29절). 이 장과 다음 장은 야곱과 라헬의 만남, 야곱의 이중 결혼 및 그 자손들, 마지막으로 그의 재산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Text 안에서

 

창세 29, 1-14: 너야말로 내 골육임에 틀림없다.

 

- 우리가 읽은 이 이야기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에 도착하여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는 대목을 전해 준다. 이 대목은 전체적으로 야훼스트의 작품이다. 우물가에서 신부감을 만난다는 주제는 이사악의 신부감을 찾아 너선 아브라함의 종의 레베카를 만날 때와,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시뽀라를 만날 때에도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물은 만남의 장소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 야곱은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갔다. 여기서 동방이라는 말은 팔레스티나에서 동쪽 즉, 야곱에게 전혀 낯선 어떤 곳을 가리킨다. 야곱이 우물가에 도착해 보니 세 무리의 양떼들이 모여 있었고 목자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들에게 먹이고있었다. 우물의 입구는 보통 지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먼지로 오염되거나 지나가는 가축떼나 행인이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지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그 입구는 커다란 돌뚜껑으로 봉해 놓았다. 이 우물은 24장에 의하면 하란 성 밖에 위치해 있었다. 세 무리의 양떼들에게 목자들이 물을 먹이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물의 귀중함을 아는 유목민들이 우물의 물을 혼자서 독차지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규칙을 잘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커다란 돌뚜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고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져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중에 이 같은 사실들은 라헬을 기다렸다가 돌뚜껑을 다시 여는 행위로도 증명이 된다.

 

- 야곱이 목자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목자들은 하란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드디어 멀고 먼 여정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야곱은 나홀의 아들 라반의 안부를 물었다. 나홀은 창세기 11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의 동생으로 소개되고 있고 24장에서는 라반과 그의 누이동생 레베카의 선친으로 묘사된다. 목자들은 라반이 편안하게 잘 지낸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때 마침 멀리서 양떼를 몰고 우물가로 다가오는 소녀를 라반의 딸 라헬이라고 소개한다. 아마도 목자들은 꼬치꼬치 캐묻는 야곱이 귀찮아서 라반의 딸에게 직접 물어 보도록 그를 라헬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다. 라헬은 히브리말로 암양이라는 뜻이다. 유목민들의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자유롭게 양을 치며 들판에서 일했고 얼굴을 베일로 가리지 않았다.

 

- 라헬이 다가오는 동안 야곱은 목자들에게 “아직 대낮이어서 가축을 모아들일 시간이 아닌데 왜 양떼에게 물을 먹여 풀밭으로 데려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우물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한 번 더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어서 떠나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야곱은 라헬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껏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목자들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목자들은 라헬과 그녀의 양들이 나타났으니 그들을 가다렸다가 우물에서 돌뚜껑을 굴려 내고 양들에게 물을 먹여야 한다고 대답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물의 물을 혼자서 독식하거나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돌은 모래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또 가축이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라헬 혼자의 힘으로는 무거운 돌뚜껑을 꿈쩍도 할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 양치기 소녀 라헬이 드디어 우물가에 도작했다. 야곱은 선뜻 나서서 혼자 힘으로 우물의 무거운 돌뚜껑을 굴려 내고 라헬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여 준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노는 방안퉁수가 아니다. 험난한 여행길에서 야곱은 많은 것을 배우고 건장하고 용감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야곱이 엄청난 힘으로 이 무거운 돌뚜껑을 밀어 냈다는 사실은 나중에 32장에서 하느님과 밤새도록 힘겨운 씨름을 했다는 이야기를 미리 준비시키고 있다. 야곱은 사촌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운다. 입맞춤은 야곱이 라헬을 친척으로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소리내어 우는 이유는 낯선 이국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손쉽게 친척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리고 하란에 도착하기까지 멀고 먼 여행길에서 겪었던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들이 생각나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라헬을 만나 취한 야곱의 일련의 행동들, 곧 선뜻 나서서 하란 지방의 우물가의 규칙을 깨뜨리고 돌뚜껑을 혼자 밀어 냈으며, 물을 길어 라헬의 양들에게 먹이고 그녀에게 입맞추는 연속적인 행위들은 그의 성격을 시사해 준다. 그는 ‘발꿈치를 잡은 자’로서 기회가 생기면 주저없이 포착하고 주어진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적극적인 인물이다.

 

- 야곱으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그의 외삼촌이라는 말을 듣고 라헬은 기뻐서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한다. 라반은 멀리 시집간 누이동생의 몸에서 난 조카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나와 조카를 껴안고 입을 맞춘 후, 그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조카로부터 레베카의 시집살이와 사돈댁의 내력을 다 듣고 난 라반은 “너야말로 내 뼈요 내 살이로구나”하고 반가워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직도 근동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씨족의 일치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관습을 보게 된다. 야곱은 그곳에서 편히 한 달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에 라반은 야곱을 지켜보면서 그의 효용가치를 살핀다. 그리고 그가 건강하고 성실한 일꾼이라는 걸 알고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우리는 라반이 야곱에게 일을 시키고 정중하게 대한 것은, 야곱의 힘과 넓고 큰 도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에게 리브가가 열흘만이라도 집에 있다 가게 해달라고 청하던 라반이 아니었던가?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의 지연작전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떠나 보낼 때는 에사오의 화가 가라앉기까지 잠깐 동안만 피신해 있다가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 잠깐이 라반의 농간 때문에 수십 년이 되어 버려 결국 레베카는 다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없게 된다.

 

- 야곱이 라헬과 라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좋은 인상을 주며 깊은 골육지정을 맛보았다. 첫 만남이란 흔히 이처럼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매일 한솥에서 밥을 먹고 한 집 울타리 안에서 살다 보면 서로의 이기심들이 발동되고 상대방의 약점들이 눈에 띄게 되기 마련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보면 새로 들어온 조카 야곱 때문에 라반 집안은 갈등과 불화가 잦다. 이 갈등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만남과 모든 가정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오직 야곱처럼 성실하신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갈등을 헤쳐 나가는 사람만이 갈등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창세 29, 15-30: 야곱은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다.

 

- 이 성서의 본문은 야곱의 결혼이야기이다. 처음에 라반의 제안은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 같다. 조카가 성실하게 한 달 동안 열심

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품삯을 어느 정도 지불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야곱은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테니 작은 딸 라헬을 달라고 청한다. 이 말에는 부인을 재산으로 간주했던 당시의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칠 년의 세월은 젊은 소녀를 맞아들이기 위해 신랑될 사람이 지불해야 할 돈을 일로 환산시켜 계산한 대가이다. 칠 년의 임금은 매우 높은 가격이지만 라헬에 대한 야곱의 열렬한 사랑이나 라반의 정도를 넘는 욕심에 비해 결코 지나치게 높다고 할 수 없겠다. 라헬 말고도 라반에게는 레아라는 딸이 있었다. 레아라는 이름은 암소라는 뜻이 있는데 암양이라는 뜻의 라헬이라는 이름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의 저자는 레아를 부드러운 눈을 가진 소녀로 묘사한다. 여기서 부드럽다는 표현은 ‘약간 멍청하다’ 또는 ‘눈의 초점이 다소 흐리다’라는 부정적인 뜻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암소처럼 착하고 순박하긴 하지만 별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이에 반해 라헬은 레아에 비해 아라비아 사람이 좋아하는 반짝이는 쾌활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쁘다’고 묘사된다. 날렵하고 싹싹하며 재기가 넘치면서도 한편으로 성깔도 있는 깜찍한 아가씨를 연상할 수 있겠다. 과연 라헬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야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이렇게 상반된 성격을 가진 레아와 라헬은 야곱 집안에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장본인들이 된다. 교부들은 레아를 유다인 회당의 전표, 라헬을 교회의 전표라고 풀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 회당보다도 그 뒤에 오는 교회를 거룩하고 깨끗한 배우자로서 사랑하셨다.

 

-야곱은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외삼촌 라반은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는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고 말한다. 이 라반의 말 속에도 당시의 결혼관습을 엿 볼 수 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삼촌이 혼기가 찬 소녀의 첫 결혼 상대가 될 자격과 권리가 있고, 사촌이 그 권리를 포기하면 다른 친척들에게 청혼권이 돌아간다. 이 관습은 씨족의 결속을 도모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근동의 아랍인들은 아내를 ‘삼촌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라반이 이 관습을 존중하며 야곱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이제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친척이라는 대등한 관계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바뀐다. 그로부터 야곱에게 있어 꿈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야곱은 아무리 일이 고되더라도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일 날을 생각하며 참아 내었다. 야곱이 만일 라헬과 완전히 떨어진 장소에서 이런 고된 나날을 보내야 했더라면 하루가 여삼추 같았겠지만 한집안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일을 하고 있는 데야 못 참을 것도 없지 않았겠는가? 그는 확실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기쁘게 이 긴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마침내 약속된 칠 년이 지나자 야곱은 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래서 라반은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크게 베풀어 준다. 이 결혼잔치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잔치 첫날 밤 라반은 작은 딸 라헬 대신 레아를 신방으로 들여보낸다. 야곱은 이것도 모르고 레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아침에서야 신부가 라헬에서 레아로 바뀐 것을 알아채었다. 잔치의 고조된 분위기와 신부가 쓰고 들어온 베일 때문에 야곱이 신부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라반의 흉계에 깜박 속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이 자신을 에사오라고 속인데 대한 응보인 듯하다. 야곱은 자기를 속인 사실에 대해 삼촌에게 강력하게 항의한다.

 

- 이에 삼촌 라반은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 딸을 큰 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라반이 조카 야곱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반은 여기서 야곱의 형 에사오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챈 사실을 넌지시 꼬집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짓은 우리 집안에서는 통하지 않네, 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는 자네 아버지 이사악과는 달리 질서와 전통을 깨뜨리는 걸 용납할 수 없다네.” 아마 이런 의미가 담긴 말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라반의 속셈은 집안의 체통을 지키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이어지는 라반의 말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례 기간 한 주간이라도 채워 주면 작은 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년 동안 내일을 해주어야만 하네.” 라반은 일 잘하는 조카를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둘 목적으로 자기의 두 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리한 야곱이 라반의 음흉한 속셈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역시 형 에사오에게 저지른 잘못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삼촌의 말에 양심이 찔린 데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라헬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서 말없이 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그리하여 야곱은 레아를 위한 일주일 동안의 혼인잔치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다시 칠년이라는 세월을 삼촌의 집에서 일해 주기로 결정한다. 라곱이 레아를 거절하면 잔치는 엉망이 되고 손님 전부의 조소와 화를 사게 된다. 이와같이 하여 라반은 큰 딸을 라헬과 똑같은 값으로 시집보내게 된다. 덕분에 라반은 라헬을 위한 결혼잔치를 따로 마련해줄 필요가 없어져 잔치 비용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라헬을 야곱에게 시집보내면서 아버지 라반이 하녀 빌하를 딸려 보냈다는 기록은 후에 라헬이 자식이 없자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소실로 들여보내 아들을 낳도록 했다는 구절을 준비하고 있다. 야곱이 라헬도 아내로 맞아들여,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다는 마지막 말마디는 두 여인 사이에 벌어질 갈등을 미리 예고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야곱의 적극적인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촌 라헬에 반한 야곱이 어떻게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가의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흐뭇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사오의 이야기에서 교활한 사기꾼으로 드러난 야곱이 삼촌 라반의 책략을 모를리 없건마는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말없이 십사 년이라는 세월을 삼촌 댁 일을 거들며 참고 지냈던 것이다. 한 젊은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오랜 세월을 초지일심으로 견뎌 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결혼한 후에도 야곱은 라헬에 대한 사랑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결혼에 임하는 야곱의 성실하고 적극적인 자세와 인내의 태도는 결혼을 준비하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이미 결혼 생활을 시작한 부부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창세 29, 31-30, 24: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

 

       이 대목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베냐민을 제외한 열한 아들과 디나가 태어나는 경위를 말해 준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조

상이 된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 11명까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났다. 29장 31-30장 24절 까지는 이 11명의 이름의 기원이 통속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저마다 레아와 라헬 사이의 대립한 이야기 가운데 엿볼 수 있다. 유목민 사회에서 남자들이 생존을 위해 다른 족속의 유목민들과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여자들은 일부다처제의 가정 안에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힘을 동원하여 투쟁하였다. 가정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 주는 것은 무엇보다 남편에게 아들을 많이 낳아 주는 일이었다. 아들이 많아야 가정에 힘이 생기고 부가 축적될 게 아니겠는가? 이 본문의 이야기는 라헬과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얻고 안살림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들 낳는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야곱은 레아에게서 여섯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라헬의 몸종 빌하와 레아의 몸종 질바의 라헬에게서 각각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라헬에게서 얻은 베냐민의 탄생 이야기는 이 대목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레아와 라헬은 하느님의 보살피심과 연관지어 아들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복잡하지만 그 이름들의 뜻을 본문에 따라 차례로 살펴보자.

 

- 우선 남편에게 차별대우를 받던 레아에게서 네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하느님이 라헬에게는 남편의 사랑을 주셨지만 태는 열

어 주시지 않았고, 레아에게는 태는 열어 주셨지만 남편의 사랑은 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차별대우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문에 미움을 받다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덜 사랑을 받는다는 뜻의 과장된 표현이다. 즉 라헬만큼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첫 아들 르우벤은 ‘나의 고통을 보다’와 ‘나를 사랑하다’라는 히브리 단어와 연결된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듣다’, 셋째 아들 레위는 ‘이어지다’, 넷째 아들 유다는 ‘내가 하느님을 찬양하다’라는 단어와 각각 연결된다. 이 유다족은 후에 12족을 지도하게 되며 다윗, 솔로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유다의 자손이 된다. 언니 레아가 이렇게 많은 아들을 출산하는 것을 보고 동생인 라헬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구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커다란 수치요 슬픔이지 않던가? 그래서 라헬은 야곱에게 몸종 빌하를 소실로 들여보내고 빌하가 낳은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무릎 안는다.’는 표현은 양자로 받아들일 때의 예식행위이다. 빌하가 낳아 준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 이름 단은 ‘하느님이 나의 속사정을 들어 주셨다’는 라헬의 말과 연결된다. 또 빌하가 두 번째로 낳아 준 야곱의 여섯 번째 아들 납달리는 ‘내가 힘겹게 투쟁하였다’는 라헬의 말과 연결된다.

 

- 라헬이 그녀의 몸종 빌하를 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갖게 된 걸 보고 이제는 자신의 태기가 막힌 줄로 생각하고 있는 언니 레아도 몸종 질바를 야곱의 소실로 들여보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야곱의 일곱 번째 아들을 레아는 가드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행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질바는 또다시 야곱에게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을 낳아주고, 레아는 ‘나는 행복하다’라는 뜻의 아셀이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붙여 준다.

 

- 그러다가 어느 날 큰 아들 르우벤이 자귀나무를 레아에게 갖다 바치는데 히브리 말로 두다임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사랑’ 또는 ‘연인’이라는 뜻의 히브리 단어 돗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무 열매를 ‘사랑의 사과’라고도 부르면서 최음제로 사용했다. 레아는 이 나무를 나누어 다라는 라헬의 청을 거절하지만 하룻밤 남편과의 잠자리를 양보해 주겠다는 흥정을 받아들이고 자귀나무를 갈라 준다. 그렇게 해서 레아는 야곱에게 아홉 번째 아기를 낳아주고 ‘보상’이라는 뜻의 이싸갈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여기서 보상은 레아가 자신의 몸종 질바를 소실로 들여보낸 데 대한 하느님의 보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후 레아는 그녀로서는 마지막으로 야곱에게 열 번째 아들을 낳아 주는데 ‘나에게 선물을 주시다’는 뜻의 즈불룬이라는 이름이 이 아이에게 붙여진다. 한편, 자귀나무 열매를 먹고 라헬도 야곱에게 열한 번째 아들을 낳아 준다. 레아의 딸 이름 디나에 대한 설명은 없고, 라헬의 아들 요셉에 대해서는 ‘씻어 주다’와 ‘하나 더 주다’는 단어와 연결시켜 그 이름의 뜻이 풀이된다.

 

- 야곱의 아들들이 태어난 것은 히브리인 12부족의 기원이며, 그 의미는 중요하다. 동시에 자매라고 하기보다 이미 적수가 된 이 두 사람의 비극을 생각하게 한다. 일부다처에는 이러한 비극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여인의 권리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특히 그렇다. 구약시대에 점차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고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시기 전에(마태 19, 4-9), 사실상 히브리인 사이에서는 일부다처의 관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자식이 많다는 것은 노동력이 많다는 것이며, 번영을 뜻하기도 하였다.

 

- 이 이야기에 소개된 야곱의 결혼 생활은 일부일처제를 최상의 결혼 형태로 보고 현대인들의 눈을 바라보면 부도덕하고 무절제한 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아무런 생계수단과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가족의 숫자를 최대한으로 늘리려 했던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던 결혼 형태였다. 물론 야곱의 경우처럼 일부다처제의 갖가지 폐단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 안에 스며들어 갈등을 야기시켰지만 야곱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귀중한 메시지는 이 두 여인이 자신들의 문제에 하느님을 끌어들이고 하느님의 중재를 요청했으며, 하느님 편에서는 이들의 갈등과 무질서들을 몸소 원만하게 풀어 나가셨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61-172.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21-124.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99-304.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