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33장: 야곱이 에사오를 다시 만나다

마리아 아나빔 2011. 3. 12. 09:19

 

 

 

                           성서나눔36: 창세기 33장: 야곱이 에사오를 다시 만나다.

 

 

 

들어가면서

 

 

    이 장에서는 29-32장에 사용된 전승과 같은 것을 전부(29장) 볼 수 있으니, 기사 자체는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야곱과 에사오의 긴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야곱과 에사오의 갈등은 동생이 형에게 내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는 사건에서 그 결정을 이루었다가 야곱과 에사오의 재회로 해소된다. 이 과의 이야기에는 야곱이 그토록 마주치기 두려워했던 형 에사오와의 상면이 의외에도 형의 관대한 용서와 따뜻한 형제애를 확인하는 만남으로 귀결된다. 야곱의 비굴하리만큼 지나친 저자세와 에사오의 단순하면서도 진실한 환대가 매우 대조적으로 비교되며, 그러나 두 형제의 이 극적인 화해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화해는 이루었지만 그 동안에 파인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형제는 서로 자기 갈 길을 찾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에사오의 성격이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에사오를 두려워하고 될 수록 빨리 헤어지려 했다. 에사오의 태도는 품위가 있고 고상했으며, 옛 일에는 일체 언급이 없고, 동생을 돌보아 주려고 한다. 에사오의 자손인 에돔인이 이스라엘인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미움을 받았지만, 그것을 생각하면, 여기에 쓰여진 이야기는 저자가 진실을 기록한 증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Text 안에서

 

 

창세 33, 1-20: 저를 아우로 여기시거든 제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앞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야곱이 이미 전멸의 위험 앞에서 반이라도 건지기 위해 가족을 두 패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형 에사오에게 합당한 예를 갖추어 문안드리기 위해 가족을 세 패로 나눈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만든 대열의 순서는 자신에게 덜 소중한 사람들을 선두에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중간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중간에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맨 나중에 차례로 배치시켜 놓은 것이다. 자신이 앞장을 서고 그 뒤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들이, 그 다음에 레아와 그녀가 낳은 자녀들이, 그리고 맨 뒤에 라헬과 그녀의 아들 요셉이 따라오게 하였다.

 

- 야곱은 왕 앞에서 신하가 취하는 완전한 종속자의 예를 갖추어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에사오를 맞았다. 일곱 번 절하는 것은 파라오의 왕국에서도(가나안의 작은 나라 왕들은 에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신하의 예를 표시하는 뜻으로 “일곱 번 엎드려 절한다”는 말을 썼다), 가나안에서도 존경을 표시하는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한 번이 보통이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엎드려 절하였다.(1 사무 10,41)에사오는 야곱을 보자 순간적으로 뛰어나와 목을 끌어안고 용서의 표시로 입을 맞추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이 울음을 터뜨린 것은 진심에서 나온 울음일 것이다. 둘 다 나이를 먹었고 서로 미워할 까닭이 없었다. 형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취한 야곱의 인위적인 태도에 비해 에사오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울음이 진정되자 에사오는 주변을 돌아보며 야곱과 함께 온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다. 야곱은 한껏 자신을 낮추어 후손의 번영이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밝힌다. 가족들도 도착한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에사오에게 인사를 했다.

 

- 이어 에사오는 야곱에게 그의 가축떼가 나뉘어져 온 이유를 물었다. 야곱은 이 가축들이 에사오의 마음에 들기 위한 선물임을 밝힌다. 선물 전체(580마리의 동물)이라 생각하며, 에사오의 질문은 사양하는 뜻이라고 풀이하는 이도 있으나, 이것은 32장 8절에 나오는 첫 번째 무리로 보는 편이 타당한 것 같다. 이것은 야훼전승에서는 첫 선물, 기사 전체로 보아서는 추가 선물, 어쨌든 야곱은 에사오에게 선물을 주고, 지금은 물론 장래를 위해 우호관계도 맺을 수 있게 된다. 이 선물은 충분히 제 구실을 다한 셈이 된다. 여기서 에사오를 칭하는 “형님”이라는 표현은 원문에 “내 주님”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하느님을 뵙는 것”은 “하느님 앞에 나아갈 허락을 받고, 은혜를 받는다.”는 뜻이다. 에사오에게 극존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말은 아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중하였다. 그러나 에사오는 정중하게 야곱의 선물을 사양한다. 사실 400명의 부하를 거느닐 정도이면 에사오의 부귀도 대단했을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이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 덕분임을 재삼 강조하면서 선물을 꼭 받아 주시라고 간청한다. 아마도 야곱의 재산이 하느님의 축복에 기인한 것이라면 야곱이 에사오에게 내릴 축복을 가로채 부를 축적한 것이니 만큼 그 축복의 몫을 에사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야곱의 간청에 못이겨 에사오는 선물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에사오는 야곱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드러냈고, 야곱도 형의 용서를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에사오는 야곱에게 세일로 서둘러 함께 떠나자고 하였다. 그곳에서 같이 살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에사오에게 먼저 떠나가시라고 청한다. 야곱은 아직 에사오를 완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사오는 부하들 중의 일부를 남겨 야곱 가족을 호위하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야곱은 점잖지만 단호하게 사양한다. 형의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으로 보아 야곱이 형과 더불어 세일에서 살 의향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에사오는 야곱의 말을 믿고 먼저 떠났다. 그 이후 창세기의 저자는 에사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에사오가 떠난 후 야곱이 취한 여행길은 세일과는 전혀 반대 방향이다. 야곱이 도착하여 짐을 푼 곳은 초막이라는 뜻을 지닌 수꼿(오막살이/우리)이라는 도시인데 야뽁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브니엘과 요르단 강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수꼿에 집을 짓고 가축우리들도 여러 개 세웠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야곱이 이곳에서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을 지은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거기에서 산 것 같다. 실제로 이어지는 34장의 이야기에서 야곱의 자녀들은 갑자기 모두 성숙한 어른들이 되어 있다.

 

- 수꼿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하더라도 야곱의 생활은 아직도 반유목민 생활이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것은 야곱이 가나안 땅 세켐 마을에 도착하여 그 앞에 천막을 쳤다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세겜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미 아브라함이 여기에 제단을 쌓았었고(12,7), 후에 요셉이 여기에 묻혔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을 전부 불러 모아 종교회의를 열고 야훼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장엄하게 서약하도록 했다. 야곱은 세겜의 유지 하몰에게서 은 백냥(고대의 화폐단위, 아마 대강 어린 양 한 마리 값과 같은 것이든지, 혹은 어린 양의 모습으로 부어 만든 것, 번역 본은 거의 “어린 양 백마리”라고 읽고 있다)을 주고 천막을 칠 땅을 샀다. 하몰에 대한 언급은 뒤따라오는 이야기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쌓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동사는, 보통은 제단이 아니라 기둥을 세울 경우에 쓰는 말이기 때문에, 본문을 고쳐 “제단” 대신에 “기둥”이라고 읽는 이도 있다)을 쌓고 그 제단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엘(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강하시다/힘이 있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엘 신도 이 지역에서 섬기던 가나안의 신 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킨다.

 

- 야곱과 에사오가 재회하는 이 대목에서 갈등 관계에 있었던 두 사람의 서로 상반된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동생 야곱은 형의 용서와 형과의 화해를 얻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끝내 불신과 경계의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데 반해 형 에사오는 야곱에 대한 일말의 서운함도 마음에 남겨 두지 않은 채 진정으로 아우의 무사한 귀환을 함께 살자고 까지 제안한다. 우리는 여기서 용서를 청하는 자보다 용서하는 자의 인격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분위기 속에서 성숙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02-205.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39-142.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29-332.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