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곳

영신수련과 이냐시오 로욜라

마리아 아나빔 2011. 3. 12. 11:18

 

 

                                     영 신 수 련(Exereitia Spiritualia)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영신 수련( 靈身修鍊) 을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쓴 지침서.

일반적으로 영신 수련은 특별한 생활규칙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영혼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기도, 묵상, 관상, 영적 독서 등의 영신적 방법들을 말한다.

 

특별히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회심 후 스페인의 만레사 동굴에서 영신수련의 기본원리 와 요점을 기술한 것과 1년 후 몇 가지 부칙을 덧붙여 애긍시사에 관한 규범, 교회의 정신과 일치하는 사고방식 및 그리스도의 생 애의 신비적 사적 등을 합해서 엮은 것이다.

 

《영신수련의 근본원리≫

"인간은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 렇게 함은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라는 본론의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구성》

머리말, 본론 및 부칙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본론은 네주간으로 나눠서 행하기로 된 묵상자료를 매일의 순서에 따라 논술하고 있다.

첫째 주간에 인간 의 공통적인 인생관, 죄와 죄의 결과를,

둘째 주간에는 그리스도와 그 왕국을,

셋째와 넷째 주간에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케 한다.

끝으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교황 바오로 3세(재위:1534~1549)의 인가를 받은 이후 역대 교황과 많은 신학자 들로부터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위한 영신수련의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으로 추천되었다. 실제로 30일 피정 혹은 10일, 8일, 5일, 3 일간 피정 등에 널리 사용된다.

 

 

 

 

                                                    성(聖) 이냐시오 (1495~1556)

                                                   (완덕으로 나아가는 여정으로서의 생애)

 

1) 로욜라의 성인.(축일은 7월 31일)

예수회의 창립자. 스페인의 로욜라 가문 출신.

2)일찍 입 대,

팜펠루나 함락(1521년) 때 부상당하여 병상에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서적을 읽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결심 하였다.- (회심기)

3) 회복 후 몬세라트에서 참회, 만레사에서 기도와 금욕 생활을 하였다.- (정화기)

대부분 거기서 쓰여진 《영성수련》은 신비체험 을 통해 얻은 그의 영성적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 - (조명기).

4) 로마와 예루살렘을 탁발여행,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 학문의 필요성을 절 감,

그의 나이 33세 바르셀로나의 어린 학생들에게서 문법부터 배우기 시작.- (일치기)

5) 마침내 파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524~1534).

6) 파 리 시절, 하비에르와 파베르 등 됫 날 첫 예수회원이 된 6인을 알게 되었고 모두 153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7) 이들은 교황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수도단체의 설립을 청원,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대칙서에 의해 예수회는 공인되었다.

8) 그 뒤 급성장하는 예수회와 그 회칙은 제정(1547~1550)에 전념, 회칙은 일생을 통해 개편 되었다.

9)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수회를 통해 교회를 안으로부터 개혁시킨 데 있으며,

예수회는 교육사업과 성사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새로 발견된 교지역의 복음화를 통해 종교개혁으 로 타격받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생애

 

 

     16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했고 교회 역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시기에 있었다. 당시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로 알려졌던 성 이냐시오는 스페인의 명문 귀족 바스크 가문에서 태어난 11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26살 때까지 그는 세속적인 허영에 몰두했고, 또 허무한 열망을 가지고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당시 나바르라 태수인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1521년에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국경선을 넘어 빰쁠로나로 침입해 들어오자, 그는 성(城)을 사수하기 위하여 공격해 오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용감함에 탄복한 프랑스 군인들은 이냐시오를 자신의 고향 로욜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냐시오의 고통스러운 상처가 차츰 회복되면서, 그는 평소에 즐겨 읽던 무협소설 대신에 당시에 많이 읽혀지던 두 권의 영성 서적, 곧 '성인열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헛된 명예와 영달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 불타 올라 그분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성실한 봉사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로욜라 성을 떠난다. 그 후 몽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중, 1522년 3월 24일 밤중에, 그는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자신의 검과 단도는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했다.

 

       그 사건 이후 이냐시오는 몽세라트를 떠나 만레사에서 머물면서, 까르도넬 강가가 굽어보이는 동굴 안에서 기도와 극기로 1523년 2월까지 1년간의 세월을 보낸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 걸식을 하며 가시 도친 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체험해 갔다. 그는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매우 우울하게 수개월을 보내기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때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암흑의 밤이 지나간 뒤에 그가 체험한 것은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체험한 이냐시오는 그가 말한 대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도적 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작은 도시 만레사를 떠나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의 사도직(司徒職)의 본질적 요소로 삼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는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 33살 때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운 후, 알칼라 대학에서 힘든 과목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공부기간 동안에도 그는 만레사에서 체험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데 헌신했다. 또한 1526년 대림시기부터 1527년 6월까지 키메네스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이를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6월 그는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거기서 이냐시오는 아주 열렬한 복음주의자 였던 까닭에 종교 심문관은 그의 생활방법과 설교, 신학을 문제삼아, 여러번 그를 투옥하고 심문하였다. 살라망카에서도 그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금지되어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1528년 2월 파리로 갔다. 그가 42세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533년 3월 13일 문학 강의 자격에 합격한다.

 

     그 당시 그는 파브로, 사비에르, 살메론, 라이네스, 보바딜랴, 로드리게스, 재이, 브로잇, 코르르들과 친분을 갖게 되어 그들을 영신수련을 통해 지도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이며,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고, 우리가 세상의 사도로서 살아가도록 길러준다. 이러한 기도와 사도직의 지침서인 '영신수련'으로부터,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예수회의 사도직이 등장하는 것이다.

1534년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가난, 정결의 첫 허원을 했다. 1535년 4월 그는 대학공부를 끝내고 파리를 떠나 1537년 46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1537년 그가 파브로와 라이네즈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영시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단체를 '예수의 동반자' (Compainions of Jesus)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539년 3월, 이냐시오와 그의 동반자들은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예수회 첫 회헌을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6년 9월 27일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냐시오가 돌아가실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어 갔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냐시오의 이상과 정신은 라 스또르따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을 그 원천으로 한다. 이 체험과 은혜는 이냐시오의 첫 동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통해 나누어졌고, 지금도 [영신수련]과 [예수회]를 통해 교회에 전수된다. 하느님께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에 베푸신 특은을 우리 삶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는 모든 믿는 이들이 나눌 수 있도록 이끄신다.

'테마가 있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석학의 역사  (0) 2011.03.29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0) 2011.03.29
영신수련이란?  (0) 2011.03.12
『한국종교문화의 전개를』를 읽고  (0) 2011.03.12
신앙과 이성  (0) 201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