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문화의 전개를』를 읽고
- 마리아 아나빔 -
이 글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정진홍교수의 글로써 “한국종교문화”가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원형이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의 역사적 전개와 더불어 어떤 문화적 특성을 지니며, 어떠한 문제점들을 야기하였는지 그리고 ‘우리의 것’으로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종교문화가 보편적인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외래 종교의 전래 이후 비로소 우리 문화적 종교적 심성이 개발되었고 종교문화가 마침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국종교문화의 전개는 삶 자체 “ 삶다움” 사람다움에 대한 물음을 지니고 전개되어 왔으며, 그것은 삶의 현실성을 경험한 것에서, 또한 그것을 초극하려는 본연적인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삶이란 물음을 물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그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지역에서 살고 있든 간에 각기 자기가 처한 문화적 조건 속에서 제각기의 모습으로 해답을 사는 삶을 구체화하고 이러한 기능을 담당해온 인간의 독특한 문화 표상을 종교라고 부르며, 종교는 문화가 지니고 있는 “ 해답의 상징을 사는 존재” 곧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 」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종교는 ‘물음’에 대한 ‘해답’의 논리를 구조화하고 있으면서 존재 양태의 전이를 경험한 것으로, 그 경험은 이론, 실천(제의), 공동체 등으로 구체화되는 것이 종교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제 생각을 말한다면, 종교란 ‘해답의 상징을 사는 존재’라고 했을 때 그 표현 양상은 현실세계에서의 ‘사람다운 삶’이 되는 것이 기준이 되고, 또한 그렇게 잘 살아 갈 때에 종교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종교가 지니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가 피력하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종교가 지녀야할 궁극적인 것들에 대한 즉 ‘초월성’의 부분이 너무 미약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란 ‘초월성’을 가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때 해답을 사는 삶의 상징체제는 종교적인 성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초월성의 부족으로 단지 윤리적 인간의 삶을 지향하는 사회의 규범이나 보편된 윤리적 가치로 남겨질 수 있으며, 마치 유교를 보편 종교로 간주하지 않듯이, 해답을 사는 상징체제로서의 종교도 그러한 소지가 없잖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안에도 초월성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의 어려움들을 초극하려는 현세적인 것으로만 남아있기에 종교적인 특색으로서 총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약간 개념의 형성에 부족함이 있는 듯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것이 어쯤 우리 한국종교문화가 가지고 있는 종교로서의 한계점이며,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없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의 기원은 바로 물음의 에토스(ethos)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는 우리 종교를 이어왔던 물음의 상징체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것은 「하늘」을 경험하여 빚어진 해답의 상징체계와 사제를 통하여 「 힘」과 만나는 제의적 삶에의 참여를 해답으로 사는 무속적 종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 나름의 모습으로 정착되어 있는 것을 신화와 제의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종교문화는 다원성(plurality)을 구조적 특성으로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대조적인 특성을 지니면서도 서로의 다름보다는 서로의 수용 가능성을 현실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민족의 종교심성으로서 한국의 문화사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한국 종교의 원형이 하늘경험과 신들의 극대화된 힘의 실재들 신으로 현존한다는 무속이 우리종교문화의 원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기도 하면서 상호 보완적이면서 이른바 외래종교 이전부터 이후까지 그 종교들을 담는 그릇으로, 그 종교들을 기능케 하는 가능성의 한계로, 한편 그 종교들이 한국종교이게 하는 기층적 실재로 역할을 하는 다원성을 구조적인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헌적 자료나 민속학적 탐구들 안에서 하늘경험이 우리민족의 주된 종교심의 원형이었음은 간과하더라도, 무속의 형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샤머니즘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가까운 아시아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는 특히 샤머니즘이 많았음을 볼 때 무속이 우리종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요인에서 비롯되었는지 자세하게 규명하지는 못한 것 같다. 단지, 무속이 우리민족의 종교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토착화된 종교심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달라질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 종교 문화가 다원성이란 것에 있어서도 상호 배제성의 원리에 의한 병렬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침투하여 용해되어 있는 흐름으로 간주할 때 복잡화는 단순성의 분화이지 다원성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단원성의 논리는 다름의 배제, 다름의 거절을 규범으로 삼는다고 할 때, 이 다원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적 원형위에 보편적 종교라고 불리우는 외래종교들은 새로운 해답의 상징체계로서 새로움을 더하는 불교는 미토스(mithos)로서, 유교는 로고스(logos)로서, 그리스도교는 테오스(theos)로서 서로 융합되면서 독자적이고 고유한 한국종교들을 창출하였다는 것이 그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의 미토스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우리 종교의 하늘 경험의 원형이 가지지 못한 초월적 실재를 제시해줌으로서 「문제없음」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화엄이나 정토의 우리 불교는 바로 그 예로서 제시되며, 이러한 불교의 미토스의 첨가는 불투명했던 전통적인 해답의 상징체계를 원만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미토스는 그것 자체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그것의 적극적 기여와 아울러 그것에 상응할 수 있는 전통적 신앙과 적합성에 의하여 다시 한국적 불교의 에토스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의 경우에서도 근원적인 전통적 종교 심성의 바탕위에 로고스의 새로움을 더한 것으로써 우리의 전통적 종교심성의 커다란 흐름위에 불교와는 다른 사실을 보태주었는데, 하나는 유교의 실천 윤리로 언급될 수 있는 「經」학이 이제까지 우리의 종교 경험이 충분히 지니지 못한 합리적 추론의 이성적 규범(logos)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禮」학이 삶의 실천적 몸짓의 상징적 의미를 합리적 해석의 틀에서 조형하여 규범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즉 유교적 해답의 에토스가 로고스(logos) 로 호칭될 만한 유교적 해답의 새로운 상징체계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인 탐구와 통치 질서를 위한 제도적 이념으로, 그리고 규범적 예속의 기반으로 정착해 간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합리적 추론의 이성적 규범은 그 자체로 해답의 상징 기능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하는 또 다른 상징체계를 자체 안에 지니고 있기에 오늘날 까지 우리민족의 종교심안에 남아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禮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가족을 종교공동체이게 했다는 것이 유교가 새로움을 더한 것이 된다. 끝으로 그리스도교안에서의 새로움은 바로 테오스(theos)로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우리의 다른 종교들보다 지극히 이질적인 것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그 전례에 있어서는 여타의 종교의 전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지만,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우리종교와의 상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만남을 때조차도 그것이 주장하는 天主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같은 언표는 잠재적인 하늘경험에 내포되어 있던 은폐된 신의 현재화된 모습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갈등을 빚은 것은 불교나 유교와의 만남에서였지 고유한 종교의 물음과 해답의 구조는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그 철저한 중보적 개념은 무속신앙에서의 “힘”의 구현을 위한 중보자가 역사 창조의 모델로 정착했다는 것과 생활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인간의 총체적 수용이 가능한 삶의 유형을 제시했다는 것 끝으로 이러한 새로움의 전개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마찰이나 갈등이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댓가를 치루면서도 융합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그리스 신화적 용어와 의미를 한국종교문화에 상응하여, 우리종교의 흐름을 전개하고자 하는 착상은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국종교문화의 두 원형이 그 종교들의 기층에 자리 잡고, 외래종교들을 한국적으로 토착화 시키는 것이 의미 있는 이론이기도하지만, 인간존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미물음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들이 본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대한 것은 배제되어 있는 듯 하다. 모두가 우리종교의 두 원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일관되게 흐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의 특징을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유독 우리민족은 그 특징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한 심성의 분석이 미흡함이 있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으며, 그 이외의 다른 문화적 작용의 원인들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우리 고유의 정신적 원형중의 하나라고 할 수 도 있는 풍류도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온전한 우리의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종교심들을 발전시키는 우리민족의 정신이 어디에서 파생되고 있는지, 특히 은폐된 신 인식은 우리 민족의 종교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왜냐하면, 하늘 경험에서 비롯된 초월적 경험의 신 인식은 사라진 신이었고, 무교는 그 사라진 신을 중재자를 통하여 실존케 하려 했으며, 불교는 그 신을 관음과 미륵으로 대체했으며, 유교와의 만남에서는 治者의 위계를 영매적인 위치로 정립하며, 실천적인 禮로 보완되었으며, 그리스도교에 와서는 그 은폐된 신 인식이 가톨릭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 바로 天主의 인식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인 것 같다. 그리고 의구심이 나는 또 하나의 것으로 이토록 우리종교문화의 원형인 하늘경험과 무교가 우리종교문화의 기층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 종교자리 자리를 잡은 이 현시대에 무교와의 대립이 기존종교와의 사이에 발생되는지 아이러니한 점이다.
끝으로 저자는 종교의 본질은 종교의 자기반성에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가는 것이며,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종교적 경건함 즉, 종교적 삶의 자세가 진지하게 요구되며, 그 규범은 바로 인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 이여야 하며 이것이 또한 우리종교문화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과제임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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