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수련이란?
- 마리아 아나빔 -
1. 영신수련이란 무엇인가?
영신수련은 분량으로 하면 소책자 100쪽이 미쳐 안되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완성되는 데에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냐시오는 이 책을 만레사에서 쓰기 시작하여 알깔라, 살라망까, 파리에서도 계속 적어 넣고 고쳤으며, 로마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 부분을 체험하고 실행하면서 적은 것은 역시 만레사라고 해야 한다.
이 책은 이론적이거나 철학적, 신학적인 성찰의 결과가 아니며 또한 뛰어난 재능이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오직 이냐시오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오랫동안 혼자서 관찰하고 판단하면서 지내온 삶의 열매이다. 그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단 한 글자도 보태지 않았다. 그의 관찰에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의식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면서 스스로 묻곤 하였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부딪히고 겪는 이 사실을 일깨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 자신의 인생사를 읽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이 이것을 알게 된다면 생활이 많이 바뀔텐데!"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엮어진 것이다. 그는 뜻밖에 얻은 내적 자유에 감동되어 어떻게 그 자유를 얻게 되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상 생활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와 성인전을 읽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그분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모험을 감행하여 죄의 노예로 지내던 자신의 처지에까지 내려오신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찬찬히 한 단계씩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하나의 "방식과 순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따르면 누구나 자유를 회복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즉 우리 모든 인간들의 처지인 내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회복기의 정신 체조 교본을 고안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수련들을 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효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적 체조의 효과는 각자가 가져야 할 진지한 마음 자세와 영신수련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수련을 하는 사람은 진정 유일하게 효과를 주시는 분 곧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막힘없이 자유롭게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신수련은 인간을 뿌리깊은 고독에서 해방시켜주는 그분과의 만남을 위한 수단이다. 인간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고독은 정신 세계의 블랙홀처럼 인간 존재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며 인생 자체를 허무로 돌리게끔 충동질한다. 세상을 오직 홀로 살아가는 것만큼 비인간적인 일이 또 있겠는가! 이냐시오의 삶이 바로 그랬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영신수련이 의도하는 것은 하느님과 영신수련을 하는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통교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하느님 편에서 이미 시작하신 이 만남으로 당신을 이끌며,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역정을 돌아보게 하고 인간 역사의 무대에 놓여있는 자신을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지루한 독백으로부터 끌어내어 무진장한 대화적 실존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당신의 고유한 인생 여정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계신다. 자신의 인생 역사를 해독하려면 모든 인간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를 얻어야 한다. 이 열쇠는 바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앙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역사를 해독하면서 그분을 만나게 하는 신적인 안목이며, 그분과 함께 우리 인생을 재건토록 하는 거룩한 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필연코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냐시오가 겪은 일들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자기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이것을 단지 개인적인 비밀로 간직하지 않고 이 체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체험을 글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거듭거듭 성찰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체험을 귀담아 들으면서 이 모든 것들을 실제적인 수련의 형태로 갈고 다듬었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일생일대의 일로 삼게 되었다.
2.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구조와 그 역동성
1548년에 출판된 이후 4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교회 안에 있어 온 여러 종류의 피정이나 영적수련들의 원형으로서 [영신수련]이 교회의 내적 삶에 기여해온 바는 이것이 지니는 고유한 역동성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역동성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피정자의 개별적인 투신을 심화시키도록 이끄는 외적인 구조와 그 내적인 움직임 모두를 의미한다.
[영신수련]의 본래 의미는 피정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들이 그로 하여금 더 깊이 주님을 친밀히 알고, 깊이 사랑하며, 가까이 따르도록 이끌어 주는 여정에 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얻는 영적 체험은 늘 철저한 자기 정화를 시발점으로 하여 궁극에는 하느님을 향한 관대한 응답에 이르는 단계를 거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영신수련]이 생활 신분을 선택하고 개혁하는데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어왔고 이러한 관점이 [영신수련]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결과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영신수련]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소명의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향해 더 단호히 투신토록 이끈다. 즉,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복음의 가치에 합당한 전폭적인 쇄신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의 신분이 정해져 있으면 정해진 바에서, 혹인 이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더 나은 쇄신을 위해 이끌어 간다. 이것이 [영신수련]의 본래 의미이다.
이러한 영적 여정이 [영신수련]에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4개의 주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일련의 프로그램이나 코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영신수련]의 본질은 문자로 기록된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끌어주는 일련의 체험들이 엮어내는 역동성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영신수련]을 연구함에 있어 그 역동성을 밝히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나 구절로 간단하게 [영신수련]의 의미를 표현하기는 매우 애매하지만, '삶의 가치를 정돈하기 위한 과정'이라거나 '내적 자유의 성장을 도모하는 과정'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극명하게 그 본질을 드러내준다. '불편심'이나 '무애착' 등의 표현들 역시 [영신수련]을 체험하는 이가 결국에는 자신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신수련]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하여 여러 표현이나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극명하게 그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은 '내적 자유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는다'거나 주님께서 세상을 바라보고 결정하신 바로 그 원리에 따라 자신도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등도 바로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내적 자질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영신수련]이 어떤 정지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표를 향하여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들이다.
[영신수련]을 외부에서 바라보면 단지 외적으로 꽉짜여진 질서에 의해 기도와 성찰의 시간과 방법이 정해져 있고, 기타 제반 규정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듯한 구조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역동성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영신수련]의 구조와 흐름을 연구하기 위하여는 실제로 그것을 해본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신수련]이라는 체험의 현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성령의 움직이심을 수용하면서 자유롭게 응답을 내리도록 이끄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영적 열매를 충실히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들의 내부적 통일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선 그것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영신수련]을 구성하는 일련의 수련들을 설명해 보겠다.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이라는 기도문이 [영신수련]의 첫머리에 나온다. 사실 이 기도문은 이냐시오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다. 이 기도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으로 이끌어 가기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신수련]의 역동성과 잘 연결되고 있다. 이 기도문은 사도 바울로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하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 속에 융화되도록 이끌어 간다. 바로 이러한 정신 때문에 이 기도는 [영신수련]에서 통합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영신수련]의 첫머리에는 '일러두기'라 불리는 20개 항의 지침들이 나온다. 이 지침들은 [영신수련] 본문 속에 필요에 따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부칙'들이나 '주의'들과 더불어 [영신수련]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그 기본 맥락을 지도자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일러두기'에 이어 [영신수련]의 목적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냐시오는 각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를 원했다. 우리 삶에서 서로 상충되고 반대되는 가치들을 정돈하기를 원하고 진실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감정이나 편견에 좌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우리가 삶의 근본적인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과 선택들을 직면할 때 분명히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영신수련] 피정은 '원리와 기초'[23]라 불리는 대목을 숙고하면서 시작된다. 이 대목은 이냐시오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서, 이후 [영신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몇 안되는 짧은 문단속에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전통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요약되어 있고, 이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구원 진리의 객관적 지평이 제시된다. 즉,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 사물과의 관계가 명확히 객관적인 지평에서 제시된다. '원리와 기초'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면서 피정자의 의식 안에 이러한 초대에 올바로 응답하고 있지 못했다라는 인식이 형성되면서 첫째 주간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진다.
1) 첫째 주간
첫째 주간에 두 종류의 자료가 배열된 순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양심성찰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24-43]을 설명한 후 곧 이어 다섯 개의 묵상[45-71]을 제시한다.
이냐시오의 기본 전략은 먼저 보편적인 지평에서 죄의 신비에 대하여 성서를 통해 묵상하고, 이어서 어느 한 개인의 죄에 대해 묵상한 후, 자신의 죄를 묵상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성, 감성, 의지의 차원에서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하느님에게 사랑 받고 구원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얻게되는 평화가 바로 첫째 주간을 마무리짓는 표시이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자비는 분명 실재 체험이며 우리 자신의 죄스러움만큼이나 사실적이다. 이냐시오가 첫째 주간에서 강조하는 관대한 마음의 태도는 둘째 주간으로 옮아가도록 하는 데 중요하다.
2) 둘째 주간
둘째 주간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관상함으로써 그분이 취하신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분을 본받도록 이끌어 준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를 부르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도록 하시는지를 식별하도록 이끌어준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올바른 방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는 최상의 방법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제시해주신 것처럼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영신수련]의 고유묵상들, 즉 '왕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타잎의 사람들', '겸손의 세 단계', '선택을 위한 길잡이' 들이 둘째 주간의 중심 축을 이루며 그리스도 생애 신비 사적을 관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3) 셋째 주간
셋째 주간의 목적은 "아픔으로 가득차신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고, 근심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근심하고,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받으신 그렇게 많은 고난에 대해서 눈물과 슬픔을 간구하는 것"[203]이다.
이를 위해 제시되는 기도 방법은 물론 관상이다. 이냐시오는 앞선 주간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었던 세 개의 묵상 요점에 세 가지를 더하여 여섯 개의 요점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첨가된 세 개의 요점[195-197]은 숙고를 통해 예수의 삶의 신비 사적에 접근하는데 보다 내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첨가된 요점들은 이냐시오가 담화의 의미와 방법을 되돌아보면서 보충한 것으로 이제는 대화의 친밀함보다는 열정의 친밀함을 보다 강조한다.
4) 넷째 주간
넷째 주간은 예수의 부활 신비를 묵상한다. 이 주간에 구하는 은총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광과 기쁨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221]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에 동참하고자 하는 은총을 구한다.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수고하도록 한 열정은 예수의 승리 안에서도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바뀐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새로운 삶의 완성에로 나아감에 있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이 기쁨은 큰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놀라움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이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급격하게 변해왔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조명 아래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230-237)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 관상의 목적은 사랑이라는 실재 안으로 뛰어들어, 우리 삶의 구체적인 이곳과 저곳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위로부터 내려와야 하는 사랑"[184]이다. 우리는 다만 이 사랑이 마음속 깊이 꿰뚫고 들어오도록 기도할 뿐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선물과 은총을 내림으로써 계속 위로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선물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불변의 선물이며, 그가 우리의 일과 어려움 안에서 계속해서 열정을 불어 넣어주는 선물이며, 이 새로운 창조 안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예수의 삶이 넘쳐흐르도록 하는 은총이다. 이 관상은 사도적 정신의 핵심이다. 늘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 우리가 늘 그 속에 잠겨있는 사랑, 모든 것이 시작되고 되돌아가는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만물과 나 자신은 성령의 현존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활동 속에서 관상하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3. 영신수련의 적용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조명의 은총이다. 특히 만레사 동굴에서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신비적 조명은 늘 새로운 은혜의 기반이 되었다. 이냐시오는 [자서전]에서 "그가 본 것들은 그를 강화시켰고, 그 후에도 언제나 그의 신앙을 굳게 하는 힘이 되었다."[29]고 적고 있다. 이런 이냐시오의 조명 체험은 [영신수련] 안에 체계화된 방법론으로 들어와 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다양한 영적 체험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복음서의 빛 아래서 여러 단계로 엮었고 이를 체험적인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원리와 기초'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갖는 순서적인 프로그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제시된 흐름은 이상적인 차원에서 제시된 지평과 주관적인 응답을 정리한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순서적인 차원에서 피정이 진행되고 주관적인 인식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령 첫째 주간의 객관적 지평이 그 주간의 묵상 가운데 얻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둘째 혹은 셋째 주간에 더 깊게 피정자에게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리와 기초'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 첫머리와 끝머리에 나와 있기 때문에 [영신수련]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묵상은 [영신수련] 전체를 끌어가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종의 [영신수련]의 앞 괄호와 뒤 괄호의 역할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영신수련]에 있어서는 피정자와 지도자 모두 순서보다는 역동성에 더욱 주목하면서 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냐시오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내적인 체험을 깊이 성찰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즉 각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현실적인 적응력과 영적인 생동감을 갖는 것은 우리가 자신 안에 일어나는 내면 세계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면서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면 세계에 대한 이런 지성적인 이해와 확신이 영적 성숙의 기반이 된다. 이런 지성적인 확신은 일반적으로 지적 호기심과 진리를 향한 단호한 투신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표현된다. 영혼의 내부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영혼의 여러 현상에 대해 이해하도록 촉구하고 지성적으로 이해할 때 얻는 확신은 이 이해를 실천에 옮김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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