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38장: 유다와 타마르

마리아 아나빔 2011. 4. 8. 17:56

 

                     

                     성서나눔40(창세기 38장): 유다와 타마르

 

 

 

들어가면서

 

 

       이 장은 야곱의 아들들의 계보(야곱 설화에 속해야 하는 것)를 이어받아 유다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더구나 이 계보는 다윗을 거쳐 마지막에 그리스도께(마태 1, 3-5, 16) 이르기 때문에 이 장은 유다 사람의 역사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표현법부터 야훼전승에 속하는 것이지만 요셉의 전기 안에 있는 야훼전승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 38장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가 왜 이 이야기가 갑자기 요셉 설화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아마도 다윗 왕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야훼스트가 요셉 이야기에서 유다가 언급되는 기회에 다윗 왕의 원조상인 유다에 관한 전승을 옮겨 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다윗 왕은 유다의 며느리 타마르가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 잉태한 쌍둥이 중 제라를 밀치고 나온 동생 베레스의 후손이었다. 유다 지파는 레위와 시므온 지파처럼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스라엘의 부족 연맹에 가담하게 된다.

 

 

     유다는 37장까지는 형제들과 함께 있기(37장,26) 때문에 이 이야기를 38장으로 여기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장과 앞뒤에 있는 장의 연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종 전승을 비교할 경우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써 있는 오난과 유다의 죄는, 도덕적인 견지에서 다음 장의 요셉의 순결한 덕을 돋보이게 하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승 중의 하나인 판관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 보면 유다에 관한 언급이 빠져 있다. 그러나 나중에 합류한 유다 지파는 다윗 왕을 낳고 그에게서 남부 유다 왕국의 왕조가 창출되었으며, 이 다윗 가문에서 구세주가 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나 구세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장차 이스라엘에서 패권을 쥐게 될 유다 지파의 기원에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Text 안에서

 

 

 

                 창세기38(1-11): 그마저 형들처럼 죽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 ‘그 무렵’이라는 표현은 확실치 않은 어떤 시기를 가리킨다. 야곱의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던 유다가 언제 어떻게 형제들과 분리되어 가나안 사람들 틈에 끼여 살게 되었는지 아무런 암시도 없다. 유다는 팔레스티나의 산악 지대로부터 서쪽의 아둘람으로 내려왔다. 아둘람은 헤브론에서 가자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에 있는 가나안 성읍이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 셋을 얻는다. 그들의 이름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이다. 셋째 아들 셀라를 낳은 곳은 ‘그집’인데 아둘람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유다는 아브라함이 아사악의 부인을 얻어 준 것처럼 첫 아들 에르의 부인을 얻어 준다. 그가 집안 전체를 통괄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에르의 아내는 타마르이라는 가나안 여인이었다. 성서에서 종려나무/대추야자나무라는 뜻의 다마르는 여자의 이름인 동시에 성읍의 이름이다(1열왕 9, 18; 에제 47, 19; 48, 28).

 

- 그런데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하느님 앞에서 못된 짓을 한 탓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 못된 짓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옛 이스라엘의 관념대로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른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사무엘 후서 6장 7절에 보면 우짜가 넘어지려는 하느님의 궤에 손을 댔다가 그분의 진노를 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맏아들 에르가 손이 없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레위법에 의해서 그의 바로 밑의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여 형의 가문에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 아시리아 사람, 헷 사람의 율법에서는 우선 아우, 다음에 아버지로 되어 있다. 타마르는 헷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명기 25장 5절 이하에 보면,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만일 시동생이 이 규정을 거부하면 죽은 형의 아내는 성문 앞의 장로들에게로 가서 고발하고 장로들은 일차 시동생을 타일러 형수의 권리를 찾아 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도 시동생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장로들 앞에서 형수가 시동생에게 다가서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을 해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되면 이 시동생은 그 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신 벗깃 집안’이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갖게 된다.

 

- 오난은 이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형부 타마르를 맞아들인다. 그러나 형수가 낳게 될 첫 아이가 자기 가문의 아들이 될 수 없고 더구나 이 아이가 형의 재산을 차지할 정식 상속자가 될 것임을 알고 다말과 부부행위를 하던 도중 정액을 바닥에 흘려 죽은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한다. 이 일이 하느님의 눈에 거슬려 그도 하느님에게 죽임을 당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오난의 이기주의, 그리고 동시에 혼인에 대한 자연법과 신법을 거스른 그의 과오를 단죄하신 것이다. 여기서 자위행위를 뜻하는 오나니즘이라는 단어가 유래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단어의 뜻과는 상관없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족보존법인 레위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오난의 이야기를 현대적인 성윤리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신명기(25, 5-10)에 있는 수혼제의 규정아들없이 죽은 남자의 동생이 자손을 얻기 위하여 그 과부(형수)와 결혼하는 제도였다. 이런 법률은 벌써 헷인이나 아시리아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신명기(25, 6)에 따르면 두 번째 남편에서 태어난 맏아들만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으므로 오난은 다른 처를 통하여 자기 가문을 이을 자식을 얻을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째거나 오난의 이기심과 결혼, 그 자체의 목적의 위반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 둘째 아들 오난도 이렇게 비명에 숨지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도 이런 식으로 요절할까 봐 겁이 났다. 유다는 자기 아들들이 둘이나 요절하는 진짜 이유가 혹시 며느리 타마르에게 있지 않은가 해서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결심한다. 토비트서 3장 7절 이하에 보면 라구엘의 딸 사라가 일곱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부부관계도 맺기 전에 악한 귀신의 장난으로 번번이 남편들이 죽자 자기 아버지 여종에게서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지만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이 없는 과부는 자기 친정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레위법의 규정이 있다. 유다는 며느리를 돌려보낼 구실로 자기의 남은 아들 셀라가 아직 결혼하기에 어리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아들이 결혼 적령기에 도달할 때까지 친정집에 가서 홀몸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물론 유다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유다는 내심 타마르가 변심하여 이스라엘의 혼례법에 저촉을 받지 않는 그녀의 동족인 가나안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미망인은 친정에 돌아가 살아도 시아버지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새 남편을 얻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의 두 아들이 다 죽은 것은 타마르의 탓이라 여기고 셀라가 어른이 된 뒤에도 그녀를 타마르에게 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유다는 타마르가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이후 그녀를 다시 집안에 불러들일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 짧은 대목이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혼례관습의 중요한 일면을 배웠다. 그들의 혼례법과 부부윤리나 성윤리를 우리 시대와 사회의 그것들과 비교해 볼 때 이해하지 못할 대목들이 많이 있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규정을 우리 시대에 글자 그대로 적용시키면 커다란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법과 규정이 어떤 의도에서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 먼저 살펴보고 그 법정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성서에 나오는 죽은 형제의 아내를 다음 동생이 받아들이는 풍습은 우리 눈에 부도덕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문의 생명과 이름을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들 중의 하나였던 고대인들에겐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은 당연한 처사였다. 오히려 그것을 기피하는 행위가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어 원로들에게 고발할 죄목이 되었다. 동시에 이 규정은 홀몸이 되어 혼자서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과부의 딱한 처지를 보살펴 주는 매우 인도주의적인 법이었다.

 

- 하느님은 다양한 민족과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인간의 생활풍습과 지혜의 발달 과정에 맞추어 각기 다른 규정들을 제시해 주신다. 이 규정들 뒤에는 자연법과 인간애와 같은 보편적 원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받아들일 것은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규범들 그 차체가 아니라 이 규정들 뒤에 숨어 있는 법정신이다. 이 법정신 안에는 하느님의 자상한 지도와 보살핌에 힘입어 끊임없이 성숙해 가고 있는 인간의 지혜와 양심이 자리 잡고 있다.

 

 

창세기 38. 12-30: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

 

-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흘렀다. 유다는 아내가 죽자 장례를 지내 주고 친구와 함께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올라간다. 딤나는 아둘람에서 북동쪽에, 베들레헴에서는 서쪽에 위치한 유다인의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다. 31장에 언급된 대로 양털을 깎을 때엔 축제가 곁들여진다. 시아버지가 딤나로 양털을 깍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타마르은 남편의 장례 때부터 입고 있었던 과부의 옷(유딧 8,5;10,3;16,7)을 벗어 버리고 너울을 쓰고 거리에 나앉았다. 너울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타마르는 규정에 따라 자기 권리를 찾으려 했다. 그 권리란 죽은 자기 남편의 피와 똑같은 혈통의 아이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셀라를 자기에게 주기를 거절하는 시아버지를 유혹하기로 결심한다.

 

- 타마르은 창녀처럼 두 개의 샘이라는 뜻의 에나임 성문에 나가 혼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유다가 그녀를 신전창녀로 착각하고 수작을 걸어 왔다. 신전 창녀들은 종교 축제에서 한 가지 일을 맡고 있었다. 가나안인들은 신들의 생식력을 인간의 것에 따라 상상하였다(호세아 참조). 따라서 신전 매음은 땅과 인간과 짐승의 번식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서 타마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남편의 후사를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행동한다. 타마르의 계획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타마르은 시아버지에게 몸값으로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유다는 “내 양떼 가운데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다. 판관기 15장에 보면 삼손도 자기 여자에게 화대로 새끼 염소를 주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타마르는 새끼 염소를 받을 때까지 담보물로 무얼 잡히시라고 요구했다. 유다가 무얼 줄까 하고 묻자 다말은 극히 개인적인 물건을 달라고 한다. 곧 줄 달린 인장 지팡이를 요구한다. 이 인장은 계약을 맺을 때 서명 대신 사용하는 도장으로서 가락지처럼 손가락에 끼거나 줄로 손목이나 목에 걸어도 도난이나 분실을 막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지팡이는 어떤 특별한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권력의 상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장과 지팡이는 나중에 타마르가 시아버지의 신분을 확인하는 신분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셋은 후에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유다는 타마르에게 몹시 반했던지 인장과 지팡이를 즉시 건네주고 한 자리에 들었는데 그 길로 타마르는 임신하게 된다. 유다가 떠나자 타마르는 창녀 옷차림을 벗어 던지고 다시 과부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시아버지를 유혹한 타마르에 대해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유다로 하여금 타마르가 가지보다 낫다고 칭찬하게 한다.

 

- 유다는 자기 담보물을 되찾고 자신의 체면도 지키려고 친구를 시켜 자기와 관계한 창녀의 소재를 알아보게 한다. 이야기의 저자는 타마르가 신전의 창녀행세를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신명기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신전에서의 창녀나 창부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딸들은 아무도 성소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무도 성소에서 몸을 파는 남자가 되지 못한다.”(신명 23, 18-19) 또 호세아 예언자는 신전의 창녀를 찾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사내들이 성소의 창녀들을 찾고 제물을 드리며 으슥한 데를 찾는데, 너희 딸들이 바람을 피운다고 벌하겠는냐? 철없는 백성은 망한다”(호세 4,14).

 

- 가나안 사람들은 이 신전의 창녀들이나 창부들과 교접하면 풍성한 곡식과 많은 가축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다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나안의 신전창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가족이나 동족들 간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자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가나안 친구를 시켜 이 창녀를 찾아내고 자신의 신분을 확인케 해주는 담보물을 되돌려 받으려 했지만 이 창녀의 행방이 묘연했다. 유다는 빈손으로 돌아온 친구에게 “화대를 지불하기 위해 우린 할 만큼 다했으니 더 이상 찾지도 못하는 그녀의 행방을 공개적으로 수소문하여 우리 자신을 공중 앞에서 망신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는가!”하며 자신의 담보물을 되돌려 받는 걸 포기한다. 정욕의 노예가 되었던 유다는 나중에 곧 바로 되찾을 것이라 생각하여 상관없이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을 준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 물건을 자기 체면을 손상하면서까지 되찾을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로부터 석 달쯤 지났을 때 타마르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법적으로 셀라에게 시집가게 되어 있는 타마르가 셀라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를 가졌으니 큰 문제가 된 것이다. 타마르는 셀라와 결혼이 약속된 상태이니만큼 셀라 가정의 가장인 유다의 권위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었다. 가장은 집이나 마을 밖으로 간음한 여자를 끌어내어 돌로 처 죽이게 되어 있다. 옛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이 경우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도록 (화형은 드문 처형방식이기는 하였지만 고대 근동과 성서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유다는 다말이 셀라와 맺어지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음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벌을 선고한다. 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제의 딸이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만 화형에 처하였고(레위 21,9) 그 외의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게 하는 형벌의 규정이 있었다.(신명 22, 23-24;레위 20,10; 에제 16,40;요한 8,5). 또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근친상간의 경우, 둘 다 사형을 받도록 규정되었다.(레위 20,12). 나중에 결정된 이 금령의 선을 따라, 저자는 26절 후반의 글을 덧붙였을 것이다.

 

- 유다 앞에 끌려온 다말은 시아버지의 인장과 지팡이를 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 이 물건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그의 아이를 배었습니다.”하고 말한다. 물적 증거가 너무 확실해서 유다는 부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 그 애가 나보다 정당하다.” 솔직히 고백한다. 레위법에 의한 자신의 권리를 유다에 의해서 박탈당한 타마르는 시집 가문의 혈통을 잇기 위하여 불가피한 수단을 쓴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유다는 다말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맏아들이고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 주는 한편 다시는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마르의 지혜와 용기를 두고두고 찬양하고 기억하게 되었다(롯기 4, 12;마태 1,3). 타마르가 잉태한 아이는 쌍둥이였는데 출산할 때 형이 손을 내밀자 산파가 진홍실을 매어 주었다. 그런데 동생 될 녀석이 형을 밀치고 나온다. 그래서 먼저 나온 동생을 ‘틈바구니’/ ‘돌파구’라는 뜻의 베레스라고 부르고 형은 진홍색이라는 뜻의 제라(볽은 빛을 내며 해가 떠오르다라는 뜻으로 빛나다와 관련된다.) 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후에 동생 베레스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오게 된다.

 

      이 짧은 이야기는 사랑과 죽음, 탄생, 간음, 죄, 속임수 등 인간사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며, 도적적 가르침이 아니라 집안을 살리고 미래를 열려고 자신의 명예와 생명까지 거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 점에서 타마르는 룻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이방인 출신, 다윗 왕조의 족보에 기재, 쌍둥이 출산 등). 아울러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의 출신 지파로(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지만 위 세 형이 저주를 받는 바람에 실질적인 장남이 된다)의 기원을 설명한다.(마태 1,3)

 

     타마르의 이야기의 저자는 여기서 신전창녀를 찾은 유다나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은 타마르에 대하여 아무런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저자는 오로지 생명의 보존과 후손의 번영을 하느님의 지상명령으로 알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경주하는 행위를 칭송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문화와 지혜의 발달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27-234.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57-161.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55-360.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1-82.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