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37 장: 요셉과 그 형제들

마리아 아나빔 2011. 3. 26. 14:17

 

 

                                  성서나눔 39(창세기 37장): 요셉과 그 형제들

 

 

들어가면서

 

     여기서 시작되는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기를 이룬 사건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해서 이집트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며 또한 아시아의 유목민인 히브리인이 에집트를 벗어나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게 된 사실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또 요셉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후에 욥과 토비트에 나타나는 고통의 문제 해결에, 최초의 빛을 던지는 것이다. 요셉의 구원 뿐 아니라, 형들의 흉계도 하느님의 계획에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37-50장). 하느님은 요셉을 통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을 구하신다. 야곱이 가족이 에집트에서 성장하고 번영하는 것은 바로 요셉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이야기는 악에서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성서저자들은 요셉 이야기를 사용하여 또 다른 유형의 하느님의 사람을 묘사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유순한 신앙을 발견했고, 야곱에게서는 하느님과 자신의 재능에 의지하는 진취적인 인간을 목격했으며 이제 요셉에게서는 그 생애가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인간, 순수한 재능을 최대의 특징으로 지닌 인간을 목격하게 된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는다. 사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요셉에게 무척도 잔인하고 부당하게 군다. 그는 인생이 질곡 밑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지지만 불평하지도 않거니와 음모가나 책략가가 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따라서 요셉은 출발점이 제아무리 낮았다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 점에서 요셉 이야기들은 하느님 백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비유가 되고 있다. 상황이 제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들어 높여 주실 것이다. 이 같은 요셉의 인생행로는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건너가는 출애굽의 형태를 예시해 준다. 여기서 드러나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악하고 불의한 행위에 방해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선을 끌어내실 수 있다.

 

     또한 요셉 이야기의 세부적인 대목들을 해설하기 전에 이 이야기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어떤 학자들은 요셉 이야기를 야곱 설화에 속하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 성격이 야곱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이야기의 초점이 어디까지나 요셉에게 집중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야곱 설화와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선 이 이야기는 여러 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다른 성조설화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엮어진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성은 주로 야훼스트 문헌과 엘로히스트 문헌에 바탕을 두고 있고, 사제계 문헌도 여기저기 끼여 있는데 최종편집자가 이 세 문헌들을 부드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세부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야훼스트와 엘로히스트문헌들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 충돌을 빚고 있다.

 

     요셉과 열두 형제의 아버지 야곱을 야훼스트는 이스라엘, 엘로히스트는 야곱이라고 부르고,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제안한 형제를 야훼스트는 유다, 엘로히스트는 르우벤으로 소개하고 있다. 야훼스트는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엘로히스트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려 간 것으로 적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점에 있어서 이 이야기가 서로 다른 문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만, 최종편집자의 기술적인 편집 작업으로 모순과 충돌되는 부분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둘째, 다른 성조 설화들은 예배 장소나 성지의 기원을 밝히거나 인명이나 지명의 근원을 설명하는 소단위의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는 데 비해 요셉 설화는 그런 기원적인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요셉 설화는 인물들에 대한 심리학적인 통찰력과 성격묘사가 뛰어나다. 이 점에 있어서 요셉 설화의 저자는 에집트인들의 지혜문학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셋째, 다른 성조 설화에서와는 달리 요셉 설화에서는 직접적인 하느님의 발현이나 개입이 등장하지 않는다. 세 쌍의 꿈이 나오는데 그 안에 하느님이나 천사들이 나타나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는 전혀 없고 이 꿈들이 순전히 인간적인 내용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요셉 설화에서는 하느님이 인간 행위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 때로는 인간의 과오나 죄까지도 이용하시고 계신다. 하느님의 축복과 현존이 39장에 명시적으로 그리고 자주 묘사되고, 40장과 41장에 요셉이 꿈을 해석할 때 하느님의 개입이 강조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느님의 행동은 철저한 비밀에 싸여 인간으로선 접근하기도 어렵고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이 하느님의 비밀은 사건이 결말이 나게 될 때 비로소 밝혀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의 정치적인 배경이다. 야곱 설화가 씌어진 것은 솔로몬 왕 대였는데 왕정제도가 이제 서서히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왕정제도는 그것이 이스라엘이 처음 도입된건 시기부터 이미 이 제도가 과연 하느님의 왕권을 존중시하는 야훼 신앙과 합치 될 수 있을까 하는 비판에 부딪쳤다. 더구나 솔로몬 왕이 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백성들에게 강요했을 때 왕정제도가 개인적 가정생활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 되었다. 그리고 기왕지사 왕정제도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서자 출신의 동생으로서 적자 출신의 형 압살롬을 제치고 권좌에 오른 솔로몬의 왕위계승을 정당하게 보아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 되었다. 솔로몬 궁전의 서기관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요셉 설화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한편으로 요셉이 에집트의 막강한 재상이 되었으면서도 형들에게 함부로 권력을 휘둘러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기아에서 가족들을 보호해 주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왕에게 개인적 가정생활을 보호해 주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벨과 카인, 야곱과 에사오의 설화에 이어 요셉과 열두 형제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이 반드시 인간적인 서열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줌으로써 솔로몬의 왕위계승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배경이 이야기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이야기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요셉 설화 속에는 영원불변의 진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호소하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야훼계전승은 후에 왕위를 받게 되는 유다 지파의 선조 유다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반면에 엘로힘계 전승은 매우 신중하게 르우벤의 구실을 강조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에브라임의 우월성 쪽으로 이끌어 나간다. 이 엘로힘계 전승은 요셉의 지혜와 고상함을 찬양한다. 이 젊은 이스라엘인은 하느님의 영을 받고 그분의 힘으로 꿈을 해석하고 업무를 수행하며, 자기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는 능력을 받는다. 이에 반해 야훼계 저자는 형제들을 짐짓 염탐꾼으로 몰아가고,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기위해서 일을 꾸미며 점을 치고 기근을 이용해서 에집트 전체를 종속시키며, 그리고 자기의 큰 아들 므나쎄가 아니라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더 큰 복을 빌어주는 아버지 야곱의 뜻에 따르는 요셉의 재량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부 사항들에서는 차이를 보이면서도 서로 상당히 밀접한 이러한 전승들의 근간은 북부의 ‘요셉지파들‘ 그리고 북부와 남부가 서로 자기 영토라고 다투는 베냐민 지파에서 유래한다.

 

     이미 레베카의 혼인 이야기(24장), 그리고 에사오가 맏아들 권리를 빼앗기는 사건을 생생하게 서술 한 바 있는 야훼계 저자는, 에집트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사건들을 당시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의 다툼과 관련해서 매우 휼륭하게 서술해 낸다. 상당이 절제적인 엘로힘계 저자가 내놓는 상세한 설명들은 기원전 천년대보다는 기원전 8세기의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요셉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가시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지는 않으시지만, 지상의 일들을 이끄시고 인간의 악한 계획까지도 선으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이 섭리는 요셉을 지켜주시면서 그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창세 37, 1-11: 네가 정말 우리에게 왕 노릇할 셈이냐?

 

      열일곱 살 난 요셉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뒤늦게 낳은 첫 아들이자 어머니 없는 처지여서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긴 저고리를 입고, 이복형들의 나쁜 평판을 아버지께 일러 형들의 미움을 산다. 게다가 형들이 그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를 들려주어 한층 더 미움을 받는다. 이제부터 꿈은 요셉의 일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은 꿈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도탄 근처에서 방목하는 형들에게 심부름 갔다가 형들의 모의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린다. 그 과정에서 맏형 르우벤과 유다는 요셉의 목숨을 건지려고 애쓴다. 형들은 그를 미워했고 그의 꿈이 실현될까 두려워 막으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요셉은 최종적으로 이집트의 경호대장에게 팔리고,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자식들이 전하는 거짓 소식에 슬퍼한다. 요셉 설화는 야곱이 선친 이사악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는다는 기록으로 시작된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표현은 사제계 문헌에서 따온 것으로서 요셉을 중심적인 인물이자 영웅으로 다루는 야훼스트와 엘로히스트 문헌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 요셉이 열일곱 살이 되어 형들과 함께 양들을 치게 되었는데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세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야곱의 소실 빌하와 질바의 아들을, 곧 단과 납달리, 가드와 아셀의 잘못을 요셉이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을 편애하여 사치스러운 옷을 지어 입힌 것에 있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편애를 받는 자식은 버릇이 없어지고 다른 형제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편애를 보고 요셉의 형제들은 그가 미워서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게 되었으니 참다운 형제애는 당분간 이 가정에서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그 다음 요셉이 미움을 받은 세 번째 이유는 그가 꾼 한 쌍의 꿈에 있다. 요셉 설화에 나오는 여섯 개의 꿈들은 모두 두 개씩 짝지워져 있는데 짝지워진 한 쌍의 꿈들이 내용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은 들에서 형들이 묶은 곡식단이 요셉이 곡식단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이 꿈에는 반유목민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과 요셉의 장래에 대한 암시가 있다. 요셉이 자랑스레 늘어놓는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발끈해서 “네가 정말 우리에게 왕 노릇할 셈이냐? 고 윽박지른다. 왕정을 반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판이 이 말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꿈은 형들의 권위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위에까지 도전하는 내용이다.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이 그것이다. 이번에는 야곱도 요셉을 나무랐지만 속으로 이 일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즉 야곱은 요셉이 천진스럽게 말하는 꿈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다. 요셉이 뒤에 말해 준 다른 꿈은 그의 생애의 후반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아이에 대한 부모의 편애가 가정 안에서 형제적 공동체의 분위기를 크게 손상시킨다는 걸 배웠다. 특히 자녀수가 적은 소가족일 경우에는 이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자녀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 무엇인지 살펴보고 편애로 인한 자녀들 사이의 갈등을 미연애 방지해야 하겠다. 편애는 결국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소유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창세 37, 12-36: 나는 지하로 내 아들한테 울면서 내려가겠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기록은 여동생 디나를 둘러싸고 그들과 그곳 주민들 사이에 일어났던 갈등(창세 34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세겜은 당시 야곱이 정착해 살고 있었던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져 있었다. 35장 27절-29절에 의하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를 찾아 아브라함 때부터 몸붙여 살던 헤브론 땅 마므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서 야곱은 이사악의 임종도 지켜보고 아버지가 죽자 형 에사오와 더불어 아버지의 장례도 지내 드린다. 이 가록은 사제계 문헌으로서, 야곱과 에사오가 끝내 같이 살지 못하고 화해한 후에도 서로 갈라져 살게 되었다고 보고하는 야휘스트와 엘로히스트의 문헌과는 달리 두 형제가 의좋게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 해브론에서 세겜까지 100km나 되는 거리는 요셉에게 결코 쉬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요셉은 기꺼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요셉이 세겜에까지 왔으나 형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세겜의 들판을 헤매다가 요셉은 그 지방 사람을 만나 형들과 그들이 치는 양떼의 해방을 묻자 그 사람은 형들이 도다인으로 가자는 말을 했다고 알려 준다. 도다인은 세겜에서 다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곳으로 목초가 풍부한 곳이다 어렵게 형들을 찾은 요셉이 반갑게 다가가는데 형들은 그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한다. 그를 죽여 아무 웅덩이에나 던져 넣고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아버지께 보고하자는 음모를 꾸민다. 이 웅덩이는 우기인 겨울철엔 물이 고여 있다가 건기인 여름이 끝나 갈 무렵엔 완전히 말라붙는 곳이다.

 

- 동생들의 말을 듣고 있던 맏형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을 죽이지 않고 나중에 아버지께 돌려드릴 생각에서 “피만은 흘리지 말아라. 그 녀석을 이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고 손만은 대지 말아라.”고 충고한다. 맏형으로서 다른 형제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이 어린 형제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 앞에서 져야 했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맏형의 의견을 존중하여 요셉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그를 물 없는 구덩이에 처넣어 버렸다. 요셉의 옷은 야곱이 요셉에게만 특별히 지어 입힌 장신구를 단 옷(다채로운 옷으로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입는 특수한 옷인데 위엄을 나타내는 것인 듯하다.)으로써 편애를 상징하는, 형제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던 바로 그 옷이었다.

 

- 요셉을 구덩이에 처넣고 그의 형제들이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마침 이스마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스마엘인들은 아브라함의 소실 하갈의 아들로서 바란 사막에서 살기 시작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다. 이 상인들은 향료의 산지로 유명한 길르앗 산악 지대에서 닐 평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에집트이다. 이번에는 유다가 나서서 요셉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넘기자고 권유한다. 요셉을 ‘우리 동기요 우리 혈육’이라고 혈연관계를 강조하는 그의 말투에서 혈육살해가 전혀 다른 죄악보다 중대한 죄임을 형제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 그런데 구덩이 곁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이 형제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요셉을 발견하고 그를 끄집어내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 냥을 받고 팔아넘긴다. 레위기 27장 5절에 보면 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남자 노예의 몸값은 20세겔로 되어 있다. 요셉을 산 이스마엘 사람들은 그를 에집트로 끌고 간다. 그런데 이야기의 맨 마지막 대목에 보면 요셉을 에집트까지 끌고 간 상인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이 아니라 미디안 사람들로 되어 있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저자들이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야훼스트는 이 집안 가장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부르고 요셉이 살아남은 공을 유다에게 돌리며 이스마엘 상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엘로히스트는 꿈 이야기를 들여오고 야곱이라는 이름을 고수하며 르우벤의 개입과 미디안 상이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 아무 영문도 모르는 르우벤은 요셉을 가둔 구덩이에 가보고 그가 없어진 것을 알자 옷을 찢으며 슬퍼한다. 옷을 찢는 행위는 커다란 고통을 의미하고 장례 때의 한 예식이기도 하다. 르우벤은 “그 애가 없어졌으니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슬피 부르짖는다. 동생들에 대해 책임을 진 맏형으로서 아버지가 아끼는 동생 요셉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그 앞에 나타나겠느냐는 탄식이다. 사실 그의 제안에 따라 요셉을 구덩이에 처넣었으니 직접적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할 형편이었다. 형제들은 원래의 공모대로 요셉이 맹수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꾸민다. 그래서 편애의 상징인 요셉의 장신구 달린 옷에 염소의 피를 묻히고 사람을 시켜 그것을 아버지께 보냈다. 야곱은 이 옷을 받자마자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옷을 찢고 베옷을 몸에 걸친 채 슬피 통곡한다. 편애의 상징이었던 요셉의 화려한 옷이 야곱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집에 남은 그의 딸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마다하였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딸들은 레아가 낳아 준 디나 이외엔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창세 46,7.15). 야곱은 죽음의 나라 셰올로 가는 황천길을 요셉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한편 에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신하인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팔린다. 보디발이라는 이름은 에집트의 태양신 ‘레의 선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과의 이야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르우벤의 책임 있는 태도이다. 다른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추출하려다 실패한 그가 자기 옷을 찢으며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슬피 통곡하는 장면에서 미운 동생이지만 넓은 마음으로 품어 주고 살펴주려는 형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동일한 운명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형제요 자매들이다.

 

     37장 이하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중심 역할은 에집트의 지배 아래 들어간 자기 형제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요셉이 수행한다.37,1-2에서 볼 수 있는 사제계 전승은 46,6에 가서야 요약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창세 37-50은 전체적으로 많은 엘로힘계 요소들을 취합하는 야훼계 편집자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19-226.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52-157.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37-34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1-82.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