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38(창세기 35- 36장):야곱이 베텔로 돌아가다
들어가면서
이 장 안에서는 엘로힘 전승, 야훼계 전승 그리고 사제계의 전승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바빌론 유배 시대에 문필 활동을 벌였던 사제들의 작품(P)을 볼 수 있기에 제사적 요소들이 강조되고 있다. 이어지는 야곱의 족보와 36장의 이사악의 족보도 사제계 문헌에 속하는데 사제들은 성조들의 이야기들 끝에 족보를 첨가시킴으로써 인류 역사가 체계적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족보는 설화처럼 아주 오랜 옛날부터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져 오는 귀중한 자료들인데 체계와 질서를 존중하는 사제들의 관심을 끌었다.
Text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마을의 남자들을 대량학살 한 후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세겜을 떠나 베텔로 올라가라고 명하셨다. 실제로 베텔을 세겜보다 300m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야곱의 아들들이 디나를 욕보인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성 안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통혼하면서 같이 살겠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디나를 데리고 떠나겠노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할례를 받게 되었을 때, 그들과 같이 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은 그곳의 남자들을 죽이고 성을 약탈한 후 다른 가나안 사람들에게 복수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출발명령은 시기적절한 것 이였다. 하느님은 베텔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당신에게 제단을 쌓아 바치라고 분부하신다. 여기서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였다. 지금은 그에 대한 감사의 여행을 하라고 하신 명령이다. 아휘스트와 엘로히스트 문헌인 28장에서는 야곱이 형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베텔에서 하느님을 꿈에 뵙고 자진해서 석상을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이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신다. 제단에 대한 권위와 경외심을 강조했던 사제들의 의도가 엿보인다.
- 야곱은 하느님의 분부를 받고 즉시 가족들과 그에게 딸린 사람들에게 세겜을 떠날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사실 세겜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야곱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은 제단을 쌓으러 가기 전에 가족 모두에게 부적처럼 달고 다니던 이방신들을 버리고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도록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나아가기에 앞서 갖추어야 할 외적인 준비였다. 사제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라는 표현은 야곱이 에사오의 복수의 손길을 피하여 도망가던 어려운 상황을 말하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나를 보살펴 주신 하느님”(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28장의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여 주시고 저를 지켜 주시라”는 야곱의 애원을 상기시켜 준다.
- 야곱은 세겜에서 베델까지 이르는 야곱의 새로운 여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제 출발하기 전에 제의적 정화와 우상의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 야곱에게 속한 사람들이 그에게 이방 신상들과 더불어 내놓은 귀걸이들은 달신을 표상하여 초생달 모양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귀걸이는 부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우르와 하란의 유명한 달의 신인 씬을 본따 만든 초생달형도 있다. 그래서 반지나 귀걸이 등은 흔히 신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판관 8, 26 참조). 따라서 귀걸이를 내놓는다는 것은 미신의 포기를 의미한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느티나무 아래 묻고 세겜을 떠나는데 그 근처 일대의 사람들은 신비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감히 야곱 일행을 추적할 엄두도 못 내었다. 이 두려움은 출애급기 23장 27절에 언급된 바로 그 두려움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은 에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에게 가나안 정복 시에 그곳에 사는 모든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 야곱은 드디어 가나안 땅 루즈에 도착했다. 루즈는 28장을 해설할 때 나온바와 같이 베델의 옛 이름이다.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의 베델은 이제 야곱에 의해서 하느님의 이름 엘 베델, 곧 베델의 하느님과 동일시된다. 24장에서 리브가가 하란에서 어떤 유모를 데리고 나왔다고 했는데 이 대목의 저자가 그녀의 이름을 드보라라고 밝혔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드보라의 무덤 이야기가 왜 갑자가가 튀어나오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아마 이야기의 저자가 전승자료를 별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 옮긴 것 같다. 그는 드보라의 무덤 자리를 사람들이 알론바긋 곧 ‘울음의 상수리나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 그 다음의 이야기에서는 바딴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야곱이 야뽁강가에서 하느님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 냈다고 전하는 32장의 기록과 야곱이 에사오의 복수를 피하여 바딴아람으로 가던 도중 베델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축복과 약속을 받은 28장의 기록을 혼합시키고 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야곱도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기 전에 이름부터 바뀌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약속의 내용은 역시 후손과 땅에 대한 것이다. 야곱은 28장에서처럼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델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처럼 야곱의 이야기에서 베델이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장면은 세 번씩이나 나온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황이 조금씩 다르다. 그것은 이 이야기 안에 서로 다른 저자와 전승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 베델을 떠난 야곱 일행이 에브랏 근처에 왔을 때 라헬이 몸을 풀게 되는데 난산이었다. 아기는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출산후유증으로 라헬은 죽는다. 죽으면서 라헬은 아기 이름을 벤야민, 곧 “내고통의 아들”, 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고, “오른손 같은 아들(‘오른쪽’은 상서로운 방향)”이란 뜻 혹은 “행복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데 이는 야곱은 흉조를 길조로 바꾸는 것이다. 라헬은 에브랏 근처에 묻히는데 애브랏의 정확한 위치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라마 근처이다. 후대의 편집자가 에브랏을 베들레헴으로 착각한 것 같다.
-르우벤의 추행에 대한 짧은 이 기사는 중도에서 끊어졌다. 그 죄에 대한 벌은 49장 4절에 기록되었다. 그리이스어 번역에서는 이 뒤에 “그것은 그에게 좋지 않게 보였다”(34, 30)고 덧붙이고 있다. 적자인 르우벤의 동기는 사무엘 하 16장 20-22절에 있는 압살롬의 경우와 같다고 보는 이도 있다.
- 이사악이 세상을 떠나는 27절는 사제전승으로 이사악의 죽음에 대해 차례에 따라 도식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사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아브라함의 죽음의 기록(25, 7-19)을 그대로 복사한 것과 같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을 묻은 것처럼 에사오와 야곱은 이사악을 묻는다. 또 다른 전승과 엇갈린 점까지도 두 기록은 매우 비슷하다.
-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도 성조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져간다. 야곱에게 끊임없이 순례의 여행길을 재촉하시는 하느님께 야곱은 불평 한마디 없이 순종해 왔다. 약속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하고 순례의 길은 고달프지만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니 안심하고 걷는다.
창세기 36장: 가나안에서 난 에돔의 조상 에사오의 자손
들어가면서
성서저자는 야곱의 형 에사오의 자손들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에돔에는 이미 이스라엘 이전부터 임금들이 있었다(31절). 여기에 나오는 족보들은 서로 부분적으로 엇갈리기도 한다.
25장에서 이사악의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스마엘의 계보를 기록하여 이스마엘 이야기의 결말을 짓고 있듯이, 여기서도,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에사오의 계보를 기록하여 그 마무리를 짓는다. 이 장은 7부로 이루어져 있고 그 대부분은 에돔의 각 종족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계보다. 상투어인 1,9절 및 에사오의 이주를 이야기하는 6-8절은 분명히 사제전승에 따른 것이다. 그 밖의 부분의 유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1-5, 9-19절이 이스라엘계, 20-30절은 에돔계의 구전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저자는 본대로, 혹은 들은 대로 계보를 기록하고 엇갈리는 점을 조정하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각 번역본 뿐 아니라 히브리어 사본에 조차 다른 곳이 많다. 이 계보는 역대기 상1장 35-54절에 되풀이되고 있는데, 더욱 다른 곳을 볼 수 있다.
Text 안에서
- 에사오의 아내와 아들들(창세 36, 1-5): 에사오와 에돔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이 이 36장 1절과 8, 19절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리고 9장 43절에서는, 에사오는 “에돔의 아버지” 곧 “에돔 족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에사오 후손의 계보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구분되어 있다. 이 장은 이스라엘인, 에돔인에게서 나온 전승과 문서를 이용하고 있으며, 에사오의 아내들의 이름을 일치시키는데 유의하지 않았다.
- 에사오의 이동(36, 6-8): 이곳은 앞 절의 계속이 아니고, 에사오의 가족이 세일 땅에 이주한 역사를 기록하였을 뿐이다. 세일은 사해 남방 아라바의 넓은 저지의 남쪽에 펼쳐 있는 산악지대이다. 에사오는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세일에 정착해 있었다. 그러나 에사오와 야곱의 반목에 대하여는 전혀 말이 없는 사제전승은(28장), 아버지 이사악이 죽은 때에도 에사오와 야곱은 함께 있었다고 썼다. 여기서 두 형제의 평화로운 이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 있었던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경우와 같다. 헤어지는 이유는 2대 전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롯이 경우와 같다.
에돔의 임금들(31-39): 31절 전반은 그리스어 번역처럼 “ 한 왕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다스리기까지” 곧 “사울이 서기까지”라고도 풀이 되지만, 이 번역처럼 “다윗이 다스리기 전에” 라고도 풀이된다. 따라서 이 기사는 에돔의 마지막 왕까지 그 왕들의 계보이다. 모세가 민수기 20장 14절에서 교섭하는 왕은 초기의 왕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어느 왕이나 선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이 아니었고, 왕의 도읍도 일정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름은 거의 이 장에 나오는 다른 이름과 같아서, 인명이기도 하고 지명이기도 하며, 역사서와 욥기에도 나온다.
- 하닷(39절)이 이 절에 나온 것은 다윗의 이스라엘 정복 당시의 하닷 2세로, 그 때 왕자로서 에집트에 피했다가 후에 되돌아와 솔로몬을 괴롭혔던 왕은 하닷 3세가 되는 셈이다.
- 에돔의 족장들(40-43절): “하닷은 죽었다”로 시작되는 역대기 상 1장 51절에 암시하고 있듯이, 이들 추장은 다윗의 수비대의 원조를 받고 다윗을 대리하여 에돔을 다스림 추장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또 이들의 이름은 본래는 인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명(씨족의 이름등)이었는지도 모른다. 역대기 상 1장의 중의 에돔족의 계보는 이 계보이외에 에돔 족 추장에 대아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15-21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45-148.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37-34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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