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 41(창세기39-40장): 포티파르의 종이 된 요셉/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풀이하다
들어가면서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가 끝나면서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마엘 사람들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 내려온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팔린다. 그리운 부모형제들을 떠나 먼 이국타향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의 처지는 가련하기 짝이 없다. 철없는 꿈자랑의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는 셈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가련한 처지의 요셉을 돌보아 주셔서 그의 앞길을 열어 주셨다고 보고하고 있다. 요셉의 성공담을 돌보아 주셔서 그의 앞길을 열어 주셨다고 보고하고 있다. 요셉의 성공담 전체에 하느님의 특별한 손길이 전제되어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이 이 대목에서처럼 명시적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주인은 요셉을 들에 보내어 힘든 일을 하도록 하는 대신 집안에서 일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요셉이 이미 다른 노예들에 비하여 특전을 받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돌보아 주셔서 요셉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되어 간다. 주인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기 개인적인 심부름꾼으로 삼고 집안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긴다. 주인이 요셉을 이렇게 신임하여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자 이집트의 신들이 아니라 요셉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그 이집트 사람의 집안에 복을 내려 주신다. 이 일은 나중에 파라오가 요셉에게 재상직을 부여 하게 되는 상황의 전조가 되고 있다.
Text 안에서
창세 39, 1-23: 이것은 하느님께 죄가 됩니다
주인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요셉에게 맡기지 않았다. 여기서 포티파르는 파라오의 “신하”인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환관(내시)”이다. 고대 왕실에 있어서 왕궁 안의 일을 본 신하는 거의 환관이었으며, 환관도 아내를 거느렸다는 예가 있다. “경호대” 라는 본래의 뜻은 “백정” 또는 “요리사”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주방장” 또는 “백정의 우두머리”로 되어 있다.히브리인들처럼 이집트인들도 종교적인 관습에서 음식 규정이 까다로웠을 터인데 자신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요셉에게 이 일까지 맡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주인은 자기가 먹는 음식에 관한 일 이외에는 모든 것을 요셉에게 안심하고 맡겼다. 요셉은 그의 어머니 라헬을 닮아 용모가 빼어난 청년이었다. 요셉의 용모에 대한 묘사는 뒤따라 벌어질 사태를 준비시키고 있다. 요셉이 주인 집안의 전권을 쥐고 관리를 해오던 어느 날, 주인의 아내가 그를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눈짓을 하고 자기 침실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요셉은 완강히 거절한다. 요셉이 거절하는 이유는 자신의 동정을 지키기 위한 것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동기이다. 자신을 믿어 주는 주인에게 그리고 자신을 돌보아주시는 하느님께 충성하기 위해서이다. 이 이야기의 주요 저자는 야훼스트인데 요셉이 외국인에게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는 종교적인 경외심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삼가고 있다 요셉이 계속해서 거절하는데도 주인집 여자는 끈질기게 유혹한다.
-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공무상 불가피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마침 주인집 아낙 이외에는 아무도 집 안에 없었다. 부인은 요셉을 보자마자 그의 옷을 붙들고 침실로 가자고 유혹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도덕관념이 희박하였다. 간부의 달콤한 말을 조심하라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하고 있는 잠언( 2장 16)에서도 볼 수 있다. 요셉은 그녀의 손에 옷을 빼앗긴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것은 주인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녀가 주인의 부인이라는 것이 요셉이 그녀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이다. 셋째는 하느님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타당한 이유이다. 이 옷이 문제다. 야곱이 요셉에게 지어 준 장신구 달린 옷이 요셉의 형제들로 하여금 요셉을 증오하게 하고 끝내는 그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더니 이번에는 주인댁 아내에게 빼앗긴 옷이 그의 부도덕한 행위의 증거품으로 제시되어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사랑과 미움은 맥을 같이 하는 법이다.
- 주인 아내는 자신의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자 증오의 화신이 되어 요셉을 궁지에 빠뜨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요셉을 ‘저 히브리 녀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외국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멸조로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우리가 일본 사람을 왜놈이나 쪽발이라고 부르고 일본인들이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주인댁 주인은 집안 하인들을 불러 요셉의 옷을 증거품으로 제시하며 그가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고함을 지른다. 고관 집 안주인으로서의 품위와 체면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나 보다. 부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친 김에 요셉의 옷을 챙겨 두었다가 주인이 오기를 기다려 요셉을 또 다시 중상모략 한다. 그리고 부인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주인에게 뒤집어씌운다. 이에 앞서서 하인들에게 “주인께서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저 히브리 녀석을 데려 왔구나”라고 하면서 주인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물었고 여기서는 당사자에게 직접 대놓고 쏘아붙인다. “당신이 데려온 그 히브리 종 녀석 말이어요. 당시의 종 녀석이 나에게 이 따위 짓을 했단 말이어요.” 아내의 말을 듣고 주인은 아내의 말의 진위를 가릴 생각도 못한 채 화가 치밀어 요셉을 잡아 감옥에 넣어 버린다.
- 사실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댁 아낙을 범하려 했으니 원칙대로라면 사형감이다. 그런데도 주인은 요셉의 평소의 충직성을 침작한 탓인지 감옥에만 가두어 놓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요셉이 갇힌 감옥을 왕 죄수들을 가두어 놓는 곳이라고 보고한다. 이는 왕국 감옥에 갇힌 두 시종장의 꿈 이야기가 나오는 다음 대목에 대비한 배려이다.
- 하느님은 감옥에까지 찾아오시어 요셉을 돌보아 주신다.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베푸시어 요셉으로 하여금 간수장의 호감을 사도록 하신다. 그래서 간수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겨 돌보게 하고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시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풀려 나갔다.
-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요셉이 비록 자신의 경거망동한 언행과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이집트에서의 노예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한편 요셉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그리고 주인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하여 주인댁 마님의 구애도 뿌리침으로써 그의 충직성을 증명해 보였다. 하느님의 돌보심과 요셉의 충직성이 요셉의 삶을 떠받치는 한, 노예 신분으로 살든지 죄수로 감옥에 갇혀 있든지 재상으로 파라오의 궁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든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이다.
또한 창세기는 인간의 비열함, 나약함의 예를 많이 들고 나서, 지금은 요셉의 고귀한 인격의 덕을 말한다. 요셉의 태도는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것과 주인에 대한 충성과 감사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Text 안에서
창세 40, 1-23: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요셉 이야기에 나오는 두 번째 한 쌍의 꿈 이야기로, 엘로히스트 문헌이 주로 이루고 있다. 요셉이 파라오의 경호대장 집의 감옥에 갇혀 지내던 어 느날 궁정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던 시종장 둘이 요셉의 감옥에 들어온다. 여기서 이집트의 최고 통치권자가 사는 ‘큰 집’이라는 뜻의 파라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집트의 역대 왕들을 일컫는 일반적인 호칭이다. 새로 감옥에 들어온 두 시종장 중 하나는 파라오에게 술잔을 올려 드리는 시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빵을 구워 돌리는 시종장이었다. 이들이 직업상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중상모략에 걸려들어 파라오의 눈 밖에 났는지 저자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경호대장은 그들의 전직을 고려하여 자기 감옥에서 가장 믿을 만한 죄수인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의 편리를 보아 주도록 하였다.
어느 날 두 시종장이 동시에 꿈을 꾸었는데 꿈 내용이 서로 달라 그 뜻을 풀어 보고자 고심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꿈
을 통해서 그들의 운명이 미리 알려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요셉이 아침에 감옥에 가보니 두 사람 다 근심에 싸여 있었다. 요셉이 그 이유를 묻은 즉, 자신들의 꿈을 해석하지 못해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요셉은 꿈의 올바른 해석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아니면 마술에 돌리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풀려고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통해서 꿈의 뜻을 밝혀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꿈을 올바르게 푸는 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되는 것이며 인간이 만든 풀이에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장의 거의 엘로힘계 전승에 속한다.
- 술잔 시종장의 꿈은 그의 직책과 연결되어 있다. 포도나무 세 가지가 싹이 나자마자 꽃들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다. 시종장은 포도를 따서 파라오의 잔에 포도즙을 짜넣고 왕에게 그 잔을 바친다. 이 꿈에 대한 해석으로 요셉은 포도나무 세 가지는 사흘을 가리키며 사흘 수에 파라오가 이 시종장을 복직시킬 것이라고 해몽해 준다. 근동과 이집트에서는 술잔을 드리는 일을 맡은 자는 상당히 신분이 높은 왕궁의 관리다. 왕은 독살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식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라오가 마시는 술에, 독이 들었는지 가려내는 일은 그들의 중요 임무의 하나였다. 당시의 이집트 문헌은, 20절에 기록된 것과 같은 공개재판이 있었던 것, 또 파라오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정치적 음모가 궁정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빵을 굽는 사람도 신분이 높은 관리였다.
일반적으로 성서에서 꿈을 해석해 준 대가로 해몽가에게 선물이 주어지는데 요셉은 이런 선물을 요구하지 않고 그 대신 시종장이 관직에 복귀될 때 파라오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여 그곳 감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청한다. 요셉은 자기가 히브리 사람들의 땅에서 억울하게 유괴되어 왔고 이집트에서도 누명을 뒤집어 쓴 채 투옥되었다고 간략하게 자신의 과거 내력을 밝히면서 말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가 노예출신도 아니며, 포로도 아닌 자유인이라는 것, 그리고 부정하게도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끌러 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형들의 행동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가나안을 히브리 사람들의 땅이라고 부른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 이 시절엔 아직 가나안이 히브리인들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야기의 저자가 자기네 시대의 배경에서 이런 표현을 끌어 낸 것이다.
- 요셉의 해몽이 그럴 듯하게 보였던지 빵 굽는 시종장도 자기 꿈의 해석을 요셉에게 청한다. 시종장의 꿈은 흰 과자를 담은 바구니 셋을 그가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파라오에게 바칠 제일 윗 바구니에 담은 음식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이었다. 음식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즉 흉한 공포를 강조한다. 이집트인은 내세를 위하여 시신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짐승들을 반쪽으로 쪼개어 제물로 바치려는데 솔개가 와서 쪼아 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켜 서서 이 새들을 쫓는다. 그러나 빵 굽는 시종장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몽은 불길했다. 바구니 셋은 사흘을 가리키는데 사흘 후에 파라오가 이 시종장을 잡아들여 말뚝에 매달아 죽이니 그 시체를 새들이 와서 쪼아 먹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 사흘 후 파라오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벌이는데 두 시종장을 감옥에서 불러 내어 술잔 시종장은 복직시키고 빵을 만드는 시종장은 처형한다. 파라오의 생일에는 자주 죄수들에게 대사를 베풀었다. 요셉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술잔 시종장은 요셉의 부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이 마지막 기록은 다음 이야기 때 술잔 시종장의 역할을 준비해 준다. 그는 파라오가 한 쌍의 꿈을 꾸고 그 뜻을 풀어 줄 사람을 백방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감옥에 있는 요셉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 이 과의 성서 말씀은 주인 여자를 범하려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의 어려운 삶을 전해 주고 있다. 비록 간수장의 특별한 배려로 감옥 안에서 다른 죄수들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지만 역시 갇힌 몸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이 이야기에서도 감옥에 갇혔다가 요셉의 꿈 해석대로 파라오에게 다시 등용된 술잔 시종장이는 요셉의 부탁을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어도 요셉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면 난해한 꿈의 해석을 통하여 감옥에 갇힌 죄수의 처지에서 일약 이집트의 명재상이 될 날이 요셉에게 닥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꿈 해몽이 자기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집트의 다른 꿈 해몽가들 과는 달리 요셉은 마술이나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35-246.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57-161.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61-36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1-82.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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