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42장: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가다

마리아 아나빔 2011. 4. 27. 19:50

 

 

 

 

                   성서 나눔 43(창세기 42장):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가다

 

 

들어가면서

 

 

 

     42장은 전체적으로 야훼계 전승의 요소들이 약간 섞인 엘로힘계 전승에 속한다. 식량난을 겪는 셈족 집단들이 이렇게 이집트로 내려갔다는 사실은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이집트의 문헌 자체에서도 볼 수 있다. 이집트 정부는 이러한 집단들에게 호의적이면서도 일정한 통제를 하였다.

 

     요셉이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그곳 백성을 기아에서 구했다는 이야기가 끝나고 42장부터는 그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극심한 가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요셉의 말처럼 칠 년 풍작 끝에 칠년 흉작이 계속되자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다”(41,57). 가나안 땅에 곡식이 떨어지자 야곱의 아들들도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내려간다.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고 염탐꾼으로 몰아세우며 사흘 동안 투옥하자, 형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42, 21)라고 여기며 과거의 잘못을 뉘우친다.

 

     얼마 뒤 다시 곡식이 떨어지자 형제들은 베냐민을 데려가야 곡식을 살 수 있다고 야곱에게 말한다. 유다가 베냐민 귀환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자, 야곱은 마지못해 베냐민을 보낸다. 그리고 요셉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45장에서 형제들이 요셉을 알아보고 아버지에게 요셉의 생존 소식을 알리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Text 안에서

 

창세 42, 1-25: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곤경에 빠졌다

 

 

     야곱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가라고 명한다. 무기력하고 도전할 줄 모르는 아들들을 꾸짖는 야곱의 말투에서 그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아들들을 이집트로 떠나보내면서 막내아들 베냐민만은 곁에 남겨 둔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유일한 혈육인 베냐민을 요셉처럼 잃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이다. 야곱은 아직도 특정한 자식에 대한 편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중에 이 베냐민 때문에 형뿐만 아니라 야곱 자신도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가나안을 떠난 야곱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내려간다. 내려간다는 표현은 팔레스티나 중앙의 산악 지대에서 닐 평야를 향해서 내려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형들은 이집트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 요셉을 만나자마자 얼굴을 땅에 대고 큰 절을 올린다. 요셉이 어려서 꾼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요셉이 꿈을 회상한 것은 형들이 그에게 몸을 굽혀 큰 절을 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즉시 알아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 보듯 거칠게 대한다. 이야기의 저자는 요셉의 의도가 형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들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임을 여러 차례 밝힌다. 형들은 온갖 화려한 예복을 입은 이집트의 대재상의 얼굴에서 요셉의 얼굴을 발견해 내지 못하고 요셉의 터무니없는 트집에 그저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이집트인들은 예로부터 아시아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고 군사들을 풀어 지키게 하였다. 요셉이 말하는 ‘이 땅의 허점’이란 방어시설이 없거나 빈약한 장소를 말한다.

 

- 그들이 이집트 국경의 허점을 정찰하러 온 간첩이 아니냐는 요셉의 다그침에 형들은 자신들 열 명은 그런 못된 음모를 실현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모집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한 가장에게 소속된 자녀들이라고 소개한다. 이집트는 항상 동국에서부터 외국인이 쳐들어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패배하여 물러간 힉소스는 시리아, 팔레스티나에서 들어 와 이집트를 포함한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 있었다.

 

-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라는 형들의 고백에서 저자는 제대로 된 진실을 밝히고 있다. 대화의 상대인 형들과 요셉이 모두 야곱의 아들들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저자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생 하나는 없어 졌습니다.”라는 형들의 말은 요셉에 대한 자신들의 범죄를 언급하지 않기 위한 모호한 표현이다. 이 말을 듣고 요셉은 다시 “너희를 시험해 보아야 하겠다. 막내 동생을 이리로 데려오지 않고서는 파라오가 살아 계시는 한 여기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요구한다. 자기 친동기인 베냐민을 보고 싶은 원의가 이 요구 뒤에 깔려 있다. “파라오가 살아 있는 한”이라는 말은 이집트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는 연설용어이다. 그리고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데”는 이집트인들이 맹세할 때 쓰는 말이다. 요셉은 형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다. 철없는 요셉을 물 없는 웅덩이 속에 처넣었던 형들이 이번에는 그의 명령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염탐꾼만이 아니라 도둑으로까지 몰리게 된 요셉의 형제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사흘이 지난 후 요셉은 형들을 감옥에서 불러 내오게 한다. 요셉의 태도가 약간 부드러워진다. 요셉은 자신도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임을 고백한다. 하느님이 외국인들과 연약한 사람들에게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 처벌하신다는 사상은 창세기에 자주 나오는 구절이다(20,3.11; 22,12;39,3). 요셉이 내거는 조건은 앞에서와는 달리 형제들 전부가 아니라 대표 한 사람만 인질로 남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집안 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그러나 베냐민을 보고 싶은 요셉의 욕망은 조건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 막내 동생을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은 형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기억나게 해준다. “그렇게 가슴 아프게 애원하는 것을 보면서도 못 들은 체했다”는 사실을 37장의 요셉이 팔려 가는 대목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형들의 뼈아픈 뉘우침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덧붙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종족들 간의 대화에 통역이 등장하는 대목은 성조들의 이야기에서 이 대목뿐이다. 여기서 통역의 역할을 요셉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셉은 자신의 이집트 말을 통역을 통해서 전달하지만 형들이 하는 히브리말은 직접 알아듣는다. 르우벤은 형제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요셉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을 비난한다. 형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셉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들 앞에서 물러나 운다.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이 이제 와서 뉘우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것이다. 요셉은 감정을 자제하고 그들에게 돌아와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을 묶는다. 맏형 르우벤은 자신을 살려 주려했기 때문에 책임을 면하고 그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장형이 인질로 잡힌 것이다. 즉 요셉은 르우벤이 일찍이 자기를 구해 주려고 했던 일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인질로서 맏아들 르우벤이 아니라 차남 시므온을 잡아 두었다.

 

이 과의 이야기에서 요셉의 신중하고 지성적인 태도와 형들의 참회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 버린 형들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질 법도 한데 마음 안에 일말의 앙심도 남겨 두지 않고 있다. 반면, 형들은 동생에게 한 못된 짓 때문에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맞는 자는 발 뻗고 잘 수 있으나 때린 자는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즉 악인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다.

 

 

창세 42, 26-43,14: 너희는 나에게서 자식을 하나하나 빼앗아 가는구나

 

     형들은 곡식 자루에 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도중에 야영을 하는 자리에서 나귀에 여물을 주려고 곡식자루를 풀다가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느님 맙소사. 이게 어찌된 일이냐?” 라는 표현은 본문대로라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 일은 무엇인가?”로서 하느님만이 아실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수수께끼는 하느님과 요셉만이 알 수 있다. 그들은 야곱에게 돌아와 그간의 모든 자초지종을 상세히 보고한다. 그리고 곡식 자루들을 풀어 보니 자루마다 곡식 대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 사건에 무슨 책략이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것이 이집트 관리들의 실수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보다 더 야곱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 것은 이집트 재상의 제안이다. 왜 하필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베냐민을 요구하느냐 말이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불만을 털어 놓는다. “너희는 나에게서 자식을 하나하나 빼앗아 가는 구나.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 베냐민마저 데려가겠다는 거냐?” 이 말은 야곱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고 그의 이성적인 지식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라헬은 낳은 베냐민은 늙은 야곱에게 있어서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을 대신한 매우 귀한 아들이었다. 야곱은 요셉이 맹수에게 찢겨 죽었고 시므온은 이집트의 재상에게 억류되어 있으며 베냐민은 시므온을 구출하기 위해 보내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요셉을 잃은 후 모든 책임이 못난 자식들에게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는데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감정이 폭발하여 아들들에게 다짜고짜 퍼부은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말은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요셉을 잃게 한 형제들의 잘못으로 시므온이 인질로 잡혔고 시므온을 인질에서 풀려나게 하기 위하여 베냐민이 불려가기 때문이다.

 

- 르우벤은 탄식하고 있는 야곱에게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야곱이 자기 두 아들을 죽여도 무방하다고까지 한다. 르우벤의 이 무모한 제안에 야곱이 동의할 리가 없다. 아들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하여 두 손자의 생명을 담보로 잡아 둘 야곱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르우벤의 말 속에서 우리는 형제들의 마음이 늙으신 아버지를 염려하는 쪽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을 잃은 후 아버지는 요셉의 동기인 베냐민에게 보다 더 큰 편애를 하였겠지만 형제들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야곱은 르우벤의 제안을 들은 체도 하지 아니하고 베냐민을 결코 이집트에 보내지 않을 것을 것이라고 선언하다.

 

- 그런데 기근이 점점 심해져 이집트에서 가져 온 양식도 동이 나버린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집트에 다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분부한다. 이번엔 르우벤 대신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에게 동생을 동반해야만 이집트의 재상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대목부터는 솔로몬 왕궁의 서기관들이 있던 야휘스트의 문헌이 나타난다. 르우벤의 역할 대신 유다의 역할이 강조되고 야곱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시므온의 억류나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베냐민이 이집트로 가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집트의 재상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다에게 “동생이 하나 더 있다는 소리를 왜 해서 나를 이다지도 괴롭히느냐? 고 원망한다. 유다는 이집트의 재상이 꼼꼼하게 캐묻는 바람에 다 털어 놓게 된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리고 베냐민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자청해서 나선다. 만일 그 애를 아버지께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서 평생 죄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용서받을 길이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으로 남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야곱의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형들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우 베냐민을 사랑했는데, 특히 지난날에는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의 베냐민에 대한 사랑은 44장 16-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요셉에게 죄를 짓고 난 뒤에 진정으로 뉘우치고 마음을 바로 잡았던 것을 보여 준다.

 

-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야곱은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우기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해 온 이 경험 많은 노인은 세 가지를 아들들에게 지시한다. 기근으로 시달리는 가나안 땅에서는 아무 쓸모없을 갖가지 종류의 지방 특산물들을 선물로 가져갈 것, 돈은 배상의 의미로 두 배를 준비할 것, 그리고 자루에 들어 있던 돈도 되돌려 주도록 하는 것이다. 야곱은 자식들에게 이별의 축복을 내려주면서 베냐민을 맡긴다. “하지만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잃었지 별 수 있겠느냐?”라는 야곱의 탄식은 자포자기적인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 준다.

 

     이 과의 이야기에서는 르우벤과 유다의 태도가 독자의 마을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집안 식구들을 기아로부터 건져야 하고 동시에 슬픔에 젖어 있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또 다른 자식을 빼앗길 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전적인 책임을 지고 나서는 그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위기 상황 앞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양심을 볼 수 있다. 사실 르우벤과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미움과 질투에 휩싸여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도 동생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형제들이다. 강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만(내유외강)이 고통 중에 있는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56-265.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72-176.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77-380.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3-85.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