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2,8-15: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동산에서 지내는 인간

마리아 아나빔 2010. 6. 17. 19:59

 

도입기도: 시편 8,4-5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그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창세기 2,8-15: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동산에서 지내는 인간

 

 

-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하나 마련하신다.

 

1) 성서 저자는 먼저 자기가 살아본 땅, 메마른 땅, 물이 없고 초목이 드문땅, 가뭄이 심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를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즉 성서저자의 삶의 지리적 배경을 볼 수 있다.

 

 

2) 사람을 데려다 살게 하시려고 하느님이 마련하신 동산은

갖가지 초목이 풍성하게 자라는 동산, 물이 풍족하여 큰강을 이루는 동산,하느님이 인간을 그의 자연 환경(마른 땅)에 데려다 특전적인 여건에 앉혀주셨다는 것을 애기하려는 성서저자의 착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동산은 하느님이 호의로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다운’ 환경 아며 따라서 인간으로서 이 환경을 지켜야하고 고수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뵙고 하느님과 대화하고 우정어린 관계와 충만한 신뢰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사는 환경 가리킨다.

- 아담(사람)을 동산에 데려가시어 동산을 지키게 일하게 만드셨다면(창세 2,15)

노동은 인간의 구성요소임이 분명한 것이다.

노동은 범죄에 앞서고 범죄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본분이다.

노동은 결코 죄 값이 아니다.

경제적 필요만 아니라 노동은 활동을 하고 싶은 충동 ‘창조’하려는 내밀한 필요, 자기 내심에서 일어나는 활력과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상응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를 성취하고, 하느님이 선하신 환경을 자기에게보다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데 이바지 한다.

- 인간은 동산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의 주인, 폭군, 제멋대로 다루는 군주가 아니라 현명하고 배려할 줄 아는 주인, 자기 재산을 보살피고 나아지도록 개선하는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수탈하고 고갈시키고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 말씀 안에 쉬어가기-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룬 야훼스트의 창조설화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위의 성서저자들의 사고는 참으로 범우주적이다. 그들의 사고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그 기원이 더 넓은 인간의 시야를 넘어서는 우주까지 펼쳐진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특별한 존재인 인간에게 ‘동산’을 마련해주시고, 그 동산을 관리하게 하신다. 그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정원지기’와 같은 것 일리라.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말씀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text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야를 성서저자의 시야처럼 나로부터 먼 우주에 이르는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창조사업을 읽어내야 하며, 그 사업에 협조해야 할 것이다. 본래의 하느님의 창조의 첫 정신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맡겨주신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도가의 철학 안에서-

노자는 도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라고 노래했다.

근본은 곧 도는 곧 자연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돌아가자 했던 뿌리는 곧 자연이다. 그의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맥락에 따르는 행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것을 ‘물’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그에게 있어서‘무욕’과 ‘무위’이지만 결코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라 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멈출때를 알아서 길고 오래 갈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에 있어서 ‘자연’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의 생명을 포괄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우주, 그것이 자연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는 우리의 생태계 문제와 함께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우리가 오늘 읽은 창조의 설화와 다를지 않다.

즉 노자의 철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상생상극’하는 것이다. 즉 모든 피조물이 서로 살아남게 도와주는 관계이다.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 (특히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두는 우리에게 이원론적 사고를 가져다 주었다.)이 인간 이외의 생명을 경시하고 결국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생태계의 위기 문제를 초래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면, 이제 내 옆에 생명이 제대로 숨쉴 수 있어야 나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관계적 관점에서 전체 생태계를 바라보는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은 한 개체인 동시에 전체 생태계와 종횡의 연관관계에 있는 생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는 바로 성서저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사고와 일맥상통한다. 즉 하느님이 인간에게 ‘동산’을 마련해시고, 그 동산의 돌봄을 인간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커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해석해내고 하느님이 뜻하신 그 삶으로 나와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만들어 갈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교와 도교의 사상을 서로 비교해보면서....

그리고 성서에 비추어 우리의 삶의 자리를 읽어내 보면서...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48-150.